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번쩍.
정신을 차린 빅토르가 두 눈을 한차례 깜빡이었다.
그 상태로 천장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졌나.”
그야말로 완벽한 패배.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이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거의 10년 치에 달하는 자연의 힘을 쏟아부었는데 패배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런 아쉬움도 없었다.
‘아니지.’
아쉽지 않을 리가 있나.
이기고 싶었다.
이기는 것만이 나를 증명하는 방법이니까.
자연의 힘을 육체에 못 담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무시와 조롱을 받던 지난날들.
그러나 그는 자연의 힘을 몸에 못 담는 대신 문신에 담긴 힘을 응축해 터트리는 고유의 기술을 만들어 부족 또래들을 전부 꺾었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와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여기까지 아득바득 올라왔다.
그런데 웬걸.
1학년 놈에게 저버렸다.
그는 그 어느 때 보다 서리스에게 이기고 싶었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도 훨씬 강한 놈이었으니까.
“아악, 젠장!”
이래서 지는 건 싫다.
이기면 승리의 후련함과 쾌감으로 아무런 생각도 안 드는데, 지고 나면 잡생각이 너무 많아진다.
왼쪽 말고 오른쪽으로 흘려보낼걸.
여기서 한발 물러났었다면.
좀 더 별을 잘 사용했으면.
그런 아쉬움으로 머릿속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짜식, 더럽게 쌔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에 들어온 1학년 놈은 괴랄할 정도로 강한 놈이었다는 것이다.
“선배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 순간 병실 입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서리스가 서 있었다.
그는 병문안 왔다는 듯 손을 흔들곤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
“왜 엿듣냐.”
“바깥까지 다 들립니다. 그래서 몸은 좀 어떻습니까?”
“네놈 때문에 엉망이야.”
그가 투정 부리듯 이불을 뒤집어쓰며 소리치자 서리스는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래서…… 대회 결과는?”
“예상하시는 대로.”
“와 씨, 저거, 완전 재수 없네!”
당연히 자신이 1등 했다는 듯 씩하니 웃는 서리스를 보고 성을 내던 빅토르는 이내 느껴진 통증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망할 놈의 몸뚱어리는 마음대로 화를 내는 것조차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빅토르 선배랑 한 대련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빅토르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게 했다.
저 대단한 놈이 자신과의 대련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하니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아니, 미친, 뿌듯하기는 개뿔이!’
한 번 졌다고 마음마저 꺾이려 하는 건가.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젓곤 곧 투지를 불태웠다.
“다음에는 내가 이긴다.”
“아무렴요. 언제든 오세요. 환영입니다.”
그를 통해 얻은 성취는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가 원한다면야 도전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그러는 순간 서리스는 문 쪽을 힐끔 보곤 이제 자신의 차례가 끝났음을 눈치챘다.
“얼른 퇴원하시길. 그 정도로 엄살 부리면 미친개라는 별명이 울 겁니다.”
“저게, 선배 대하기를 우습게 아나!”
“아니꼬우면, 이기십쇼.”
그 말을 하고 서리스가 병실을 나오자 그 앞을 서성이던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모였다.
그들은 전부 테르넬 마크를 단, 빅토르와 같은 학생 단원들이었다.
“전 볼 일 다 봤으니, 들어가셔도 됩니다.”
단원들은 서리스의 말을 듣곤 헛기침을 하더니 하나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안쪽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보니 역시 빅토르가 테르넬 학생 단원의 구심점이라고 서리스는 생각했다.
‘순전히 내 짐작이긴 하지만.’
왠지 내년에는 빅토르가 테르넬 학생 단장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얼핏 들었다.
물론 그 생각은 그리 오래 남아있지 않고, 흩어져 사라졌지만 말이다.
‘지금은…….’
서리스는 자기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빅토르와의 대련에서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또 한 번 계단을 올랐다.
7성.
인간을 넘어서기 시작하는 그 영역에 드디어 발을 들인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
수련하다가도, 생사결을 하다가도 하다못해 잠을 자는 순간에도.
갑자기 찾아오는 깨달음은 막아선 벽을 깨부수며 무인을 강인하게 만든다.
서리스는 그러한 깨달음을 빅토르와의 대련에서 얻은 것이었다.
‘설마 이런 거였을 줄이야.’
6성을 오른 지도 시간이 꽤 흘러서 그런지, 상당히 빠른 성장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늘 가슴 한편에 초조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주변은 언제나 급박하게 흐르며 서리스의 목을 조여왔다.
특히, 세계 침식자 흑마녀와 무장공주의 등장은 다시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목숨이 여러 개라도 위험한 상황.
한 개인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서리스는 더 강해져야 했다.
그걸 위한 첫 발판.
그것이 바로 7성이라는 경지였다.
‘세계 침식자와 맞서려면 이것 가지고는 안된다.’
게다가 세계 침식자를 만들어내는 놈이 상대라면 더더욱.
7성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만족감 대신 느껴지는 향상심이 서리스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강해지고 싶다.
그 생각이 무척이나 강렬했다.
“서리스.”
그러던 순간 오늘 대회 교관이었던 히즈마가 그를 불러 세웠다.
“예, 교관님.”
서리스가 그를 돌아보자 히즈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 오늘 대회 결과 보고가 들어갔다. 곧장 단장실을 찾아가면 상과 관련된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거다.”
올 것이 왔나.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첫째 형님인 락스카를 만날 시간이었다.
* * *
펜타니엄 가문의 장남이자 검의 천재라 불리며 테르넬 최연소 단장 자리에 오른 검치 펜타니엄 락스카.
그런 그를 만나고자 서리스는 테르넬 단장실로 이어진 복도를 걷고 있었다.
서리스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태악룡에게 죽었던 그 날.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자신을 찾아왔던 펜타니엄 직계는 과연 누구였을까?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칠흑 같던 그림자 검과 펜타니엄을 상징하는 문양뿐.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서리스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큰 주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태악룡을 막으러 온 이는 아마 락스카가 아닐까 하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외형이 남자였기에 샬롯은 당연히 제외다.
그리고 지금.
서리스는 그때와 비교한다면 한참은 어린 락스카를 만나고자 단장실 앞에 도착했다.
서리스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 만났던 락스카는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런 성격이었다.
남을 깔보지도 깎아내리지도 않고, 하물며 도발조차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서리스를 포함해 어느 사람도 자신의 적수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만과는 또 다른……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성격 때문일까.
락스카는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을 절망에 빠트렸다.
아무리 노력하고 강해져도 락스카는 상대를 자신과 같은 선상에 선 이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늘 혼자서 하늘 높은 곳을 걷는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렇기에 그런 그를 보고 알리즈와 엑스널은 그토록 스스로를 망가트렸던 것일 거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는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으니 자괴감으로 미칠 지경이었겠지.
그래서일까, 서리스는 락스카가 썩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리스가 아는 그라면 분명히.
덜커덕.
“서리스로군.”
자신 또한 그렇게 볼 게 분명했으니까.
서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뭔지 모를 서류를 훑어보던 그가 무표정하게 서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흥도 없는 듯한 모습.
인간미가 안 느껴지는 그 모습은 그의 아버지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랬다.
펜타니엄 락스카는 형제 중 가주인 락로드와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모든 이를 사무적으로 대하는 이.
그는 무리 따위는 이루지 않는 한 마리의 맹수였다.
그의 눈에 비친 다른 이들은 그저 풀을 뜯어 먹고, 뛰어다니는 토끼에 지나지 않겠지.
“무슨 볼일이지?”
“대회가 끝나서 말이죠.”
“아, 그렇군.”
그는 별 감흥 없이 대답하곤 책상 위에 있던 종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보아하니 그게 대회 내용이 기록된 보고서인 모양이었다.
대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듯 보고서를 눈으로 쭈욱 따라 읽은 락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했군.”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가.”
락스카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자기 동생이 이렇게나 치고 올라오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조바심도 보이지 않았다.
“보상은…… 나와의 지도 대련이군. 내일 2시에 시간이 빈다. 그때 찾아오면 검술을 봐주도록 하지.”
락스카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펜타니엄은 무한 경쟁 구도가 기본이었다.
당연히 락스카와 서리스 또한 가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이다.
그런 경쟁 속에서 다른 형제들이 얼마나 무너졌던가.
소드란 올드렌이 이 몸에 들어오기 전의 서리스도 결국 경쟁에서 무너져 세계 침식자가 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락스카는 그런 경쟁의 장에서 공공의 적이라 봐도 무방한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서리스의 검을 봐주겠다고 말해왔다.
“괜찮겠습니까?”
확인 삼아 서리스가 재차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서리스를 잠시 보더니 곧 고개를 기울였다.
“대회 보상에 불만족하나?”
“아뇨. 동생의 검을 다듬어 줘도 괜찮겠냐는 물음입니다.”
그 물음을 들은 락스카는 한차례 눈을 깜빡이었다.
이내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듯하더니 곧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그것에 뭐가 문제가 있지? 내가 모르는 있는 뭔가가 있나?”
순수한 질문.
악의도 선의도 담겨 있지 않은 그의 질문에 서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 순수함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짓밟았을까.
“아뇨. 없습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미소 지었다.
“단장님께 지도 대련을 요청합니다.”
한 방 먹여주고 싶을 정도로 열받는 진짜배기 천재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