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제왕월영도를 맞고 추락한 도올은 연이은 공격 속에 결국 숨을 거뒀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아이들은 환호를 내지르고, 서리스는 이제 의기소침한 모습이 다 사라진 친구들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서리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도올이었다.
목숨이 끊어진 도올에게서는 한눈에 보기에도 대량의 검은 별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챙겨 두는 게 맞겠지.’
어차피 인제 와서 뒤로 뺄 것도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 된 거 다 잡아먹고 커 주겠다며 서리스는 도올의 시체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놈에게서 흘러나오던 검은 별이 맹렬하게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량으로 들어온 힘 탓에 한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였지만 간신히 견딜 수 있었다.
‘이건.’
흡수가 다 끝나자 목 뒤에서 검은 별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잡아먹은 걸까.
지금까지 이 정도로 검은 별의 힘을 흡수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 도올이 정말로 위험한 마수이기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했구나.”
그러던 순간 서리스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윈터가 서 있었는데 그녀는 서리스를 꽤 뿌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본녀의 상상 이상으로 강하더구나. 이 정도면 학생 단장 자리를 당장 맡겨도 될 수준이야.”
“과찬이십니다.”
서리스가 정중하게 그 말을 받자 윈터는 즐거운 듯 웃었다.
“과찬이라기에는 보여준 게 너무 많던걸. 다음 악스달 학생 단장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그러자 어느샌가 나타난 자룡서진도 합류하여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아무리 보아도 두 사람이 자신을 악스달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 여성의 눈이 뱀같이 휘어지자 서리스는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철퍽―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있던 찰나 서리스는 갑자기 들려온 무언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다른 마수가 나타났나 싶어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런 서리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개구리 한 마리였다.
번들거리는 새까만 피부와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개구리.
그 녀석이 도올의 시체 옆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수?”
하지만 처음 보는 형태라 조금 긴가민가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마수의 유형은 대부분 꿰고 있던 서리스의 눈살이 찌푸려지던 순간이었다.
“변절자.”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서리스는 반사적으로 악스판시온을 쥐었다.
영혼에 각인될 정도로 공포심을 자극하는 울림.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흑마녀의 것이었다.
‘그럼 저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 개구리는 흑마녀가 보낸 전령일까?
모르겠다.
그냥 개구리로 보일 뿐이었고, 느껴지는 검은 별의 힘도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흑마녀였다.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세계 침식자인 것이다.
“이야기 좀 해줘.”
그런 순간 흑마녀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뜻밖에도 대화 요청이었다.
과거 자신을 노리고 온 적 있는 그녀가 왜?
무슨 목적일까? 혹시 빈틈을 노리려는 건가?
평소와 다르게 똑바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흑마녀는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가진 검은 별,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
그때 만났을 때는 이상한 말만 내뱉으며 걷던 여자였지만, 왜인지 오늘은 흑마녀가 또렷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 사실도 미심쩍긴 했으나 서리스도 검은 별과 관련된 정보는 많이 부족해서, 흥미가 생겼다.
세계 침식자인 흑마녀라면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서리스, 돌아갈 준비한대.”
그러는 사이 서발광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와.”
서리스가 허리에 차고 다니던 작은 가방을 가리키자 개구리는 펄쩍 뛰어 그 안으로 비적비적 들어갔다.
찝찝하긴 했지만, 서리스는 일단 모두가 기다리는 캠프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 뒤로는 도올의 시체를 어찌할지 논했다.
흑마녀의 힘이 깃든 만큼 주변 마수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기에 확실히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발렌타인과 윈터 그리고 마법사들이 나서 주었다.
워낙 큰 크기인 만큼 시체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긴 했으나.
결국, 처리를 다 마친 뒤 대해를 빠져나가고자 걸음을 옮겼다.
대해에 들어온 지도 4일 차.
실질적으로는 삼 일로 넘어가던 날에 파견 임무를 끝마쳤던 만큼 놀라운 수준의 기록이 생겨났다.
물론 흑마녀의 영향을 받은 도올이라는 변수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A반 전원이 힘을 모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대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서리스는 불침번에게 양해를 구하고 캠프에서 좀 떨어진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고, 서리스는 그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뭐지?”
여전히 경계 섞인 눈으로 서리스가 질문하자 개구리는 잠깐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내 그 입을 열었다.
“용신에 관해 어디까지 알아?”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게 살면서 처음 듣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뭔데?”
“모르는구나. 역시, 변절자야.”
‘뭔가, 모르는 취급을 받으니 상당히 기분 나쁘다만.’
흑마녀에게 좋은 기억이 없는 서리스는 언짢은 기색을 담아 개구리를 내려다보았다.
“뭔지 설명이나 해.”
“너에게 검은 별을 심어 준 자야.”
하지만 그 말이 들려온 순간 서리스의 몸이 굳었다.
설마 흑마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말해봐.”
서리스의 질문에 흑마녀는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말하는 세계 침식은 이곳과는 다른, 이미 멸망한 세계의 찌꺼기야. 멸망한 세계의 마지막 발버둥이 남긴 흔적? 상처?”
“그래서 그게 용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 세계들을 멸망시킨 게 바로 용신이니까.”
흑마녀의 말을 들은 서리스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방금 들은 이야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듯했다.
서리스의 기억 속, 노란색 안광을 터트리던 자.
그자가 바로 흑마녀가 말하는 용신이었기 때문이다.
서리스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의문점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 세계를 멸망시키고 다닌다는 용신에게 힘을 받은 셈인가?”
“맞아.”
“뭐 하러?”
무려 세계를 멸망시킬 힘을 지닌 용신이다.
그런 놈이 왜 서리스한테 검은 별을 심었을까.
심복을 만들려면 더 강한 녀석들로 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용신이 노리는 건 세계의 핵. 그 핵은 오직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만이 접근할 수 있어. 그래서 세계 침식이란 씨앗을 뿌리고 그걸 회수할 자를 키워.”
“그 말인즉슨 내가 용신이 핵에 다가가기 위해 키운 열쇠다?”
“응, 용신은 너와 같은 이들을 많이 키워.”
너와 같다니.
그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는 용신으로부터 힘을 받은 게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신이라는 녀석은 대체 몇 명이나 자신과 같은 이들을 만든 걸까.
“열쇠들은 전부 용신의 충직한 심복이야. 검은 별에 심어진 본능과도 같은 명령을 거부하지 못해.”
“그래서 내가 변절자라는 건가.”
“정답.”
원래 이 몸에 살고 있던 이전 서리스는 어찌 된 영문인지 사라졌다.
지금, 이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은 과거로 돌아온 소드란 올드렌.
용신이 서리스에게 심었을 본능과도 같은 명령 체계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당장 용신이라는 새로운 정보는 믿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서리스 또한 흑마녀가 말하는 용신이라는 존재를 기억 속에서 확실히 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의문점이 여럿 생겨났다.
“세계 침식자는 전부 그 용신이 만들어낸 존재들이란 건가?”
“달라. 우리는 멸망한 세계에서 용신이 다음 세계로 넘어갈 때 그의 몸에 붙어 따라온 이들. 세계 침식도 용신이 멸망시킨 세계의 찌꺼기.”
“그 찌꺼기가 세상을 이 꼴로 만들고 있는 거냐.”
서리스는 고개를 들어 대해를 바라보았다.
당장 마굴만 해도 처리하기가 여간 쉽지 않아 정기적으로 파견이 나오는 마당이다.
거기에 최흉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인류 역사상 최흉을 완전히 소멸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최흉은 오랜 기간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최흉도, 세계 침식자도 용신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자신이 멸망시킨 세계의 잔재에 지나지 않았다.
“용신은 열쇠의 검은 별을 키워 핵을 가져오게 시키고 있어.”
“그럼 나도 지금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럼 검은 별을 키우는 걸 멈추란 거냐?”
개구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이 기이하긴 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히려 너만이 용신을 막을 수 있어.”
“내가?”
“용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열쇠밖에 없으니까.”
서리스는 아주 잠시 침묵했다.
세계를 멸망시키고 다닌다는 용신이라는 존재는 서리스가 보기에도 그냥 둘 수는 없어 보였다.
당장 자신이 사는 세계가 멸망할 수 있다는데, 그걸 멀뚱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서리스가 지금까지 많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7성에 지나지 않는다.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 하물며 삼무제들 조차 최흉의 주인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자신이 최흉과 세계 침식자의 원인인 용신을 막을 수 있다고?
솔직히 머릿속에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초조해할 필요 없어.”
서리스가 끙끙 앓고 있자 그걸 지켜본 흑마녀가 조언하듯 말했다.
“용신은 이 세계에 세계 침식이 존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열쇠를 만들었어. 그런데도 아직 세계는 멀쩡해.”
“지금까지 만든 열쇠들이 죄다 실패하고, 죽었다는 소리군.”
“응, 쉽지 않으니까. 용신에게 있어서 시간은 무한한 것이야.”
그런 말을 들으니 살짝 초조함이 사라지긴 했다.
무한한 존재에게 인간의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세계 침식자는 전부 그 용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거냐?”
“달라. 다들 제멋대로, 제각기 다른 목표. 살고 싶은 대로 살 뿐이야.”
세계 침식자 중에 정상은 없다는 소리였다.
아니, 어쩌면 자포자기한 걸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세계는 멸망했고, 용신이라는 존재는 열쇠들만이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복수도, 미래도, 고향도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침식자들을 동정할 생각은 없으나 그 마음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나도.’
태악룡에게 죽고 과거로 돌아온 그 순간부터 서리스에게 예전 기억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소드란은 더 이상 존재치 않으니까.
“알았다. 용신도 이해했고, 내가 그 용신이 만든 일반적인 열쇠들과는 다르단 것도 이해했어.”
용신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인 것도 이해하긴 했지만.
“내가 그 변절자라는 건 어떻게 안 거냐.”
서리스는 또 다른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흑마녀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녀는 마치 변절자의 존재를 지금까지 기다린 것처럼 말했다.
지금 자신에게 한 설명도 변절자가 나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부 털어놓지 않았던가.
마치 변절자는 반드시 나타날 거라 믿었다는 듯이.
“용제.”
그러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한 별호가 흘러나왔다.
“제롬이 너를 불렀을 거야.”
삼무제 중 하나이자 그중 유일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
용제(龍帝)
제롬
서리스가 조금도 예상치 못한 그 이름이 흑마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