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25화 (124/275)

125화

이후 서리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어느 훈련장이었다.

알려 준 대로 왔음에도 이들을 반기는 건 텅 빈 훈련장뿐이었기에, 의아함을 느낀 서리스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분명 이곳에 있을 거라고 했던 악스달 교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리 늦었나!”

그 순간 호통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한 남자가 ‘쿵’하고 떨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지닌 그는 셋을 보더니 눈살을 팍 찌푸렸다.

“훈련생들이 빠져도 완전히 빠졌군. 감히 교관을 기다리게 해!”

서리스는 그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알리즈와 잠깐 대화하긴 했어도 서리스 일행은 딱히 늦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9시 55분으로, 원래 도착해야 하는 시간보다 5분 일찍 온 셈이었다.

만약 서리스가 늦었다고 생각했다면, 알리즈에게 처음부터 양해를 구하고 빠르게 왔을 것이다.

“훈련생은 적어도 30분 전에는 훈련장에 와 대기해야 하는 게 기본이다. 앞으로 염두에 두도록!”

무슨 트집이지.

서리스는 그가 이렇게 호통치는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서리스와 크라페 그리고 아이랑은 대가문 직계다.

거기에 실력이 가장 좋은 A반.

‘초장에 일부러 기강을 잡을 속셈인가.’

자기 말을 잘 따르게 하려는 목적이겠지.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저런 건 다수의 인원을 활용할 때는 집단 심리 덕분에 유용하지만.

반대로 지금과 같은 소수 인원을 상대로는 오히려 악영향을 준다.

예전 청림단 병사들을 지휘하며 그런 것들을 터득한 그였기에, 서리스는 교관의 미숙한 점이 보였다.

최고의 육성 기관이라 불리는 워너힐 아카데미라도 사람 사는 곳이라 이건가.

“생트집이네요.”

아니나 다를까, 아이랑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그녀의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 바로 훈련에 돌입할 거다. 첫 시작은 훈련장을 달리는 것으로 시작하지. 자, 뛰어라!”

서리스는 우선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저런 고집스러운 타입은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 봤자, 이쪽만 피곤할 뿐이다.

그렇게 서리스가 달리자, 아이랑과 크라페도 별수 없이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셋은 악스달 교관에게 한참을 훈련받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교관 다디트는 여전히 처음과 같은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했고.

그 결과, 서리스 일행은 일주일 동안 무리하게 훈련을 감행했다.

서리스야 금강잔월에다가, 검제 요치아에게 겪은 수련들이 있어서 아무렇지 않았지만.

아이랑과 크라페는 지쳐 보였다.

그 증거로 ‘폭포 수련’ 도중, 멀쩡하게 폭포 아래에 있는 서리스와 달리 아이랑은 쏟아지는 물줄기들을 맞다 지쳐 나갔고.

크라페는 물에 둥둥 떠서 저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정말.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물 밖에서 서리스를 보며 아이랑이 한숨을 푹 쉬었다.

교관인 다디트는 오늘 셋에게 폭포 수련을 지시해 놓곤 정작 자기는 어딘가로 가 버렸다.

덕분에 훈련 시간임에도 한쪽으로 빠져 쉴 수 있게 된 아이랑이였지만, 그녀는 지친 듯 말했다.

“서리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제 생각에 동조를 바라기보다는 순수하게 질문을 해 왔다.

지금 이런 훈련에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의미가 있냐고.

“별 의미 없을 겁니다. 다디트 교관은 기강을 잡으려는 생각 말곤 없겠죠.”

“서리스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중이셨군요.”

아이랑은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요?”

“간단한 예상을 해 보자면 내일쯤 다디트 교관은 뭔가 사건이 터지면서 교체될 겁니다.”

“네?”

뜻밖의 대답에 아이랑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서리스의 말을 듣고 아이랑이 의문을 품은 사이, 그는 말을 이어 갔다.

“그는 교관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하거든요. 대신 다음에 올 교관은 인성도 실력도 무척이나 뛰어나겠죠.”

서리스는 그러면서 폭포 아래에서 감은 눈을 떴다.

그가 내일이라고 예측한 이유는 늘 훈련에 같이 있던 다디트가 오늘 때마침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새로 온 교관은 말할 겁니다. 다디트 교관 건을 정식으로 사과하겠다. 대신 남은 훈련 기간 동안 저희 셋을 위해 최선을 다해 교육하겠다는 식으로요.”

“그건.”

“다디트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 저희이니 그와 비교되는 그 교관에게는 당연히 호감이 생길 겁니다.”

당연히 다디트 때와는 대우도 훨씬 좋아질 테고 말이다.

다디트라는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악스달에 이미지를 나락에서 한순간에 뒤집으려는 거겠지.

“……왜 그런 짓을.”

“A반은 인재니까요. 특히 대가문인 세 사람. 지금은 학기 초이니 기회 있을 때 이미지를 크게 심어 두려는 겁니다.”

안 좋은 기억과 좋은 기억을 둘 다 대조하도록 말이다.

“물론 추측입니다.”

폭포 아래 서리스가 빙그레 웃자 아이랑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며칠 안 됐습니다.”

“윌즈베르크 가문의 직계인 제 정보 수집 능력이 서리스 님에 비하면 갑자기 부질없게 느껴지는데요.”

“그것도 저쪽이 노린 겁니다. 아이랑님은 낮에는 체력이 약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된 단련으로 미리 진을 빼 놓은 거죠. 딴생각 못 하도록.”

이건 윌즈베르크의 가문 특성이다.

윌즈베르크는 펜타니엄과 같이 밤에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가문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낮에는 그 힘이 약해지니, 그녀가 늘 햇빛을 피해 면사포를 쓰고 다니는 이유도 그런 이유였다.

“이건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거죠. 전 아직 혈귀를 떼어 내지 못했거든요. 그때까지는 반푼이랍니다.”

반푼이라 말한 것 치곤 일곱별인 그녀지만.

혈귀가 윌즈베르크 가문에서 어떤 걸 뜻하는지 아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렇게 들으니 확실히 알겠네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세우곤 면사포 아래 손을 옮겼다.

“전 악스달에 들어가야겠어요.”

“의외의 말이네요.”

“뒤에서 음흉한 짓거리를 하는 게 마음에 들거든요. 들어가서 제 것으로 만들어 제 발아래에 둬야 성이 풀리겠어요.”

어떤 의미론 악스달의 계획이 잘 맞아떨어진 걸지도 모른다.

벌떡!

그 순간 물에서 둥둥 떠다니던 크라페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코를 벌렁거린 채로 눈살을 찌푸렸고, 서리스 또한 폭포 아래에서 걸어 나왔다.

“크라페.”

“악취야.”

역시.

서리스는 그림자로 자신의 훈련용 옷에 스며든 물기를 모조리 말려 버리곤 뭍으로 올라왔다.

이어 바로 근처에 일그러지고 있는 공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세계 침식이 발생한 거다.

“어쩌죠.”

아이랑이 서리스에게 의중을 물었다.

크라페나, 아이랑이나, 서리스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자는 아니다.

다들 알아서 수납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들은 언제든 전투할 수 있는 상태였다.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아봐야 하니. 우선 수색하고 해결할 수 있으면, 우리 선에서 해결하는 거로 하죠.”

워너힐 아카데미 학생이기 이전에 그들은 대가문 직계.

각자의 가문이 담당하는 최흉을 겪어 본 그들에게 세계 침식을 향한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모두 다 반대 없이 동의하자, 서리스는 미소 짓고 세계 침식을 향해 발을 뻗었다.

* * *

서리스 일행이 세계 침식으로 들어가는 사이, 세계 침식 발생 여부를 살피는 규수단 테르넬에서 비상이 터졌다.

왜냐하면 워너힐 아카데미 근처 세계 침식들이 폭주하며 수준이 급격히 올라갔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세계 침식 발생 여부를 철저하게 관측하던 그들이기에 지금 터진 이상 증세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세계 침식자 흑마녀다! 워너힐 아카데미 근처에서 흑마녀가 나타났어! 빨리 위쪽에 보고해!”

워너힐 아카데미 지도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한 단원이 외치는 사이, 비상을 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세계 침식자

흑마녀(黑魔女)

보고된 바로는 세계 침식의 힘을 폭주시켜 위험도를 올리는 최악의 세계 침식자다.

첫 발견은 5년 전 펜타니엄 쪽에서였고, 이후 몇 번이고 그와 비슷한 흔적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이어지며 그녀의 존재는 확실시되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워너힐 아카데미에 나타났다.

기회라면 기회.

수많은 인재와 실력자가 모인 워너힐 아카데미다.

세계 침식을 폭주시키는 그녀의 위험도는 말할 것도 없으니, 최우선으로 죽여야만 했다.

“젠장, 주변 세계 침식들도 폭주해서 엉망이잖아.”

“인원 전원 불러! 일단 각 단에서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은 전부 투입해서 세계 침식을 막는다!”

“세계 침식도 침식이지만, 최우선 목표는 흑마녀라는 걸 모두에게 공지하도록 해.”

“거기, 놓치지 마! 흑마녀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계속 살펴야 한다!”

여기저기서 소란이 터져 나오며 워너힐 아카데미는 때아닌 소동으로 난리가 났다.

그리고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인 그녀의 발길이 북쪽, 위수단 악스달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각 단에 보내지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

훈련장 근처 폭포에서 발생한 세계 침식.

그 속에 들어온 서리스는 별을 풀며 세계 침식 안을 수색하고 있었다.

‘환경이 아예 바뀌었어.’

그는 세계 침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풍겨 오는 특유의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는, 주위 환경을 최우선으로 살폈다.

우선 환경은 한눈에 보아도 바뀌었다.

아까 전까지 폭포와 숲만 있었던 장소에는 본 적도 없는 하늘 높이 치솟은 형태의 돌들과 그걸로 이루어진 폐건물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건물들은 마치 자연에 잡아 먹히기라도 한 듯 못 보던 식물들에 휘감겨 있었다.

건물 안으로 슬쩍 들어가자, 건물 바닥은 짙은 녹색의 늪 같은 거로 덮여 있었다.

시험 삼아 주머니에 있던 종이를 던져 보자 타는 냄새와 함께 서서히 녹아내렸다.

“발 넣어서 좋을 건 없겠네.”

못 보던 물건들이 건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까지 확인한 서리스는 혀를 찼다.

부서진 벽에 걸린 액자를 보자 눈앞이 제멋대로 흐릿해지는 게, 여기 있는 물건 중 정신 간섭을 해 오는 것까지 있었던 탓이다.

‘위험도가 높아. 6성쯤은 되겠는데.’

아직까지 마수는 확인 못 했지만, 환경적인 요인만 봐도 위험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아이랑과 크라페에게 합류해야 함을 느낀 서리스는 건물을 빠져나갔다.

“오셨군요.”

아이랑이 돌아온 그를 바라보며 반기자,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크라페 쪽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박쥐를 풀어 알아보았습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마수가 안 보여요.”

“저도 건물 내부를 살펴봤는데 그렇더군요. 환경적인 위험도로만 봐도 6성쯤 되는 거 같고요.”

서리스가 뒤따라 말하자 아이랑은 고민하는 듯하였다.

6성, 서리스야 수많은 기연과 노력으로 올라온 자리이나 이 나이대에 그 정도 수준은 당연히 거의 없다시피 하다.

천재 중에서도 괴물 취급받는 서리스가 6성인 것을 감안하면 아이랑과 크라페는 말할 것도 없었다.

‘크라페는 힘을 숨기고 있는 거라 보지만.’

크라페가 지닌 힘을 눈치채고 있는 서리스는 고민했다.

세계 침식 수준이 그리 낮지 않은 만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중이었다.

자기 혼자라면 모를까, 자칫하면 크라페나 아이랑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

그런 순간 크라페가 코끝을 찡긋하며 말했다.

“지하에 뭔가 있어.”

크라페가 말해오자 서리스가 아이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서리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곤 박쥐를 풀었다.

그러곤 잠시 후, 무언가 발견했는지 그녀는 어깨를 움찔거리곤 입을 열었다.

“지하로 가는 길이 몇 개 있긴 해요. 하지만 녹색 늪 같은 거로 들어가는 길이 전부 잠겨 있어요.”

아까 확인했던 그건가.

‘어쩔 수 없군.’

“그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일단 가 보겠습니까?”

“그러죠.”

여기까지 온 마당.

세계 침식에서 언제는 위험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아이랑이 면사포 아래 당찬 미소를 띠며 지하로 내려가는 길로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가자 아이랑이 말했던 대로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였다.

마치 괴물이 입을 벌린 듯한 구조의 계단이 있는 건물은 특이한 모양이었고, 서리스는 계단에서 일정 부분 채워진 녹색 늪을 보았다.

‘그림자로 청소해 버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생각을 품고 계단을 내려가던 중 서리스는 갑작스럽게 악스판시온의 진동을 느꼈다.

갑자기 의사를 보내온 악스판시온을 보고 의아함을 느낀 서리스가 검을 뽑자, 악스판시온은 한 차례 더 진동하기 시작했다.

“늪에 가져다 대라고?”

악스판시온이 질문에 답하듯 한 번 더 진동하자, 서리스는 의아해하면서도 검 끝을 순순히 늪으로 찔러 넣었다.

어차피 뚫으려고 하던 길이었고, 악스판시온을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이놈이 뭐라도 해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잠자코 악스판시온을 늪에 넣자, 잠시 후 주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리스 님?”

갑작스러운 지진에 뒤에 있던 아이랑이 놀라 자신을 부르자, 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서리스의 눈에 비친 것은 마치 용암처럼 부글거리기 시작한 녹색 늪이었기 때문이다.

“너 뭔 짓을 한 거냐.”

서리스가 급히 악스판시온을 뽑아 들자 놈은 아쉬운 듯 진동하였다.

뭔지는 몰라도 이 녀석이 늪에서 무언가 먹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