170화
“……기다려.”
서리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정보가 들어온 탓에 이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용신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부른 게 용제라고?
흑마녀의 말을 전부 신용하는 것은 아니나 하나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뿐이었다.
‘그렇다면 먼 과거부터 용신과 싸워온 이들이 있다는 소리인가?’
삼무제 중 한 명인 용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별이 되어버린 그와 관련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몇 세대나 위의 인물이니까 말이다.
삼무제마저도 거의 잊혀 가는 실정.
마제인 스타린 말고는 그 시대를 풍미하던 인물 중 아직 현역에 남은 이들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요치아 님처럼 다들 은거하거나 수명이 다해 죽었으니까.’
그렇기에 삼무제 중 한 명이었던 용제에 관한 정보가 소실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흑마녀,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지?”
나는 우선 흑마녀가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서리스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세계 침식자인 그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서리스는 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서리스는 흑마녀를 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몰라. 제롬이 이 시대쯤 변절자 중 한 명이 용신에게 거역할 거라고 했을 뿐.”
“그냥 특정 지었을 뿐이냐.”
흑마녀가 어째서 주변 세계 침식을 폭주시키고 다녔는지 서리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용신의 수하는 세계 침식의 힘을 흡수하니까 세계 어딘가에 자신의 힘을 흡수한 사람을 찾고자 했던 거겠지.
흑마녀가 자신을 특정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오래전 첫 세계 침식에 나갔을 당시.
흑마녀로 인해 폭주했던 주인에게서 세계 침식의 힘을 흡수했던 자신을 찾아온 것이리라.
‘흑마녀가 워너힐 아카데미에 왜 나타났는지도 설명이 되고 말이야.’
그동안의 정보를 조합하니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던 서리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나한테 바라는 게 정확히 뭐지? 자기 세계를 멸망시킨 용신을 죽여줬으면 하는 거냐?”
흑마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 또한 용신에게 자신이 살던 세계가 멸망 당한 인물이다.
물론 수많은 인명을 죽인 그녀에게 조금의 동정심도 안 들지만 적어도 그게 목표라면 서리스 앞에 이렇게 나타난 이유가 설명되긴 했다.
“비슷해. 정확히는 다른 세계를 떠도는 게 이제 지긋지긋해.”
“지긋지긋하단 건?”
“멸망해서 나와 같이 가보면 알 거야.”
끔찍한 소리를 하는군.
동시에 서리스는 왜 그들이 검은 별을 지녔고 세계 침식의 힘을 뿌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살았던 세계의 잔재니까.’
멸망해 버린 세계에는 아무런 별도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 새까맣게 변했을 것이고.
세계 침식은 그야말로 그 별의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용신에게 붙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강인해야 했을 테니 그들의 비이상적인 강함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다면 나도 그들과 아니, 우리 세계에 사는 모두가 같은 꼴이 된다. 이 소리인가.’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을 느낀 서리스는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 말을 완전히는 신용 못 한다.”
“응.”
“그러니 신용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직접 두 눈으로 볼 때까지는 네 말은 전부 가설로 취급할 거다.”
용신의 존재는 기억으로 확인했다.
세계 침식자를 양산하는 그 모습은 흑마녀가 말한 열쇠를 만든다는 말과 딱 어울렸으니까.
동시에 망아꾼이 자신을 보고 보였던 의문들 또한 납득할 수 있었다.
‘망아꾼에게 던져 놓은 떡밥이 해결되기 전에 흑마녀가 먼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어쨌든 용신까지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풀어야 하는 의문은 용제와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것이 정말로 연관이 있는가다.
“용제가 나를 변절자로 만들었다는 증거. 그걸 찾아온다면 믿어주지.”
“…….”
흑마녀가 잠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였다.
이제 와서 증거를 못 가져오겠다. 이건가?
“내가 가면 큰일 날 텐데.”
“큰일이라니?”
“제롬의 거처에 있어. 거긴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어.”
그 말을 듣고 서리스도 잠시 입을 닫았다.
확실히 그건 문제가 되긴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 흑마녀가 출몰했다간 어떻게 될지 뻔하니까.
“쯧, 그래, 그럼 그 위치는?”
개구리가 눈을 깜빡이었다.
그 뒤 개구리는 갑자기 폴짝폴짝하며 제자리걸음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사람이 많았었어. 나는 지명 같은 거 잘 모르니까.”
젠장, 거처 위치부터 찾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정보를 가져오랬더니 직접 발로 뛰게 생긴 서리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겨우 잡힌 실마리인 것도 사실이다.’
흑마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확인할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더군다나 아이러니하긴 해도 흑마녀가 용제의 거처를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정보가 믿을만하다는 확신을 줬다.
특정한 위치를 알려줬다면 거기에 함정을 판 것이 아닌지부터 의심했었을 테니까.
‘용제의 거처를 알만한 사람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두 사람이었다.
제일 가깝게 있던 스타린은 얼마 전에 떠나버려 행방이 묘연하고.
다행히 한 사람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살아 계시겠지?’
하산한 지 1년도 안 되었건만 다시 찾아뵐 일이 생겼음에 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나도 해결해야 할 부분이니.’
조만간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야 할 듯싶었다.
“알았어. 그건 내가 직접 찾도록 하지.”
흑마녀에게 맡기는 것보다 직접 발로 뛰는 게 더 마음 편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서리스를 보고 개구리는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런 개구리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검은색의 브로치였다.
“확인하면 거기에 검은 별을 흘려 넣어줘. 연락용이야.”
이런 것도 있나.
서리스는 알겠다고 하곤 그걸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미리 말하지만 난 네 말을 전부 신용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둬.”
“응.”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떠나던 서리스는 문득 개구리 쪽을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원래 저렇게 정상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녀석이던가?’
서리스의 기억 속 흑마녀는 항상 제대로 나열되지 않은 단어들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서리스는 잠시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묻기에는 늦었기에 서리스는 신경을 끄고 캠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서리스를 보던 개구리는 나무 위에서 눈을 깜빡이곤 그대로 폴짝 뛰어내렸다.
개구리의 착지 지점에는 어둠이 생겨났고, 개구리는 곧장 반대편 장소에 도착해 흑마녀의 품 안에 안겼다.
개구리 머리를 쓰다듬던 흑마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거기에는 빛을 잃은 새까만 달 하나가 고요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리저리 부서지고 무너져 멸망해 버린 듯한 세계.
그 세계를 눈에 담으며 흑마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가능할까.”
그 말이 끝마쳤을 때 달은 사라지고 어느샌가 평범한 숲이 자리했다.
“멸망을 타고 또다시 부르짖는 소리는 별에 닿지 못할까.”
또다시 의미 모를 이상한 말만을 내뱉게 된 흑마녀는 작게 조소하곤 그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세계의 잔재를 손에 쥔 채로.
* * *
흑마녀와 헤어진 후 서리스는 모두와 함께 무사히 워너힐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도올로 인해 상당한 고생을 하긴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유례없는 속도로 파견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긴 휴식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서발광, 최근 안 봐줬다고 빠진 거 아니야? 검이 느려진 거 같은데.”
그래서 서리스는 그 휴식 기간 동안 서발광의 훈련을 봐주고 있었다.
서발광이 지닌 별 소드란이 지닌 금강잔월은 자신 밖에 지도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리스가, 너무, 강해진, 거야!”
검을 내지르며 겨우 숨을 내쉰 서발광이 힘겹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서발광의 공격은 분명 속공이었다.
그러나 서리스는 그 공격을 모조리 여유롭게 받아치고 있었다.
“금강잔월이 뭉치는 부분이 있어, 여기랑 여기.”
직접 타격하여 그 위치를 손수 알려준 서리스는 그대로 서발광의 자세를 무너트렸다.
“별을 육체에 집중시키는 건 좋지만, 운용하는 것도 잊지 마.”
“응!”
오랜만에 서리스와의 대련이라서일까, 서발광은 기쁜 듯이 외쳤다.
“직계님, 다음은 나!”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던 서리스는 바로 달려드는 도로시와 뒤늦게 나타난 크라페까지 더해 다시 대련의 굴레에 빠져야만 했다.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자신들이 살던 거처에 누군가가 방문한 것이.
“오랜만이네요.”
그는 다름 아닌 천구 아리즈 아리온이었다.
망아꾼의 침입 당시 잠깐 모습을 보인 뒤로 쭉 안 보이던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흑마녀와의 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서리스는 때마침 등장한 그를 보곤 미심쩍은 눈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아리온은 남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보기 때문이었다.
“또 별들이 속삭였습니까?”
“아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오늘은 다른 일 때문에 온 거예요.”
웬일로 수상쩍은 목적이 아닌 모양이다.
서리스가 말해보라는 듯 지그시 바라보자 그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을 하자마자 서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리온의 아버지라 하면 다름 아닌 성위였기 때문이다.
아리온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는 노망난 영감탱이.
그게 바로 성위였다.
하필 이 타이밍에 자신을 부르다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A반이 대해의 주인 중 하나인 도올을 최단 시간에 쓰러트린 건으로 상을 주신다네요. 아, 서리스 님이 대표로 받는 거예요.”
아, 그쪽 이야기였나.
서리스는 경계심이 조금 주는 기분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오랍니까?”
“바로 가셔도 될 겁니다. 1학년 A반 말고는 휴일도 아니긴 하니까요. 서리스 님도 이런 건 빨리 해치우고 싶으시죠?”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쉬고 있던 세 사람에게 말했다.
“갔다 올게.”
“올 때. 맛있는 거 사와!”
도로시 녀석은 자신을 일 나가는 아빠 취급이라도 하는 건가.
어이없는 눈초리로 도로시를 보던 서리스는 곧장 워너힐 아카데미로 향하기 시작했다.
“성위인가…….”
어느새 아카데미 본관까지 도착한 서리스는 턱을 매만졌다.
원래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이유 등을 그에게 묻기 위해서 워너힐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서리스다.
‘그래도 기회가 왔으니 물어볼 수 있는 건 물어보기로 할까.’
흑마녀의 정보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서리스는 어느샌가 교장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성위를 직접 마주하려니 살짝 긴장됐지만, 서리스는 그 감정을 억누르곤 교장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게나. 서리스 학생.”
문 앞에 눈이라도 달아 둔 걸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언급하는 성위의 목소리에 서리스가 교장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등 받침대가 기다랗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누워 있다시피 한 한 노인이 있었다.
아리온이 나이가 든다면 딱 저런 느낌일 거 같았다.
색이 다 바래 백발의 노인은 서리스를 보고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꽤 찾아다닌 모양이었던데. 좀 더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도 괜찮지 않겠나? 아니면.”
그의 이마 위에 새겨진 별들이 별자리와 같이 이어져 반짝이기 시작했다.
“흑마녀와 이야기한 것을 내가 알까 두려운가?”
도올을 쓰러트린 상은 개뿔이.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혀를 찼다.
성위(星位)
아리즈 아테라
이전 생에서 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