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갑작스럽게 등장한 서리스 덕에 한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분노한 도올이었다.
“쿠이이이이익!”
본래는 회색의 털을 가지고 있어야 할 놈이었지만.
흑마녀의 세계 침식 폭주 영향으로 새까만 털을 지니게 된 도올은 그 성격도 훨씬 폭력적으로 변해 있었다.
대해에서 놈이 죽인 주인만 벌써 여섯.
그런 도올 때문에 다른 주인들이 몸을 사리며 전부 어딘가로 숨어 버렸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도올과는 맞설 수 없다는 걸, 다른 주인들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올이 괴성을 내지르며 땅속에 박혔던 고개를 들자 서리스는 공중제비와 함께 바닥에 착지했다.
“서리스!”
“직계님!”
그런 서리스를 보고 서발광과 도로시가 제일 먼저 반응하자 뒤따라 다른 이들도 정신을 차렸다.
자신들 여섯 명이 힘을 합쳐도 막지 못했던 도올을 그 혼자서 저지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긴 했지만 당장은 눈앞의 도올이 먼저였기 때문이었다.
촤자자작!
그러는 순간 도올의 등가죽이 잘려나가며 핏물이 튀어 올랐다.
처음으로 상처를 입은 도올이 비명과 함께 몸을 뒤틀었고, 그런 놈 위에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질주하고 있는 한 중년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독후 불터렉스 윈터였다.
월하십인이라는 명성답게 흑마녀로 인해 강해진 도올의 가죽 조차도 그녀의 공격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불터렉스의 비기 사마독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찢어진 살가죽 사이로 파고든 윈터의 특제 독은 순식간에 피를 응고시키고 근육과 뼈를 녹여 버렸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도올이 뒤늦게 팔을 휘두르며 그녀를 후려치려 했지만, 윈터는 그것을 유유히 피하며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녀가 이탈하는 순간에 맞춰 빛줄기와 화염구 수백 개가 연이어 도올에게 쏟아졌다.
스타리즈와 크라페도 가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쏟아지는 화염구와 빛줄기 아래에서 서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선망, 부러움, 당황, 기쁨, 반가움, 안도.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여러 복잡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조금 전 도올에게 전멸할뻔한 위기를 겪어서일까, 한눈에 보아도 사기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상대는 대해에서도 가장 강한 주인이자 흑마녀의 영향으로 폭주 중인 괴물이다.
‘도올은 나 혼자서도 어쩔 수 없는 놈이다.’
윈터조차 도올을 잡는데 얼마나 시간을 들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 모두에 힘이 필요했다.
“A반!”
사기를 끌어 올리듯 서리스가 기합을 터트렸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몰려들었음을 깨달은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어깨 위로 올리며 다시금 외쳤다.
“우리의 저력을 보여줄 시간이다!”
상대는 세계 침식자가 아니다. 대해의 주인이 그저 흑마녀의 잔향에 영향을 받아 폭주한 것뿐이다.
분명 A반 개개인이 상대할 수 있는 놈은 아니겠으나 지금 이들은 개인이 아닌 하나의 집단이다.
대가문이 왜 소가문과 힘을 합쳐 최흉을 막고 있겠는가.
그 이야기는 항상 간단한 결론에 도달한다.
아무리 강한 이라도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흉이라는 세계 침식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지금 대해의 주인 또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사실을 일갈로 깨워준 서리스를 보고 혼란에 빠졌던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또래 중 세상 누구보다 세계 침식을 많이 겪었고 장차 최흉과도 맞서야 하는 영웅의 새싹들.
저 일갈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는 여기에 없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하나다.
이바드라가 불꽃을 몸에 다시 두르고, 호라이즌이 번개의 창을 세웠다.
아이랑이 어둠을 당기고, 발렌타인이 독기를 끌어올렸다.
서발광의 검, 도로시의 마왕화 등, A반 인원들 모두가 각자의 비기를 발동했다.
그들 모두가 워너힐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힘을 합치는 순간이었다.
“간다.”
선두에 선 서리스가 바닥을 박찬 순간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늘 뒤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올드렌은 이제 없었다.
그는 이제 항상 선두에서 모두를 이끌고 달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뒤늦게 나타난 자룡서진과 벨리키는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보았다.
“……A반이 저렇게 뭉쳐 협력한 적이 지금까지 있었던가요?”
도올과 A반의 전투가 본격화되었고, 그 사이로 수십 년간 다져진 서리스의 지휘 능력이 빛을 발했다.
그 때문일까,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는 A반의 모습은 벨리키가 보기에 무엇이든 쓰러트릴 수 있는 최강의 부대처럼 보였다.
“없었지.”
그리고 자룡서진 또한 수정으로 된 검을 쥐고 달리는 속도를 높이며 대답했다.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A반이라는 의미는 동년배 중 같은 가장 뛰어난 이들이라는 의미였다.
대가문 직계부터 소가문, 가끔 보이는 평민까지.
다양한 이들이 뒤섞인 A반 일원들은 모두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진심으로 협력한다?
아쉽지만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락스카 또한 실력이 너무 차이 나 A반이 강제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뿐.
반의 일원이 자발적으로 힘을 합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락스카마저 해내지 못한 것을.
서리스는 지금 A반의 중심으로서 모두를 데리고 도올과 맞서고 있었다.
“새역사가 쓰이고 있는 거다.”
시대에 맞춰 나타나는 새로운 바람.
그 바람이 어느새 손에 잡힐 정도로 다가왔다고 자룡서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단장분들이 어째서 서리스에게 그토록 관심을 쏟았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는 새 시대를 열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합류한다. 이대로면 늦겠어.”
후배들에게 모든 걸 떠넘길 수는 없다며 자룡서진이 뛰쳐나가고, 뒤에 남은 벨리키는 서리스를 보며 스타린을 떠올렸다.
새 시대를 써 내려간 삼무제 중 한 명인 올스타드 스타린.
그분께서는 이런 걸 꿰뚫어 보셨던 걸까.
‘난 아직 한참 멀었나 보네.’
그분을 동경해서 왔건만 그분의 눈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느끼며 그렇게 벨리키 또한 자룡서진의 뒤를 따랐다.
* * *
최상위 주인이자 흑마녀의 영향으로 진정한 포식자로 거듭난 도올.
대해에서 이제 자신을 건드릴 수 있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기에 도올은 그야말로 대해의 주인이라 불릴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도올은 지금 자신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는 개미들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한 놈씩이었다면 자신한테 상대도 안 될 테지만.
이 개미 녀석들은 다 같이 협심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자신을 몰아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쿠이이익!”
개미 중에는 주인들을 연상케 하는 녀석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자기 가죽을 뚫고 근육에 직접 독을 박아 넣는 윈터의 공격은 말할 것도 없었고.
벨리키와 자룡서진 그리고 스타리즈, 이 세 사람의 공격은 도올이라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도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아닌 다른 이였다.
“시끄럽게 울기는.”
콰앙!
무릎 뒤를 올려친 대검을 타고 온 충격이 도올의 몸 전체에 퍼졌다.
그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연격을 퍼부어 오자 화가 난 도올이 몸을 부풀리며 돌진했지만.
남성은 유유히 빠져나가거나 오히려 자신의 돌진을 정면으로 막아섰다.
도올에게 있어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이는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자기보다 덩치도 훨씬 작은 것이 힘은 왜 이리 강한 건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그의 존재감이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별의 기운.
마치 다른 주인들을 연상케 하는 그 기운은 도올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
쿠웅!
또 한 번 사방에서 이어진 공격이 도올의 몸을 두드렸다.
타고난 재생력으로 버티던 도올이지만 이대로라면 위험해진다.
특히 윈터의 독은 도올을 계속 갉아 먹고 있었기에 더 이상 공격을 허용해서는 안 되었다.
“쿠익!”
그 사실을 알아차린 도올이 거칠게 몸을 사방으로 털어내었다.
육중한 몸은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무기였고, 이에 다른 이들도 우선 몸을 피해야 했다.
그렇게 생긴 짧은 공백.
도올은 그 즉시 자신의 양다리를 가슴께로 끌어 모았다.
“모두 피하거라!”
윈터의 목소리가 숲에 퍼졌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도올이 목을 최대치로 당긴 뒤, 그 거대한 몸을 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원래도 돌진 하나만으로 주변을 초토화하던 도올이다.
그런 녀석이 몸을 굴리기 시작하자 주변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붉은색 숲들은 마치 압축되듯 짓눌리고.
여기저기서 도올의 구르기를 피하고자 비명이 난무했다.
그 틈을 타 도올은 구르던 몸을 틀어 전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주인이라 한들 그 본성은 마수.
그들은 인간과 달리 살아남고, 포식을 하는 것에 열중할 뿐.
위험한 적과 끝까지 싸워줄 이유가 없었다.
“놈이 도망쳐요!”
먼지구름 사이로 도올의 도주 사실을 알아차린 벨리키가 소리쳤다.
그 소리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윈터였다.
사마독주를 전신에 두르며 양다리의 힘을 준 그녀가 폭발적으로 도올에게 쏘아졌다.
동시에 그녀의 품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어디서 꺼내었는지 모를 사람만 한 크기의 말뚝 열 개였다.
쾅쾅쾅쾅!
그 순간 날아든 말뚝이 구르던 도올의 앞을 막듯 박혔다.
하지만 고작해야 사람 크기인 말뚝이다.
사람보다 큰 마수조차 그냥 짓밟고 가는 도올에게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벨리키, 스타리즈.”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윈터의 말뚝은 도올을 세우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윈터가 두 사람을 호명한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벼락이 땅으로 내려꽂혔다.
벼락이 떨어진 곳은 도올이 아닌 말뚝이었고, 곧이어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근방 땅이 모조리 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도올의 크기만큼이나 넓고 깊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도올은 구르는 자세 그대로 몸을 튕겨 하늘로 날아 올랐다.
땅이 무너지든 말든 뛰어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도올의 몸이 하늘로 치솟은 그 순간이었다.
자수정 조각이 흩날렸다.
마치 뱀처럼 도올의 몸을 타고 오르며 휘감긴 자수정 조각 사이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도올의 눈동자에도 그 인영이 선명하게 비췄다.
하늘조차도 가를 거대한 대검의 현상을 머리 위에 만들고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이를 말이다.
“쿠이이익!”
분노에 찬 음성과 함께 도올의 두 팔이 서리스를 우그러트리고자 휘둘러졌다.
저놈, 저 한 놈 때문에.
최강의 포식자인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게 된다니.
그때 도올은 이미 어렴풋이 깨달았던 걸지도 모른다.
저 검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도올은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그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져라.”
마치 하늘을 지배하는 용이 고하듯.
서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와 함께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내려그었다.
제왕월영도(帝王月影刀)
그리고 하늘이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