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콰앙!
폭발음과 함께 대련장 위를 뒤덮었던 박쥐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자욱하게 퍼진 연기.
새하얀 빛을 내뿜는 목걸이를 맨 크라페가 화상을 입은 듯한 아이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하네요.”
목걸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보며 아이랑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라페는 목걸이를 쥔 채 아이랑을 향해 손을 겨누었다.
그라말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
명장 토르게아가 만들어낸 빛을 담는 목걸이 로엘사론.
아우레우스 파르마와 너무도 잘 맞는 보물이었다.
“언제부터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어제 받았어.”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랑은 혀를 찼다.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너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소녀는 막내라 저런 보물들이랑은 연이 전혀 없는데 말이죠.’
발렌타인이 지닌 귀왕령도 그렇고.
크라페가 지닌 로엘사론도 그렇고.
참, 여러모로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서러워한다고 해서 승리가 저절로 손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어제라면 충전이 얼마 안 되어 있겠네요?”
아이랑은 일부러 질문을 던져 크라페의 주의를 끄는 동시에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저 목걸이 안에 빛이 얼마나 충전되어 있든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 위로 붉은 기운이 맺히자마자 팔을 전력으로 내리그었다.
노스페라투
블라디 메티
손끝에서부터 이어진 붉은 기운이 잔상을 남기며 크라페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격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운에 크라페의 로엘사론이 다시금 빛을 토해내었다.
그러자 로엘사론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이 붉은 기운을 지우며 퍼져 나갔다.
하지만 아이랑이 노린 건, 기운을 방출하고 나서 잠깐 약해지는 그 찰나의 틈이었다.
그녀는 마치 연속 동작처럼 팔을 휘두른 힘을 이용해 앞으로 구르듯 그의 품 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왜인지 모르게 주위가 너무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있어 어둠은 분명 친숙한 것이었지만,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그녀의 본능을 자극했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거대한 황금 방패가 뚫려 있던 대련장 천장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했잖아.”
크라페는 언제나처럼 나른한 얼굴로 그녀에게 고했다.
“내가 이길 거라고.”
그 한마디 말과 함께 황금의 방패가 땅으로 떨어졌다.
쿠웅!
대련장 절반 이상을 덮어 버릴 만큼 커다란 방패의 낙하로 자욱한 연기가 또 한 번 일어났다.
흙먼지 속.
크라페의 눈이 방패 아래로 향했다.
거기에는 아이랑이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양팔로 방패를 받친 채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그녀가 말이다.
겉보기에 너무도 말라 보이는 그녀가 어떻게 이 공격을 버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새빨갛게 변한 그녀의 눈과 함께 흘러나오는 강렬한 별의 힘은 지금 그녀가 얼마나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뚜욱, 뚝.
급하게 힘을 끌어 올린 탓인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솜, 브라 모, 멘토가 안, 되네, 요?”
이유는 몰라도 방패 아래 생겨난 그림자를 통해서는 그림자 이동을 할 수 없는 듯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무게를 오직 힘만으로 견디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라페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말없이 로엘사론을 쥔 손에 힘을 더 줄 뿐.
쿠웅!
그러자 그녀를 찍어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까득―
아이랑은 입을 앙다물며 간신히 이를 버텨냈다.
그그그극!
땅에 닿은 무릎이 대련장 바닥을 파고들며 그녀 주위로 잔금이 퍼져 나갔다.
그녀의 무릎에서 흘러나온 피가 조금씩 고일 정도였지만, 아이랑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묵묵히 방패를 받치고 있었다.
크라페의 코끝에도 땀이 맺혔지만, 이내 흘러나온 코피와 섞이며 붉게 물들었다.
이 대련은 이미 순수 힘겨루기 단계로 접어들었다.
아이랑 만큼이나 크라페조차도 그녀를 짓누르는데 엄청난 별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이만한 크기의 방패를 별로 만들어낸 것이니 당연했다.
당연히 그도 상당히 무리하고는 중인 것이다.
‘못 쫓아가.’
그가 이런 판단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아이랑의 육체 능력이 생각 이상으로 너무 뛰어난 탓이었다.
그녀가 눈치챈 것처럼 현재 로엘사론에는 충전해둔 빛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만약 아이랑이 저 육체 능력을 살려 급습을 반복하면 로엘사론에 충전된 빛도 금방 동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잡아둔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황금의 방패에서 끌어낸 빛의 힘으로 아이랑의 그림자 이동까지 봉인한 크라페는 필사적으로 별을 쏟아부었다.
지금 이게 그녀를 잡을 마지막 기회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길 거야!”
끊어지듯 흘러나온 크라페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랑의 양팔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이기고 싶다고?
그건 자기도 마찬가지다.
남들의 눈에 아이랑은 그저 곱상한 윌즈베르크의 여식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녀는 암성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철저하게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 또한 지는 게 싫으니까.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뒤처지는 걸 견디지 못하는 아이랑이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규격 외의 존재들을 어느 정도 인정한 그녀이지만, 그렇다고 호승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흑마녀를 상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서리스에게 짐처럼 들려서 호송된 날.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수치스럽고 괴로웠던가.
윌즈베르크의 직계에다가 어둠 속에서라면 누구와도 한 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진짜 어둠 앞에서는 그저 엉엉 울고만 있었었다.
그것은 아이랑에게 있어 평생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당, 신만, 그런 줄 알아, 요?”
크라페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야 어쩔 수 없겠지.
세계 침식자 앞에서도 자신들을 구해 필사적으로 빠져나간 서리스를 본다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외천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늘에 가까워지고 싶어 또 한 번 무작정 달려보는 게, 강함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숙명 아니겠는가.
“알아.”
그리고 그 사실을 크라페 또한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모든 전력을 쏟아부은 것이다.
이기고 싶으니까.
그리고 서리스와 같은 선상에 올라가 보고 싶었으니까.
서리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어느새 두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랑과 크라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승리를 갈망하듯 타오르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둘은 이번 공격으로 이 대결이 끝날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혈귀.”
태양 아래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제약 혈귀.
그러나 이러한 단점 속에서도 딱 하나의 장점이 존재했다.
이 방법으로 혈귀를 발동하면 그 후유증으로 며칠을 앓아누울 걸 각오해야 하지만.
낮이든 밤이든 모든 주변 상황을 무시하고 시전자의 육체 한계를 돌파하게 해주었다.
물론, 흑마녀 앞에서는 이런 시도 자체가 부질없었겠지만, 지금 상대는 그런 괴물이 아니다.
‘유지 시간은 고작 5초.’
이제는 그녀의 눈뿐만 아니라 머리색 조차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순간.
터엉!
그녀를 짓누르던 황금의 방패가 아이랑의 박참과 함께 아주 짧게 위로 튕겨 올랐다.
그녀가 순간적으로 내지른 힘이 방패의 무게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는 그 짧은 틈이면 충분했다.
마치 맹수처럼 몸을 웅크러뜨린 아이랑이 튕겨 오르듯 엄청난 속도로 크라페를 향해 도약한 것이었다.
‘3초.’
남은 시간 2초.
그러나 크라페에게 도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새 눈앞에 자리한 크라페를 보자마자 그녀는 길어진 손톱을 그의 목 쪽으로 내질렀다.
터엉―
그 순간, 뭔가를 강하게 후려치는 소리가 정면에서 들려오며 자신이 노렸던 그가 어느새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한 그녀의 두 눈이 절로 커다랗게 떠졌다.
크라페가 위기의 순간, 방패를 움직여 자기 머리를 옆에서 후려친 것이었다.
크라페의 두 눈이 샛노랗게 빛났다.
“보였어.”
5초라는 짧은 시간밖에 없었기에 선택한 단순 돌진.
단순하기에 더더욱 피할 수 없을 정도였던 그녀의 속도.
그렇기에 크라페가 파악하고자 한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그녀의 공격 지점.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자기 목에만 와 닿아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랑의 도약과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황금빛 방패가 그의 머리를 후려치며 밀친 것이었다.
방패에 맞은 이마가 찢어지며 핏물이 흩날렸다.
허공을 손톱으로 꿰뚫은 아이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세를 다시 잡으려 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1초밖에 남지 않은 혈귀의 시간으로는 더 이상 대련을 지속하는 것도 무리였다.
“아.”
그녀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을 때.
크라페는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로엘사론의 빛을 아이랑의 코앞에서 터트렸다.
화악!
밝은 빛이 대련장을 뒤덮었다.
* * *
“그라말테 세라 크라페 승리.”
빛이 사라지고, 그 결과를 본 교관의 목소리가 대련장에 울려 퍼졌다.
이마에서 피를 뚝뚝 흘리던 크라페는 대련장 구석에 쓰러져 있는 아이랑을 힐긋 바라보곤 시선을 뒤로 옮겼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서리스가 서 있었다.
여전히 아무런 냄새조차 나지 않는 그는 크라페와 시선을 맞추더니 이내 씨익하고 웃어 보였다.
상당히 도발적인 웃음이었지만, 저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크라페는 뭐라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그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며 이내 정신을 잃었다.
그가 쓰러지기 직전 누군가 잡아주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상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쓰러진 그를 받아 준 것은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용썼네.’
크라페와 아이랑이 이번 대결에서 자신들의 모든 걸 다 드러내 보였다는 건, 서리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가 누구인지 또한 눈치챌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조차 불가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을 따라잡고 싶어 모든 걸 쏟아내는 그 모습은 서리스조차도 어딘가 뭉클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왜들 그리 워너힐 아카데미를 오려고 하는지 알겠네.’
이런 녀석들이 즐비하니.
강해지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오고 싶어 하겠지.
대기 중이었던 의사에게 크라페를 넘겨준 서리스는 교관을 돌아보았다.
그는 서리스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곤, 대회를 다시 진행 시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대결을 지켜보며 서리스는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둘의 전력을 보고 나니 고양된 감정이 그의 호승심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의 다음 결투 상대가 누가 될지는 몰라도 그다음 상대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상황이 되리란 것은.
숨길 것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