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서걱!
수십 개의 머리가 달린 상체와 하체가 양단되며 암형창귀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암형창귀를 피해 서리스의 그림자에서 나온 아이랑은 크라페의 빛이 부담스러운 듯 서리스의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후우, 서리스 님은 키가 커서 좋네요. 하나 장만해서 데리고 다니고 싶어요.”
“차라리 양산을 하나 사시죠.”
“들고 다니기 불편한걸요.”
아이랑이 장난스럽게 말하는 사이 빛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둠 속에서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아이랑과 함께 서리스는 크라페에게 돌아왔다.
“고생했어.”
“한 거 없어.”
저런 별을 형상화해서 띄우는 데 들어간 수고가 보통이 아닐 텐데 한 게 없다니.
크라페도 몸을 움직이는 게 우선인 타입이라서일까, 암형창귀와 직접 싸우지 못해 조금 불만인 모양이다.
“저희 생각보다 합이 잘 맞지 않나요? 조원을 잘 뽑은 거 같아요.”
그사이 아이랑은 조금 전 전투가 마음에 들었는 듯 서리스의 발아래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그림자 속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날뛴 게 꽤 재밌었던 모양이다.
“5개월 동안 잘 지내 보죠.”
서리스도 적당히 받아 주며 웃으려 했다.
가슴속 깊은 곳부터 요동치는 감정이 뇌를 강렬히 때리기 전까지는.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아이랑과 크라페 또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이윽고 서리스 일행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이들 맞은편에서 어둠과 함께 걸어오기 시작했다.
서리스는 반사적으로 아이랑과 크라페를 잡고 지하 공간의 무너진 벽면으로 뛰어들었다.
그건 순전히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전생에 태악룡에게 전신이 날아갔던 경험이 없었더라면 서리스 또한 이 두 명과 같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 아악, 악.”
아이랑은 서리스 품속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둠에 강한 그녀지만, 진짜 공포를 마주하고 나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크라페 또한 너무 진한 악취에 정신을 잃은 듯 서리스의 팔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이, 감각, 이 느, 낌.’
오래전 한 번.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를 느꼈던 그 감각.
절그럭절그럭―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듯한 소리가 지하 공간에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바닥까지 내려오는 칠흑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
팔과 다리 전체를 휘감고도 남아 바닥에 질질 끌리는 쇠사슬.
일말의 빛조차 허락하지 않은 어둠과도 같은 눈동자는 기괴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조금이야. 여기를 건드리고, 다음은 여기. 그리고 이쪽도 만져야 하네. 무너진다. 또 하나가 또 무너져.”
새까맣게 물들인 입술로 정신없이 혼잣말을 내뱉는 존재가 어둠 속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서리스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수만 마리의 벌레가 여러 개의 발로 자기 피부 하나하나를 타고 오르는 끔찍한 감각이 뇌를 강타했다.
검황 락로드를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존재감.
저 여자는 공포로 빚어 쌓아 올린 진짜 괴물이었다.
세계 침식자, 흑마녀.
그녀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
서리스는 급히 손으로 아이랑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둠에서 감각이 예민한 그녀는 견딜 수 없는 공포 앞에서 머리가 새하얗게 된 건지 계속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아이랑의 송곳니가 서리스의 손을 파고들어 핏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그걸로 버틸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아, 죽었네.”
그리고 어느샌가.
서리스가 숨어 있는 벽 바로 뒤편까지 도달한 그녀는 암형창귀 시체를 바라보며 고개를 반쯤 꺾었다.
새까만 손톱으로 자기 볼을 툭툭 건드리던 그녀는 곧 암형창귀의 시체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그러자 암형창귀는 한 차례 몸을 거칠게 퍼덕이더니, 이내 추욱 늘어졌다.
“건드림이 달라. 누가? 왜? 어디서부터? 틀어졌네.”
죽어버린 암형창귀까지 다시 살릴 수는 없는지 그녀는 또다시 혼잣말을 내뱉었다.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서리스는 머릿속에 차오르는 공포 탓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를 질끈 깨물고 악착같이 참았다.
잠깐이다.
이미 끝나 버린 세계 침식을 흑마녀가 나갈 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역시 너야?”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은 그때.
서리스의 귀에 절대로 들려서는 안 될 말이 울려 퍼졌다.
벽면 사이로 들어온 흑마녀의 얼굴.
그 속에 담긴 새까만 눈동자.
그것과 마주했을 때 서리스의 정신은 이제껏 없는 모든 전력을 쏟아 내었다.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일식(一式)
흑월(黑月)
어둠 속 어둠이 피어올랐다.
새까만 공간.
그저 흑마녀가 손을 휘저으면 사라질 뿐인 미약한 것이었지만.
그 덕에 짧은 틈을 번 서리스는 모두를 들고 달리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모든 걸 다 쏟아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크라페!”
그리고 서리스는 자기 손에 들린 채 흑마녀가 내뿜는 악취를 어떻게든 견디고자 하는 그를 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써라!”
지금 그나마 쓸 수 있는 도박 수는 크라페가 지금까지 숨겨 둔 힘뿐.
저런 괴물과 싸우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도망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것 하나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으, 그윽.”
서리스의 손에 들린 크라페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전신에서 식은땀을 쏟은 그는 양손을 들어 올림과 함께 허공을 손으로 붙잡았다.
지이이이익―
그 순간 서리스는 주변 공기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마치 무언가를 꽉 붙잡고 있는 크라페는 코피를 주룩 쏟아 내며 서리스에게 말했다.
“밖, 으로, 달, 려.”
무엇인지는 몰라도 크라페가 했다.
그 증거로 흑월을 손으로 털어 내어 지운 흑마녀가 서리스 쪽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검제를 뒤쫓던 그 날보다도 더 빠르게 서리스는 세계 침식 밖으로 달렸다.
본 적 없는 건물들이 사라지고 숲에서 나온 순간, 서리스는 턱 하니 막혔던 숨이 그제야 풀려 나가며 호흡을 내뱉었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 한계치까지 사용한 다리가 제멋대로 후들거렸다.
셋 중 그나마 공포에서 무사한 서리스였지만, 그 또한 정상이 아니었는 듯.
서리스는 자꾸 뒤집히려는 시야를 억지로 부여잡았다.
‘더 멀어져야 한다.’
서리스는 기절한 아이랑과 크라페를 들고 비틀거리는 다리를 내뻗었다.
대체 세계 침식자란 어떤 존재길래.
마주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는 걸까.
‘내가,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세계 침식 조력자인 광견은 저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귀여운 수준이었다.
워너힐 아카데미의 단장들이 온다면 그녀를 막을 수 있을까.
‘딱 한 명.’
그 사람이 움직인다면 모를까, 다른 단장들로는 서리스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세계 침식자와 맞서는 건 아직 한참 멀었어.’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할까.
모르겠다.
평생의 노력이 닿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흑마녀는 괴물이었다.
“뭐야! 이 자식들 훈련 땡땡이치고 어딜 내뺐어!”
그러던 순간 흑마녀 때문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야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자리를 비웠던 악스달 교관 디다트가 뒤늦게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는 흑마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듯하였다.
“형편없기는! 대가문 자제라는 놈들이 감히 도망이나 쳐. 오늘은 죽을 때까지 훈…….”
그러나 그의 호통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바락바락 내지르던 소리가 한순간 끊어지고, 마치 무언가 못 볼 것을 본 듯 숲에서는 침묵만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썩을.’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악연도 연이라고 그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린 듯하였다.
문제는 이쪽도 한계다.
심력을 다 소비한 듯 자꾸 감겨 버리려는 눈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사박!
그러는 순간 뒤늦게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리스의 시야가 끊기기 직전.
누군가가 그의 몸을 텁 하니 받아주었다.
서리스를 부축한 이는 나이가 꽤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고생했구나, 장하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서리스는 현무 모양의 귀걸이를 보곤 그녀가 누군지 눈치챘다.
위수단 악스달의 수장 독후 불터렉스 윈터였다.
“생존자다. 학생이야. 정신 공격에 당한 모양이니. 누가 데려가거라.”
“예!”
그녀의 부름의 악스달 단원 몇 명이 서리스와 둘을 받아주었다.
그것을 본 서리스는 겨우 안도하고 의식이 끊어졌다.
“저 아이, 얼굴이 익은데. 이름은?”
서리스가 기절한 사이, 동료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정신력으로 버틴 그를 눈여겨보곤 물었다.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허? 그래? 저 아이가 말이지?”
그녀는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곤 검은색 복면을 코끝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릭슨의 딸이 입학했다던데.’
조카의 딸을 떠올린 그녀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흔히들 영웅호색이라지 않는가.
혹시 모르지.
“다들 따라오거라. 본녀가 얼른 일을 끝낼 볼 일이 생겼으니.”
“예!”
힘찬 기합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독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흑마녀가 나타난 이후.
워너힐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그녀를 사살하고자 투입된 독후 불터렉스 윈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5명 중상자 27명이라는 참사가 나버렸다.
거기에 흑마녀는 도주하여 사라져 버렸으며, 그 과정에서 그녀가 폭주시킨 세계 침식으로 인해 추가 부상자들도 더 발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흑마녀는 오직 세계 침식을 폭주시키는 데만 목표로 둔 탓에.
일반 시민 중에서는 사망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와중 악스달 교관 디다트가 학생들을 구하려고 흑마녀에게 맞서다 사망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덕분에 그는 흑마녀와 맞선 이들 중 한 명으로서 이름이 적힐 수 있었다.
그렇게 흑마녀의 워너힐 아카데미 습격 사건은 대대적으로 퍼져 나가며 흑마녀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재각인시켰다.
그리고 그 무렵.
워너힐 아카데미 지부 내에 세워진 병원에서 서리스가 깨어났다.
깜빡.
병원 천장을 보며 한 차례 눈을 움직인 서리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근육통이 느껴지며 몸이 여기저기 지끈거리긴 했지만, 전부 정상이었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구만.’
살아 있다는 것으로 안도해도 되겠지.
기다랗게 한숨을 내뱉은 서리스는 이불을 걷었다.
모든 힘을 쥐어짜 내 도망쳤던 만큼 몸이 살짝 삐걱거리긴 했지만, 금강잔월을 부어 넣자 금방 회복되었다.
애초에 정신력이 너무 갉아 먹혔던 것만 제외하면 서리스는 다친 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친 거라 해 봤자 아이랑이 공포를 참고자 깨물었던 왼쪽 손뿐.
병원 침대 위에 이렇게나 누워 있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리스는 멍하니 밤중인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병실에 있으니 자신을 바라보던 흑마녀의 새까만 동공이 다시금 떠올랐다.
‘역시 너야?’
그녀가 내뱉었던 그 말.
그 말은 분명히 서리스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맘때 흑마녀가 워너힐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일 같은 건 없었어.’
과거로 돌아오기 전 흑마녀가 워너힐 아카데미를 공격하는 일은 분명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흑마녀는 워너힐 아카데미를 습격했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인가.
미래가 바뀐 이유에 가장 일조한 것은.
‘나야.’
다름 아닌 서리스 자신이었다.
미래가 바뀔 만큼 간섭한 것은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어디서부터 얼마나 바뀐 거지?’
그렇기 때문에 서리스의 얼굴은 한없이 찌푸려져 있었다.
세계 침식자가 워너힐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전대미문의 사건.
그 사건이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흑마녀가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말한 것도 그렇고, 분명히 나를 상정하고 이곳에 온 거였어.’
서리스는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적어도 지금 수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세계의 흐름이 자신을 덮쳐 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썩을.’
괜히 답답해진 서리스가 병실 밖으로 걸어 나오자, 조용한 병원 내부가 보였다.
어두컴컴한 복도.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소 반나절의 시간이 지난 셈이다.
‘간호사를 찾아서.’
우선 현재 상황과 상태를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서리스의 눈에 팻말 하나가 보였다.
그라말테 세라 크라페.
아무래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서리스가 드륵 하고 병원문을 열자 개인실 침대 하나가 보였다.
침대에는 아니나 다를까 크라페가 누워 있었고, 그는 인기척을 느낀 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일어나 있었냐.”
“1시간 전.”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 있었군.
마지막 기억에서 그가 코피를 쏟던 걸 기억하던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의자를 빼고 앉았다.
둘은 잠시 동안 말없이 있었다.
서리스는 그에게 내심 미안했다.
흑마녀가 자신을 노리고 온 것이라면 크라페는 휘말린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서리스는 멋쩍은 듯 침묵을 깨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 죽을 뻔했다. 기적적으로 살았어.”
그런 그를 보며 크라페는 코끝을 손으로 매만졌다.
“……아무것도 못 했어.”
서리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눈에 띄게 축 처진 그는 평소의 나른한 얼굴도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 공포 속에서 움직일 수 있던 건 오직 서리스 한 명뿐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아이랑도 크라페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이전부터 크라페는 세계 침식자를 쫓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러나 오늘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세계 침식자와 마주한 순간.
크라페는 자신의 목적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진정한 공포가 눈앞에 닥치자, 평생 해 온 그 일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을 낳았기 때문이다.
“너 없었으면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텐데. 뭔 헛소리냐.”
서리스는 그런 크라페의 생각을 눈치채고 말해 주었다.
흑마녀가 자신을 노렸던 만큼 크라페의 힘이 없었더라면 죽은 건 오히려 서리스 자신이었다.
그에게 고마워할지언정 그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더 쉬고 있어.”
지금은 그에게 무엇을 말해도 힘들 거라 생각한 서리스는 밖으로 몸을 돌렸다.
“……넌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어?”
그러자 크라페가 질문을 해왔다.
그 질문을 듣고 서리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말을 툭 던져 주었다.
“한 번 뒤져 봤거든.”
크라페로서는 알 수 없는 해답만을 놓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