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망아꾼의 분신체는 분명 일반인이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들의 평균치는 6성 초입에 이르렀고, 개중에서 숫자가 높은 이들은 6성 후반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런 만큼 엑스널과 알리즈가 망아꾼을 상대로 고전하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엑스널은 서리스를 상대로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가 타고난 별과 재능은 분명 뛰어난 게 맞으나 자신이 락스카와의 4년이라는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듯.
서리스 또한 자신을 따라잡기에는 힘들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서리스는 그의 생각을 박살 내놓듯 무척이나 손쉽게 망아꾼의 분신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검은별의 사용 여부로 그의 존재감은 아예 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엑스널이 아는 서리스는 검은별을 쓰지 않고 자제하던 서리스.
그러나 지금 검은별을 숨김없이 개방한 서리스는 그가 알고 있던 그의 수준을 한참 상회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별이란 그런 것이었다.
본인이 지닌 힘을 훨씬 넘어서, 압도적인 힘을 부여하는 그런 존재.
그리고 당연히 그런 서리스와 맞서는 망아꾼의 분신체들은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검은별에서 태어난 존재였기 때문이다.
“넌 뭐야?! 대체 어떻게 검…….”
“어이쿠.”
망아꾼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놈의 머리를 갈라버린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쥐며 숨을 골랐다.
크라페와 함께 이동하며 보이는 족족 분신체들을 베었다.
상대는 세계 침식자의 분신체.
처음부터 전심전력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은 만큼 서리스는 망설임 없이 검은별을 쓰며 그들을 죽여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서리스는 분신체의 기척이 잔뜩 모인 곳에서 그림자의 힘을 느꼈다.
이 그림자의 힘은 서리스도 익숙한 것이었고, 크라페도 마침 악취가 모인 곳을 느꼈기에 곧장 이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하니 웬걸.
세계 침식자 분신체에게 둘러싸인 엑스널과 알리즈가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을 보자마자 서리스가 택한 건 간단했다.
분신체들을 전부 쓸어 버린다.
만약 분신체의 수준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높았다면 이런 방식을 채택할 수 없었겠지만.
성위의 결계를 넘기 위함인지 분신체들 개개인의 무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광견보다도 아래랄까.
덕분에 검은별을 쓴다면 그들을 쓰러트리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엑스널 선배, 알리즈 형님, 이쪽으로 붙으세요.”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만약 수틀린 세계 침식자가 분신체 대신 직접 나서기라도 했다간 이쪽도 답이 없다.
그런 만큼 둘을 데리고 워너힐 아카데미 쪽으로 합류하는 게 가장 옳은 판단이었다.
‘딱히 나를 노리고 온 것도 아닌 모양이고 말이지.’
흑마녀가 자신을 노리고 왔듯이 서리스는 이번 습격이 혹시나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하며 복잡한 마음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자신과 마주한 세계 침식자의 분신체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반응이었고.
덕분에 서리스는 정보를 캐낼 것도 없이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세계 침식자만 아니라면 분신체 따윈 무서울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것만 봐도 세계 침식자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인지 잘 알겠지만.’
아마 세계 침식자가 마음만 먹으면 일반 가문 하나 날려 버리는 건 일도 아니리라.
수백 명은 되는 6성급 분신체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온다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서리스 후배가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그러는 사이 이쪽으로 붙은 엑스널이 말을 걸어왔다.
그와는 여전히 애매한 관계인 서리스는 콧방귀를 쉬곤 악스판시온을 틀어잡았다.
“알리즈 형님께 고마워하세요. 그림자 기척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도중에 크라페의 코를 많이 빌렸던 건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니 이 정도 포위는 적당히 뚫을 수 있겠지?”
그 사이 사태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른 쪽에 있던 분신체들도 다수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서리스와 크라페가 분위기를 환기하게 해준 덕분인지 알리즈와 엑스널은 둘 다 전의를 되찾은 모습이었고.
덕분에 서리스는 수월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전부 쓸어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오만하네. 그런데 그만큼 믿음직해.”
앙숙이어도 공통의 적을 둔다면 같은 팀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만큼 인류의 적을 앞둔 네 사람은 지금만큼은 서로에게 최고의 팀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우리가 보조할게. 그러면 마음껏 날뛸 수 있겠지?”
“그야 쌉가능이죠.”
“뭐야. 그 말은.”
“요즘 애들이 하는 말이라네요.”
엑스널에게 도로시가 가르쳐준 말을 써먹은 서리스는 한차례 웃어주곤 바닥을 박찼다.
그 순간 크라페의 빛줄기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그 빛들이 노리는 건 당연히 분신체들.
정확하게 적들에게만 꽂히는 빛줄기와 함께 크라페의 손에는 어느새 황금빛 방패가 쥐어져 있었다.
“가자.”
“든든하네.”
여차하면 다른 쪽 힘도 써주겠다 이거겠지.
한줄기 웃음을 머금은 내 몸 주위로 그림자 망토가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런 서리스를 보고 분신체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다른 셋이라면 모를까, 서리스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별의 기척을 그들이 눈치챘기 때문이다.
“누가 저런걸.”
“어느 녀석이 개입한 거야!”
한차례 일어난 소란과 함께 그들은 서리스를 향한 의문을 마구잡이로 토해냈다.
“이 기척…… 그 녀석이랑 비슷하지 않아?”
“하지만 오래전에 죽은 놈인데.”
그 순간 서리스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자신의 기척이 누군가와 비슷하다고?
그 말을 들은 시점에서 서리스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분신체가 인식조차 못 할 속도로 뛰어나온 서리스는 그중 한 명의 머리를 손으로 잡곤 그대로 내달렸다.
으직!
그리고 이내 놈의 머리를 나무에 박아 넣으며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그를 내려 보았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말해봐.”
“으그윽!”
분신체는 머리가 잡힌 상태로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서리스는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는 분신체.
그를 죽인다고 협박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단지, 서리스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간단했다.
분신체를 만든 세계 침식자 망아꾼에게 자신이 이 정보에 흥미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놈이 내게 관심이 있든 없든 이제 상관없어.’
흑마녀가 자신을 노리고 움직인 시점에서 서리스는 모든 세계 침식자가 자신을 노릴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한 상태였다.
어차피 세계 침식자는 쓰러트려야 할 적.
서리스에게 있어 검은별은 항상 의문 투성이었다.
그 힘이 무궁무진해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은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금 분신체가 서리스와 비슷한 기척을 느꼈다는 정보는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저쪽이 일부러 나에게 이 정보를 카드로 써야 한다고 여길 만큼.’
서리스는 이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다.
서리스는 본체를 찾아가지 못할 테지만 망아꾼은 그가 워너힐 아카데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가 먼저 자신에게 이 정보로 거래를 요구하도록 유도해야 했던 것이다.
그 순간, 서리스가 쥐고 있던 분신체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진흙처럼 부서진 놈을 보고 서리스는 손을 털어내며 다른 분신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하나같이 묘한 눈으로 서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그들의 너머에 있을 망아꾼의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걸로 충분하다.
언젠가 망아꾼이 저 카드를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할 상황은 만들어졌다.
“부디 네 쪽에 머리를 좀 굴릴 줄 아는 이가 있길 바라지.”
그 말과 함께 또다시 분신체에게로 서리스가 쏘아진 순간이었다.
그들의 몸이 한 번에 진흙과 같이 무너져 내린 것이.
그 광경을 보고 서리스가 내달리던 발을 멈췄을 때, 그는 숲속 끝에서 거대한 기척을 느꼈다.
마치 숲을 종횡무진으로 활보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
그 감각을 따라 서리스가 반사적으로 움직였을 때, 그의 앞으로 두 발로 선 쥐 인간의 손톱이 휘둘러지고 있었다.
새빨간 동공, 새까만 털.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질 법한 외형을 지닌 쥐 인간은 샛노란 색의 손톱을 세웠다.
“고맙군. 네 녀석 덕분에 십 번 대인 내가 나올 수 있었다.”
쥐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검은별의 흔적은 이때까지 상대했던 분신체와는 차원이 달랐다.
왜냐하면 서리스가 기억하는 강적 광견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주인께서 결정하셨다. 네가 어떤 녀석이든 주인이 기억하는 녀석과 연관되어 있다면 네놈의 별문신을 뜯어 오라고.”
쥐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리스의 눈동자에는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확실하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검은별이 어떤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고.
그것을 안 시점에서 서리스는 당장은 아니라도 그의 본체와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 네 주인에게 전해.”
이윽고 서리스를 중심으로 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만간 직접 찾아갈 테니, 그때 뭘 말해야 할지 잘 생각해두라고.”
* * *
숲속 어딘가에서 섬광이 퍼져 나갔다.
그 섬광의 주인들은 조금 전에 생겨난 빛이 채 꺼지기도 전에 또 한 번 격돌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서리스와 쥐 인간 십칠 번.
숲속을 종횡무진으로 활보하며 검을 휘두르는 둘의 모습은 일반인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래서인지 둘의 싸움을 보면서도 제삼자인 세 사람은 머뭇거리며 섣불리 끼어들지 못했다.
“……네 동생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인 거야.”
“나도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어.”
엑스널이 긴장한 듯 얼음 검을 쥔 채 물었지만, 알리즈도 멍한 표정으로 서리스의 전투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두 사람에게 보이는 건 섬광과 바닥을 밟는 소리뿐.
둘의 교전을 눈으로조차 쫓아갈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알리즈는 요치아를 떠올렸다.
그가 서리스에게 무언가를 왜 그리 가르치고자 했던 건지 오늘에서야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들 중 크라페만이 유일하게 서리스와 십칠 번의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계 침식 관련으로 코가 예민하기 짝이 없는 크라페는 십칠 번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고.
반대로 냄새가 안 느껴지는 서리스는 오히려 눈에 띄어 잘 쫓아갈 수 있었다.
그런 둘의 전투를 보며 크라페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강해.’
크라페는 서리스에게 자신과 같은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에게 있어 서리스는 어찌 보면 롤 모델과도 같았다.
워너힐 아카데미 교관을 통한 교육 보다 서리스의 전투를 직접 보는 게 그에게는 더 유익한 교본인 것이다.
문제는 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서리스는 십칠 번과 부딪히고 있는 지금 상황 자체가 죽을 맛이었다.
‘금강잔월을 이렇게 켜고 있는데도 호흡이 못 따라와.’
십칠 번은 교전 이후 단 한 번도 속도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서리스에게 부딪쳐 오고 있었다.
그것만 따지면 그저 육탄돌격에 지나지 않지만.
자신보다 한참 메마른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힘과 체력은 서리스조차 한 수 접어야 할 만큼 대단했다.
‘내가 지구전으로 가는 걸 꺼리게 될 줄이야.’
그만큼이나 십칠 번의 체력은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후.”
한차례 숨을 내쉼과 함께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가슴 위로 끌어 올렸다.
지구전으로 끌고 가봤자 손해라고 판단한 만큼 더 이상 질질 끌지 않고, 최대한 빨리 끝내 버릴 속셈이었다.
그 순간 또 한 번 십칠 번이 뛰어올랐다.
잔상까지 남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십칠 번을 보고 서리스는 검을 쥐고 유영하듯 선을 그렸다.
‘나는 지금까지 검은별의 힘을 오직 검술에만 쏟았어.’
흑월귀명도는 서리스가 검은별을 오로지 검술에만 쏟았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런데 지금 서리스는 검은별을 활용하던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근간.
금강잔월 자체에 검은별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자가 검은별의 힘을 담아냈듯이.
서리스의 육체 안으로 깊숙하게 검은별이 파고들었다.
그 순간, 서리스는 갑자기 탁하고 트이는 세상을 보고 한순간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 폭발적인 힘은 서리스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광견이 검은별의 힘을 빌려 육체를 개조했듯.
서리스는 일반 동물들이 마수가 되었을 때, 어떻게 그토록 강인한 힘을 지닐 수 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십칠 번은 서리스의 존재감이 급격하게 커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는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별을 둘러싼 용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며 콧김을 내뱉었다.
자기 몸보다도 거대한 도마뱀을 연상케 하는 샛노란 색의 눈동자는 십칠 번의 육체를 긴장으로 수축시켰다.
환상.
그것은 검은별의 힘으로 서리스의 존재감이 급격히 상승하며 나타난 환상에 불과했다.
세계 침식자의 분신체이기에 검은별에 예민한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에 한순간 눈에 비친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윽?!”
그러나 위압감에 짓눌려 버린 그 순간 십칠 번을 주춤거리고 말았다.
분신체라 한들 생물이기에 생존 본능이 없을 수는 없었다.
본래라면 그것도 아주 짧은 틈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검은별로 기감이 극도로 예민해진 서리스에게는 상대에게 일격을 꽂아 넣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십칠 번은 지금 자신을 보고 놀라 실수하였다.
그 순간, 검은별의 힘이 깃들며 새까맣게 변한 눈이 번뜩였다.
마치 뱀이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듯.
십칠 번의 근육이 경직으로 굳는 그 순간에 서리스의 검이 쇄도했다.
퍼걱!
둔기로 짓이겨 버린 듯.
서리스의 검에서 쏟아져 나온 강렬한 기운은 십칠 번의 심장을 분쇄해 버렸다.
튀어 오르는 살점 사이로 십칠 번의 당혹스러움이 깃든 눈동자가 보였지만, 이내 그 빛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