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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49화 (149/275)

149화

대전쟁으로 세상이 혼란에 잠긴 시기.

‘그때의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

세계 침식자와 인류를 대표하는 최강자들이 맞붙는 전장에서 자신은 그들의 손짓 한 번에 스러질 날벌레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일개 소시민으로서 우리 편이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체를 감추고 있던 세계 침식자들이 전쟁 발발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었고, 그들의 정보를 알고 있는 서리스다.

당장은 아니어도 이대로 계속 강해진다면 이번에는 서리스 또한 최전선에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인류의 편이었을 때의 이야기지.’

서리스는 버릇처럼 목 뒤를 매만졌다.

검은별의 기억을 통해 알게 된 사실…… 자신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침식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에게는 해소할 수 없는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해답은…… 그놈을 찾아내는 것.’

그것 말고는 이 불안감을 해소할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천구 꼬마가 나서서 너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덕에 그 의심은 더 준 셈이지.”

첫인상은 밉상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 고마웠다.

가뜩이나 자신이 세계 침식자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탓에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요주의 인물로 찍혀 여기저기서 경계했다면 더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이제 그 밥값은 완전히 잊어줘도 될듯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게 진짜 이유지.”

스타린은 소파에서 내려와 서리스의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지금 보다 더 자주 세계 침식자들이 네 앞에 나타날 거로 생각한다.”

“그건…….”

“노파심으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건 내가 살아온 시간을 근거로 내린 결론이야. 뭐 일종의 감이지. 꼬마 같은 타입은 세계 침식자가 꼬이기 딱 좋거든. 무장공주만 해도 네 무기를 이미 찍었으니, 또 기회를 노리다가 나타나겠지.”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떠올렸다.

스타린의 말마따나 무장공주는 분명 악스판시온을 노리고 또다시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어. 그리고 그 혼란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이미 황혼에 접어든 나와 같은 인물이 아니라 너희들이지.”

겉보기에는 자신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스타린이지만.

그의 복잡한 감정이 담긴 두 눈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과거를 현재에 보태서 셈해도 그가 살아온 삶의 반도 되지 않았다.

자기 또래들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지는 서리스인데 그에게 자신은 어떻게 보일까.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널 돕기로 한 계획을 좀 앞당기기로 했어. 할 수 있는 건 빨리해두는 게 좋은 거니까.”

순수한 선의.

그 의도를 읽고 서리스는 조그맣게 감탄했다.

새벽 마탑은 예부터 세계 침식을 막기 위해 다방면으로 활약을 해왔다.

그리고 그런 새벽 마탑을 지탱하고 있는 가문 올스타드.

대대로 마탑주 자리를 맡아 온 그들은 가문 간의 알력 싸움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마법을 연구하고, 그걸 통해 세계 침식을 막을 방법을 내놓을 뿐이었다.

그것이 새벽 마탑이 만들어진 이유이자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새벽 마탑이 세워진 이유가 세계 침식을 막고자 하는 순수한 선의이기에 그들은 만인으로부터 경외 받으며 오대가 명단에 올스타드라는 이름을 당당히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그런 새벽 마탑주였던 스타린은 서리스의 미래를 생각해주며 그 선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권력과 높은 자리란 사람의 선의를 타락시키기 딱 좋은 것들이다.

아무리 최흉과 세계 침식자라는 공동의 거대한 적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속물적인 것들은 완전히 배제하고 세상을 위해 움직이는 스타린은 알면 알수록 존경할만한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같은 삼무제인 우리 스승님은…….’

검술을 통해 득도해보겠다고 산속으로 들어와 자신에게 행패 부리던 요치아를 떠올리며 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좀 괜찮으실까?

만약 자기 제자가 스타린에게 도움받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실지도 모르겠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순수한 선의를 외면할 이유는 없다.

서리스가 예우를 갖추듯 고개를 숙이자 스타린은 씩하니 웃어 보였다.

“오냐. 일단 바닥에 앉아봐. 내가 어디까지 조율해 줘야 하는지 살펴볼 테니까.”

스타린의 지시에 서리스는 순순히 바닥에 앉았다.

“저번에 눈으로 확인해 보기는 했는데, 이번엔 좀 더 자세히 볼게. 느낌이 이상해도 조금만 참아.”

그리 말한 뒤 스타린은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아 자신의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서리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서리스는 무언가 내면을 훑는 듯한 느낌에 솜털이 쭈뼛 섰다.

확실히 스타린이 말한 대로 느낌이 상당히 이상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속 안을 파헤치며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그 이상한 느낌을 서리스가 애써 참고 있자 잠시 후 스타린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좀 이상하네?”

“무슨 이상이라도 있습니까?”

스타린의 반응에 서리스가 묻자 그는 잠시동안 턱을 매만지더니 곧 대답해 주었다.

“영혼이 저번이랑 다르게 육체랑 합쳐져 있어. 저번에는 완전히 어긋나 있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예?”

합쳐져 있다고?

“그게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까?”

“아니, 그래서 내가 조율해 주려 했던 거였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가 떠올린 것은 검은별을 엿본 기억이었다.

혹시 그게 이 변화의 원인이지 않을까?

그것 말고는 별다른 게 떠오르지 않는 서리스가 잠시 침묵하고 있자 스타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괜찮아. 오히려 잘된 거지. 영혼 쪽은 남이 건드리는 것보다 스스로 해결하는 게 훨씬 안정적이니까. 덕분에 시간이 훨씬 단축될 거야. 별다른 이상도 없어 보이고.”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혹시나 영혼과 육체를 다시 떼어 내야 한다거나 했다면 간담이 서늘했을 테니 말이다.

“좋아. 생각보다 빨리 끝날 테니 좋네. 일주일이면 끝낼 수 있을 거야.”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리네요?”

“원래였으면 석 달이었어. 그만큼 영혼과 육체가 합쳐지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도 하고.”

그건 정말 다행인 소리였다.

“일단 계속 앉아 있어. 이것저것 준비 좀 할 테니까.”

그리 말하며 스타린은 서리스의 주위에 마법진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하나도 읽을 수 없었던 서리스지만 조금 신기했기에 그걸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스타린은 삼십 분 정도가 흐른 끝에 바닥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그러곤 박수를 짝하니 치자 마법진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가?

내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는 몰라도.

이번 일로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서리스는 생각했다.

혹시나 알까.

영혼과 육체가 합쳐지면서 자신이 눈밖에 확인 못 한 그 흐릿한 인영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지.

“자, 시작됐어. 앞으로 일주일간은 폐관 수련이라고 생각해.”

“예? 잠깐만요, 마제님 그 말은?”

폐관 수련이라는 갑작스러운 말에 서리스가 당황한 눈빛을 보냈다.

폐관 수련이라는 것은 설마…….

“응, 거기서 일주일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스타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법진 위에서 일주일이라니.

이런 상황은 조금도 고려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서리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는 어떡하고요?”

“내가 말해둘게. 개인 수련으로 잠시 빠진다고.”

로렐라이 단장인 그가 말해준다면 그야 당연히 들어주긴 하겠다만.

“그, 저기, 밥은…….”

의식하고 나서야 느껴지는 허기에 서리스가 묻자 스타린은 눈을 깜빡였다.

“일주일은 굶어도 괜찮잖아.”

“저 한창때입니다.”

“벽곡단이라도 먹을래?”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먹습니까.”

누가 옛날 사람 아니랄까 봐, 언제 적 수련 상황을 말하는지 모르겠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떠올리며 서리스가 스타린을 애절하게 쳐다보자 그는 이내 장난이라는 양 손사래 쳤다.

“걱정마. 밥은 다 챙겨 줄게. 자, 이제 대화 금지. 이참에 명상 수련이라도 해.”

하다못해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좋았겠건만.

서리스는 하는 수 없이 운성조식 자세를 취하려 했다.

그러던 중 문뜩 스타린이 말한 석 달이라는 기간이 떠올랐다.

만약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아직 분리된 상태였다면?

‘무장공주에게 감사해야겠군.’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 속에서 서리스는 조용히 일주일이라는 기간에 만족하기로 했다.

* * *

짹짹―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상쾌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걷는 한 여인은 밝은 날씨와 상반된 우중충한 기운을 주변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오늘도 면사포를 쓴 그녀는 다름 아닌 윌즈베르크 아이랑.

벌써 일주일째.

크라페와 둘이서 테르넬의 훈련을 받은 그녀는 힘이 죽죽 빠지는 느낌이었다.

‘피로하네요.’

테르넬의 훈련은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아카데미 생도들이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동년배에서 나름 강자에 속하는 그녀가 유달리 피로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한 남성 때문이었다.

‘소녀와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여태 연락 하나 없으시다니.’

일주일 전 그날.

세계 침식자와 맞서기 위해 움직인 서리스를 떠올리며 아이랑은 살짝 쀼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듣기로는 별 상처 없이 복귀한 뒤, 바로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녀는 그 사살이 못내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걱정 많이 했는데…… 폐관 들어가기 전에 잘 갔다 왔다며 얼굴 정도는 비춰도 괜찮으시잖아요.’

팍팍.

바닥을 강하게 밟으며 나아가던 아이랑은 그러면서도 곧 서리스의 행동 심리 분석에 들어갔다.

‘그래도 곧바로 폐관 수련에 들어가셨단 건 세계 침식자와 싸우던 도중 일말의 깨달음을 얻으신 거겠죠.’

무인에게 있어 깨달음이란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것과도 같다.

전에 없는 기회가 온 것일 테니 그가 바로 폐관 수련으로 들어간 것도 이해가 갔다.

‘이랬다저랬다 저도 참.’

이렇게까지 자신이 휘둘리고 있는 것에 아이랑은 면사포 아래 손을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바보 같아졌다.

‘남은 기간, 수련에나 집중하죠.’

폐관 수련에 들어간 사람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고 말이다.

무엇보다 오늘은 테르넬에서 학생 단원들끼리 하는 대련 대회가 있다고 했다.

신입생들도 참가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녀도 기회 되면 참가할 생각이었다.

무려 단장인 펜타니엄 락스카가 일대일 개인 지도를 해준다니 말이다.

‘펜타니엄에서도 천재라 불리는 그와 안면을 틀 기회이니.’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테르넬 수련장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아이랑 님. 오랜만이네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이랑은 락스카고 뭐고 사르르 잊어버리고 말았다.

일주일만의 보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여기로 오면서 쌓아 두었던 모든 불만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이랑은 살짝씩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억눌렀다.

“네, 서리스 님.”

그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쁠 줄이야.

중증이라고 생각하며 아이랑은 서리스의 곁에 다가와 섰다.

오늘만은 면사포를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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