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미개척 지역에서 지내고 있던 세계 침식 숭배자들.
오늘도 느긋이 양이나 치고 있던 잠식자 중 한 명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이상함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에게 보인 것은 거대한 빙산과 새까만 그림자 해일이 이곳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너무도 현실감 없는 상황에 그가 잠시 멍해졌을 때.
“매에에에에!”
놀란 양들이 사방팔방으로 도망가고 나서야 그는 뒤늦게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그러나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한 폭거 앞에서 그가 도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육신의 파편이 튀어 오르며 짓이겨진 그를 넘어 순식간에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빙산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동시에 그림자 사이로 서리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엑스널은 눈에 쌍심지를 켜며 그를 바라봤다.
‘별의 축복을 듬뿍 받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고?’
조금 전의 그 그림자의 파도.
거기에 얼마나 많은 별이 소모되었는지 직접 본 엑스널은 혀를 찼다.
역시 위험인물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런 그의 시선에 소란이 일어나자 집 밖으로 뛰어나온 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전부 잠식자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서리스는 몸을 비스듬히 낮추더니 이내 벼락같이 쇄도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잠식자들이 이에 뒤늦게 반응하려 했지만, 그들의 목은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핏물이 솟구치기도 전에 4명의 목을 벤 서리스는 또 한 번 바닥을 박찼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눈앞에 있는 잠식자를 베려는 순간 잠식자의 심장이 얼음의 검에 꿰뚫렸다.
서리스보다 한발 먼저 움직인 엑스널은 얼음 검을 빙글 돌리더니 다음 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저씨, 검을 쓰는구나. 이거 의왼데?”
“선배야. 서리스.”
마키나가 꽤 오래전에 검가의 이름을 내려놨다는 걸 아는 서리스는 엑스널의 검술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검은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질 법한 완성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빙천괴령(氷天怪令)
마키나가 다루는 가문비기이자 가문 직계들의 영혼에 새겨진 냉기를 다루는 비기.
그런 빙천괴령을 얼마나 눌러 담았는지.
엑스널이 쥐고 있는 검에서 흘러나오는 한기는 서리스도 몸서리칠 정도였다.
“정말…… 두 분 다 저희는 전력 외 취급인가요?”
그러는 순간 서리스의 그림자에서 나온 아이랑이 툴툴거리듯 말해왔다.
그녀는 서리스를 힐끗힐끗 보았고, 그와 눈이 마주치면 면사포가 있음에도 고개를 돌렸다.
저번 흑마녀 때 일이 있고 난 이후 계속 저러는데.
서리스는 그녀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뒤늦게 온 크라페를 보았다.
“크라페, 조력자는 어디 있어?”
“저쪽.”
그가 한 방향을 가리키자 서리스는 그리로 시선을 옮겼고, 거기에는 새카만 소와 사람이 합쳐진 듯한 사내가 두 발로 서 있었다.
“와, 나도 한 덩치 하는데 말이지.”
또래 중에서도 상당한 체격을 가진 서리스건만.
멀리서 보기에도 저 흑소 같은 사내에게는 미치지 못할듯싶었다.
인간이 맞기는 한 건지…… 상의를 입지 않아 드러난 상체의 검은 근육들은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내 그는 콧바람을 세게 내뱉더니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크흥, 썩을 악스달 놈들…… 또 우리 일을 방해해!”
거칠게 성을 내며 투레질한 그는 머리 위로 치솟은 두 개의 뿔을 앞세우며 이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덩치가 산만 해서 그런지 육탄돌격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쪽도 돌격에는 자신 있었다.
“이봐 아저씨, 저거 이쪽에서 처리해 줄 테니 두 눈 뜨고 잘 봐둬.”
나를 염탐하려는 그 속셈.
이참에 확실히 각인시켜 주겠다고 생각한 서리스의 몸 위로 그림자 망토가 둘러졌다.
이미 이 기술의 여파를 알고 있는 크라페와 아이랑이 서둘러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내 서리스가 양 다리 근육을 부풀리며 악스판시온을 흑소 사내에게 겨누었다.
그 순간 서리스의 목 뒤에서 별빛이 후광처럼 떠올랐다.
그 아찔한 빛은 돌격하던 흑소 사내마저 멈칫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서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을 박찼다.
순간, 공간이 압축되듯 서리스의 인영이 흐트러졌다.
투쾅!
사람과 사람이 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대의 돌진을 보자마자 허리를 굽히며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했던 흑소 사내는.
서리스와 부딪치며 원래 내달렸던 장소보다도 족히 몇십 미터는 더 떨어진 장소까지 밀려나 있었다.
“그걸 버텨?”
웬만한 중형 마수도 일격이면 나뒹굴게 할법한 출력이었는데.
밀려났을 뿐 두 다리로 서 있는 흑소 사내를 보며 서리스는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 하하! 고작 그 정도로!”
그리고 그런 서리스를 보며 충격을 견뎌낸 흑소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흘리기 직전.
주룩―
그는 흐려진 초점과 함께 코피를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충격으로 내부가 흔들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와락 인상을 구겼다.
“터프하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며 서리스는 오히려 그를 높게 평가했다.
귀영분신을 정면에서 막아냈단 건 정말로 몸이 그냥 크기만 한 건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얼추 6성 초입 정도 될까.
꽤나 해봄 직한 상대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린 흑소 사내가 기다란 양팔을 동시에 휘둘러왔다.
잡기 기술 위주의 무술을 사용하는 그는 몸 주위에 검은별의 힘을 두르고 있었고.
그걸 믿기 때문에 검에는 조금도 생채기를 입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식하지만.’
검은별을 오로지 육체에만 집중시켜 놓았기에 그의 근육은 실제로도 꽤 위협적이었다.
물론, 상대가 서리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서걱!
“크학?!”
가슴에 커다란 상처가 생긴 흑소 사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조력자가 되고 난 뒤 몇 년 만에 입어 보는 검상.
그 충격에 화들짝 놀란 그가 눈을 부릅뜨며 주춤거렸고, 그때 서리스가 쥔 악스판시온이 우웅거리며 검명을 토해냈다.
아무리 검은별로 육체를 강화해 놓았다고 한들.
가장 근본적인 검은별의 힘 자체가 무력화되면 전부 부질없는 짓이다.
“너, 나랑 상성이 안 좋네.”
서리스의 얼굴 위로 악의가 가득 담긴 미소가 생겨난 순간 흑소 사내는 두 눈을 부릅떴다.
서리스가 쥐고 있는 저 검은 자신의 검은별을 무력화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챈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흑소 사내는 두 팔을 허리춤으로 당겼다.
그 순간 그의 전신을 두르고 있던 검은별이 내부로 빨려 들어가며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그의 육체는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고.
방금까지 흑소와도 같았던 모습 대신 다리 근육만이 단단하게 부푼 얇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은 캥거루와 상당히 유사했다.
‘육체 변형인가.’
자주 사용하면 부담이 갈 것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저런 기술을 사용했단 것은 그만큼 위험한 상황임을 자각한 것이겠지.
악스판시온을 쥔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서리스는 그를 살폈다.
저런 모습이 됐다는 건 필시 스피드 전으로 싸우고자 하는 것일 터.
이쪽도 거기에 대응하면 그만이다.
서리스가 양다리에 별을 부어 넣는 그 순간, 캥거루 사내가 뛰었다.
정확히는 서리스와 반대편으로.
“어?”
한순간 그는 황당하다는 반응과 함께 주춤거렸고, 그러다 보니 상대를 쫓아갈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방금까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정면 응수하던 그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거라곤 조금도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뭔 저런 놈이 다 있어.”
한순간 얼이 빠져 반응이 늦었던 서리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투덜거렸다.
반응이 늦었던 만큼 이대로라면 놓친다.
그를 따라갈 속셈으로 서리스가 달리려는 순간 캥거루 사내 앞에 얼음의 벽이 치솟았다.
그 벽이 엑스널이 세운 것임을 알아챈 서리스가 뛰어가자 캥거루 사내는 갑자기 생겨난 얼음벽을 도약해 넘으려 하고 있었다.
“크헉?!”
그러나 벽을 넘기 직전.
그는 수십 개의 얼음 검을 가슴팍에 박은 채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얼음벽으로 생긴 사각에서 대기하던 엑스널이 그가 도약하며 방심한 틈을 타 공격을 한 것이었다.
허공에서 캥거루 사내의 몸 위에 올라타 수십 개의 얼음 검을 박아넣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얼음으로 빚어진 악귀와도 같았다.
“제, 젠자앙, 내, 가 이렇게.”
가슴에 수십 개의 얼음 검이 박힌 사내가 분한 듯 중얼거렸지만, 엑스널은 서슴없이 그의 목을 갈랐다.
“서리스 후배, 기억해둬. 잠식자나 조력자는 우리와 싸우는 게 목적이 아니야. 그들은 살아남아서 세계 침식자의 뜻을 이루는 게 주된 목적이니 언제나 도주를 염두에 두는 게 좋아.”
엑스널의 충고에 서리스는 혀를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도주를 상정 못 한 건 사실이다.
조력자와의 전투 경험도 광견밖에 없었고, 잠식자도 용천 말곤 상대해보지 못했던 만큼.
서리스는 엑스널에 비하면 이런 경험 부분에서 좀 부족했다.
소드란 시절 때도 마수를 상대했던 것이지 조력자를 상대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선배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것도 잘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단지, 첫인상부터 쭉 안 좋은 놈이 거들먹거리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 뿐.
그러면서도 엑스널이 말했던 걸 서리스는 기억에 새겨 두었다.
그가 겪어온 경험만큼은 서리스도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서리스는 죽어버린 조력자를 힐끔 보았다.
가슴과 명치, 심장, 정확하게 사람의 급소만 노리고 박아 넣은 검은 그가 대인전에 얼마나 노련한지 잘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죽이는 것만을 목적으로 싸우는 방식은 또 다르긴 하지.’
바로 도주를 택한 만큼 그도 방심하긴 했지만, 조력자는 6성 초입에 이르는 강자였다.
검은별의 힘을 빌려 오른 경지라도 강자는 강자.
그런 그를 이렇게 손쉽게 죽인 것을 보면 그가 6성 초입은 오래전에 넘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고작 1년 차이인데 말이지.’
서리스는 같은 학년 중 엑스널을 상대로 1대 1을 했을 때, 승부를 볼 수 있을 법한 이를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규격을 달리하는 스타리즈라면 모를까.
솔직하게 말해 이바드라조차도 몇수 부딪치지 못하고 패배할 것 같았다.
‘그만큼 워너힐 아카데미의 1년은 그 격차가 크다는 소리겠지.’
서리스는 입학시험을 떠올렸다.
단원이었던 황사자 글라오스는 졸업 당시 B반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라도 방심하지 않고 서리스와 1대 1로 맞섰다면 서리스는 승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황사자가 아닌 A반 졸업생이 상대였다면.
‘검은별을 써도 힘들었겠는데.’
눈앞에 있는 엑스널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2학년 A반의 최상위권인 그는 누가 뭐래도 대단한 실력자였으니까.
그래서일까.
어째선지 묘한 고양감이 서리스 안에서 샘솟았다.
광견을 겪은 그는 내심 마음 한편으로 강자와의 목숨을 건 싸움을 갈구해 왔을지 모른다.
생사결만큼 배울 게 많은 경험은 없었으니까.
6성에 이르고 나서 급격하게 줄어든 성장 속도는 서리스조차 성장에 목마르게 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나 전투에 집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서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사결을 일부러 하고 다닐 생각은 없다.
목숨은 하나다.
겪어 본 놈이 안다고, 죽을 때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만큼 엿 같은 건 없다.
‘배울 건 배우되, 목숨은 소중히.’
그런 생각을 품으며 서리스는 남은 잔당 소탕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잔당 소탕을 무사히 마치고, 엑스널은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라는 통보를 한 뒤 보고를 올리고자 떠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서리스와 두 명은 잠시 눈을 깜빡이곤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난 갈래.”
마이웨이 성격답게 크라페는 나른한 표정으로 곧장 자리를 떴다.
보아하니 침식자들 틈에서 뒹구느라 코가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유용하긴 한데, 신체 감각 기관을 극한으로 활용하는 거니 많이 힘들겠네.’
크라페를 짧게 동정한 서리스는 아이랑을 돌아보았다.
저녁이 되어서인지 크라페가 사라지자 슬쩍 면사포를 걷어 올린 그녀는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 서리스님, 저녁에 혹시 약속 있을까요?”
“네, 가볼 곳이 좀 있어서요.”
아이랑이 스리슬쩍 물음을 던지자 서리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가 곧 서리스와 눈이 마주치더니 서둘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저럴 거면 면사포는 왜 벗은 걸까.
“혹, 시…… 약속이라는 게?”
“아, 네. 알리즈 형님을 좀 찾아가 볼까 하거든요.”
서리스가 대답을 들은 아이랑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와 눈을 못 마주치는 걸 보며, 조만간 그녀가 느끼는 죄책감을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서리스는 생각했다.
“알겠어요. 아주버님께는 문안 인사드려 주세요.”
그리 말한 아이랑은 아쉬워하면서도 종종걸음으로 서리스에게서 떠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할 겸 가만히 보고 있던 서리스는 문뜩 그녀가 방금 전 한 말을 떠올리곤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버님?”
알리즈가 왜 그런 호칭을 사용했는지 그 영문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서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