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서리스는 워너힐 아카데미 교실에서 오랜만에 모두와 얘기를 나눴다.
“서발광, 그쪽은 어땠어?”
“되게 재밌었어! 사람들도 구하고, 기본적인 응급처치도 배우고. 많은 도움이 됐어!”
서발광과 도로시 그리고 스타리즈가 향한 곳은 귀수단 플레미아였다.
플레미아는 세계 침식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구호 활동을 주로 하는 곳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쪽으로 철저히 배워온 모양이었다.
실제로 서리스는 끝없는 초롱을 겪을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개인이 지닌 의료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꼈었다.
그런 만큼 이번 훈련은 서발광과 도로시에게도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난 좀 지루하던데. 팍팍 싸우는 걸 기대했는데.”
하지만 역시 활동적인 성향의 도로시에게는 좀이 쑤시는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서리스는 걱정 말라는 양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다른 단 교육에 들어가면 죽어라 구를 거야.”
아이랑과 크라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바드라, 너희 쪽은?”
입학식 때부터 창성과 운명으로 엮이기라도 한 건지.
이바드라는 호라이즌과 함께 또 같은 조였다.
그의 조원인 다른 한 명은 모르는 이이긴 했는데 이바드라와 호라이즌 그리고 같은 A반 한 명은 똑같이 책상에 늘어져 있었다.
“……테르넬이 있는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 거다.”
규수단 테르넬에서 어지간히 굴려진 모양이다.
그러는 순간 때마침 발렌타인이 들어오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에게도 물어봤다.
“발렌타인님 쪽은 발리움이었죠. 거기는 좀 어땠나요?”
“저희 쪽 말인가요? 아무래도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곳이다 보니. 경계 근무 및 부랑자 대응 위주였습니다.”
덕분에 치안 관리에 대한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게 됐다고 발렌타인은 말했다.
워너힐 아카데미라 해도 이미 오랜 시간 고유의 질서를 유지해온 대가문에 비하면 치안이 엉망일 수밖에 없긴 하니.
나름의 공부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스타리즈가 교실로 들어왔다.
그는 졸린 눈을 하고 있다가 서리스를 보더니 이내 생긋 웃어왔다.
“여, 오랜만이다잉.”
다른 이들과는 종종 식사 정도는 함께하곤 했지만, 그는 사람 많은 자리에는 잘 안 나타나서일까.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보게 된 스타리즈였다.
“일하는 동안 전마들한테 니 얘기 좀 많이 들었다. 전적이 마 어마무시 하던데?”
보아하니 서발광이 즐겁게 서리스에 관해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딱히 비밀일 것도 아니었기에 서리스가 적당히 대답하자 때마침 A반 담당 교관 가이든 밀리오레가 나타났다.
“한 달 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여러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그는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의 미소에 속지 않는다.
학생을 병기 취급하는 그의 내면을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한 분, 한 분께서 지난 한 달간 얼마나 적합한 병기로 성장해왔는지 교관과 조교들을 통해 기록된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것 봐라, 순식간에 또다시 병기 취급이지 않은가.
하지만 일단 A반 담당 교관인 건 사실이었기에 그는 그동안 학생들이 해온 훈련을 전부 꿰차고 있는 듯하였다.
그 증거로 학생들의 교육 내용이 적혔을 종이를 보지 않고도 한 명, 한 명의 결과를 말해주었다.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어차피 훈련 도중 다들 들었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들은 것들은 다음 단에서 보완할 수 있도록 지원될 것이며, 여러분들도 그에 맞춰 노력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소 지은 얼굴로 또다시 칠판에 단과 그 단에 배치된 조원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각 조의 조원은 5개월간 현재의 멤버로 고정됩니다. 서로 간에 불화가 있다면 반드시 직접 해결해야 할 겁니다.”
그건 일종의 경고와도 같았다.
세계 침식을 맞서기 위해 인류는 수많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개인이 무력 집단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 같은 괴물들뿐.
그 아래로는 결국 서로의 힘을 합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협력은 기본.
사회성은 필수였다.
언제까지고 천방지축 어린애처럼 구는 걸 받아줄 교관은 워너힐 아카데미 내에 없다는 거겠지.
“저희는 불화 하나 없네요.”
“동감.”
아이랑과 크라페가 슬쩍 말해오자 서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특이한 성향을 지니긴 했지만, 실력과 협조성만큼은 훌륭했다.
실제로 서리스도 이번 조에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 정도였고.
‘문제는 5개월 뒤부터인가.’
처음 5개월은 각 단과 워너힐 아카데미 환경에 적응을 하기 위해 조원을 고정해두었지만.
그 뒤부터는 거의 무작위라고 할 정도로 함께하는 인원이 바뀌곤 했다.
심지어 다른 반과도 같은 조로 묶이는 모양이니, 그때부터는 지옥이겠지.
‘다섯이 모이면 꼭 한 명은 이상한 사람이 있단 말이지.’
과거의 기억을 되새긴 서리스는 곧 닥쳐올 미래를 짧게나마 걱정했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탁탁탁―
그런 순간 교관 밀리오레가 칠판에 모든 이름을 다 적고 분필을 내렸다.
서리스와 아이랑, 그리고 크라페가 다음으로 갈 단은 테르넬이라고 적혀 있었다.
조금 전 테르넬에 갔었던 이바드라와 호라이즌이 책상 위에 기절하듯 쓰러져 있던 걸 떠올린 크라페가 인상을 와락 구기는 게 보였다.
크라페는 은근히 몸 쓰는 걸 힘들어 했었다.
실제로 악스달 훈련 때, 후반쯤 되면 매번 땅바닥에 누워 뒹굴던 크라페였으니 말이다.
‘힘을 억누르고 있어서 그런가.’
크라페가 세계 침식자의 힘을 반 정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챈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힘을 억누른 채로 매번 가혹한 훈련을 치르고 있으니 배로 힘들만 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나랑 가장 비슷한 상태가 크라페긴 한데.’
저쪽은 자신의 검은별을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듯하였다.
종종 코를 킁킁거리긴 하는데 그 이상은 안 하는 크라페였던 것이다.
‘바로 눈치챈 천구 녀석이 이상한 거겠지.’
로렐라이 소속인 아리즈 아리온을 떠올린 서리스는 혀를 찼다.
5개월 안에 로렐라이에도 들리게 될 텐데, 그때 그놈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민다.
저번에 떼어먹힌 밥값이 아직도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 그럼 개인 평가 보고 및 새로 배치된 단 확인은 끝마쳤으니,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루긴 하지만 여러분들도 쉬어야죠.”
뒤에 ‘병장기도 가끔은 쉬면서 정비해 줘야 오래 쓰거든요.’라고만 말하지 않았더라면 학생들이 꽤나 좋아했을 만한 마무리였다.
그 뒤 밀리오레는 여전히 비틀린 미소와 함께 질문할 게 있으면 찾아오라고 말을 남긴 뒤 떠나갔다.
갑자기 생긴 하루의 휴식.
그러나 이 휴식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는 서리스는 맘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천옥지회가 다름 아닌 오늘 열리기 때문이었다.
서리스는 모두가 돌아가기 전, 오늘 초대받은 이가 자신 말고 또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일단, 이 몸이랑 호라이즌은 받았다.”
역시 일곱별 쪽은 알아볼 것도 없이 다 받은 모양이었다.
“서리스님, 애초에 A반은 다 받았을 겁니다.”
옆에서 이바드라에게 물수건을 올려주던 셀링의 말에 하긴 하고 서리스가 납득했다.
A반의 인원은 고작 15명.
다른 반은 기본 50명을 기준으로 편성된다.
그리고 워너힐 아카데미는 학 학년당 총 6개의 반이 있다.
최상위권 A반 15명.
상위권 B반.
중위권 C, D반.
하위권 E, F반.
한 학기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들의 반은 끝없이 바뀐다.
하지만 유일하게 고정불변(固定不變)인 곳이 있었으니.
바로 A반이었다.
개인의 잠재력은 어느 시점이든 개화할 수 있기에 B반까지도 종종 학생들이 바뀌곤 하나.
A반은 졸업을 할 때까지도 반이 거의 바뀌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아이랑님, 다른 반 수업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아시나요?”
“단체 수업으로 진행되고 있죠. 3인 1조로 각 단에 파견되어 교관에게 훈련을 직접 받는 건 A반밖에 없을 거예요.”
아이랑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반의 정보를 말해주었다.
서리스에게 한 번 정보전을 밀리고 난 뒤.
워너힐 아카데미 뒤에서 새로운 정보망을 확보한 아이랑이었다.
과연 정보 수집에 능한 윌즈베르크다웠다.
‘역시 수업 자체가 흘러가는 게 다르군.’
이렇다 보니 A반 15명은 사실상 천옥지회 초청장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서리스도 갈 생각이야?”
“볼 일이 있어서.”
서발광의 물음에 답한 서리스는 턱을 매만졌다.
그러곤 모두를 돌아보았다.
“다들,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
* * *
황금을 넘어선 별의 세대.
그건 이번 워너힐 아카데미 1학년생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입학생 중 일곱별이 네 명이나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각 단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움직였다.
원래도 인재 등용 싸움으로 치열했던 그들이지만.
그런 마당에 별의 세대라는 카드가 잔뜩 들어 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학생들 쪽에도 퍼졌다.
“이번 천옥지회에 그 애들이 온단 말이지?”
“응, 보고받았음.”
그리고 여기 2학년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쪽은 조금 거들먹거리는 타입의 남성으로 각수단 로렐라이 2학년생 다윙 에드먼.
다른 한쪽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을 정도로 내려와 두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위수단 악스달 카엘제리 옴미아였다.
천옥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바쁜 3학년과 4학년을 제외한 2학년과 1학년뿐.
그렇기에 각 단은 인재 등용을 위해서 2학년들에게 어떻게든 천옥지회에서 1학년생을 단으로 권유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악스달은 누구, 누구를 제일 먼저 노리냐?”
“너무 많음.”
“안 알려주겠다 이거구만. 그것보다 너네 대가문 쪽 아가씨가 이번 학년에 있다면서.”
에드먼의 질문에 옴미아는 숨길 것 없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가씨는 다름 아닌 윌즈베르크 아이랑.
카일제리는 대대로 윌즈베르크의 소가문이었기에 그녀에게 초대장을 준 것도 옴미아였다.
“예쁘냐?”
그리고 이어진 말에 그녀가 경멸하듯 그를 보곤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쁨.”
“오오, 우리 도련님은 귀여운 맛이 전혀 없는데 말이지.”
그리 말하며 그는 천옥지회로 가는 길옆에 달린 등에 불이 꺼져 있음을 확인하곤 손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등에서 불길이 일렁였고, 그것을 확인한 그는 훅하고 불 듯이 손가락에 맺힌 마법진을 지웠다.
로렐라이 이전에 새벽마탑 소속인 그이기에 이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마법을 섬세하게 다루는 만큼 예의도 지키셈.”
“레이디분들께는 섬세하게 예의를 지킨다고?”
옴미아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그는 그녀의 머리를 툭툭 쳤다.
“어릴 때 엄마 젖 더 먹고, 많이 컸으면 레이디 취급해줬겠지.”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옴미아를 피해 천옥지회로 가는 계단을 뛰어오르다 문뜩 고개를 들었다.
계단 저 위.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옴미아, 저기 봐봐.”
자신에게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양팔을 잡은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옴미아는 슬쩍 시선을 옮겼다.
이내 그녀 또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리즈.”
“그래, 저 녀석이 천옥지회에는 왜 다시 나온 거냐.”
펜타니엄 알리즈.
그가 천옥지회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