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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24화 (123/275)

124화

푸르른 초목 사이로 뻗어진 강 위.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속에 지어진 정좌에는 한 남성이 앉아 있었다.

손에는 백호의 그림이 그려진 손부채를 쥐고, 옷은 도인같이 새하얀 옷을 입은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경치를 구경하는 듯하였다.

“거, 늦게 오는구만.”

그런 순간 그는 대뜸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 혼잣말이 무안해지기 전 저편에서 갑자기 물보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물보라 위에는 한 여성이 우뚝 서 있었다.

목에서 딱 끊기는 짧은 잿빛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아래 현무 모양의 귀걸이가 물에 반사된 빛을 받아 반짝이며 그녀의 중후한 외모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발아래에는 거대한 거북이가 그녀를 열심히 옮기고 있었다.

그 거북이는 천년 이상을 산 영수였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이동 수단에 지나지 않은 듯하였다.

타악!

그녀가 거북이 등에서 도약해 정좌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에도 남성은 부채질을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방석 위에 앉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칭얼거리기는, 본녀라도 와 준 걸 감사히 여겨야 하지 않나.”

“흐으음, 하긴, 다들 원체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긴 하니. 또 어딜 쏘다니고 있는 거겠지.”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사람들은 올 기미가 안 보였다.

“규수단 테르넬의 새로운 단장은?”

“우리 최연소 단장님?”

“그래, 자네가 말하는 그 최연소 단장 말일세.”

“테르넬 성향은 잘 알잖나.”

“또 세계 침식 축제나 벌이고 있는 모양이로군.”

그녀는 혀를 차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는 사이 남성은 부채로 얼굴을 슥 가리더니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 입학생 중에서 월석을 깨트린 아이가 있다던데.”

“이미 본녀가 눈독 들여 놨으니 건드릴 생각 말게.”

“에잉, 악스달에는 이미 같은 펜타니엄 아이가 있잖나. 거기에 마키나 아이까지 데리고 갔으면서 또 눈독을 들이나.”

“그 아이는 개화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네. 그리고 마키나도 본녀가 보기엔 마찬가지고.”

“개화 안 할 아이들을 신나서 데려가려 한 게 누구인데 그러나.”

“전부 테르넬 최연소 단장 때문이지 않나.”

펜타니엄 직계 중 첫째.

전 일곱별에서 검성이라 불렸으며, 현재는 검치(劍齒)라는 별호를 달고 있는 사내.

펜타니엄 락스카.

4학년이 되자마자 규수단 테르넬의 학생 단장으로 활동하고.

졸업 후 곧바로 테르넬의 정식 단장 자리까지 올라 버린 역대 최연소 단장이었다.

“그늘이란 게 참.”

남성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가볍게 혀를 차 보였다.

“여천강, 애초에 플레미아에는 전투와 관련된 아이들은 필요 없잖나.”

여성은 그런 그를 보고 오히려 무슨 욕심을 부리냐며 나무랐다.

여명세가 여천강.

귀수단 플레미아의 단장이자

신의(神醫)라 불리는 사내.

그가 지금까지 살려낸 사람만 해도 강을 이룰 정도라 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창설된 플레미아에서 배출한 최고의 위인이라 불리는 자였다.

“나 정도 되면 오히려 잘 키워 낼 수 있네. 무려 월석을 깨트린 아이라지 않나. 영약만 챙겨 놔도 얼마나 클지 훤히 보이는데 어찌 욕심이 안 나.”

“그러다 노망이 먼저 나지.”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가 자네보다 한참 어리다만?”

“본녀를 화나게 할 속셈인가?”

여천강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는 그녀를 보고 손부채 사이로 웃었다.

위수단 악스달의 수장이자,

월하십강 중 한 명.

독후(毒后) 불터렉스 윈터.

천하오장성인 독왕의 동생 되는 사람이었다.

“나 원, 독으로 피부를 그렇게나 펴게 되면 언젠가는 괴사할걸세.”

“그때쯤 되면 본녀가 자네에게 어떻게든 하라고 소리 칠 테니 각오하게.”

“큰일이구만.”

여천강에게 한마디 쏘아 준 윈터는 팔짱을 낀 채로 가볍게 혀를 찼다.

“애초에 본녀는 그분에 비하면 어린애일세.”

“외형은 그쪽이 가장 어리지 않는감.”

“그래서 억울한걸세. 그놈의 반로환동이 무엇인지. 본녀는 환골탈태라도 도달해 봤으면 좋겠건만.”

그녀는 혀를 차면서도 바라지도 않는 듯 팔짱 낄 뿐이었다.

“그래도 곧 단장직에서 물러나신다던데.”

“퍽이나 그렇겠군. 삼무제로 만족하시면 될 것을, 본녀가 최근에 만났을 때는 무슨 바람이 불으셨는지 천상사성 자리 하나 꿰차볼까 고민하시는 분인데.”

“아래 세대 자리는 왜 그렇게 탐내는 겐가.”

“반로환동으로 젊어지니, 뇌도 젊어져 활기가 샘 솟으니 그렇겠지.”

가볍게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씹은 두 사람은 정처 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성은 어차피 그분 쪽으로 갈 테니. 이번에는 양보하게나.”

“어림도 없네. 자네는 어디 구석 골방에서 본녀의 피부를 위한 의학이나 연구하게나.”

“이거 참 신의라고 불리니, 내가 만만해 보이나?”

“본녀 앞에서 겁을 상실했나 보군. 7성은 본녀가 초저녁에 땐 경지다. 자네 같은 수준은 15명은 있어야 본녀와 비빌 수 있네.”

“이거 참, 어디 한 번 오늘 끝장을 보자고!”

그렇게 정좌 위에서 싸움이 펼쳐졌으나, 그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 * *

크라페, 아이랑과 같은 조가 된 서리스가 처음으로 갈 단은 위수단 악스달이었다.

위수단 악스달.

세계 침식에 의해 파괴된 지역 복구가 그들의 주요 목표이자.

세계 침식을 이용하려는 인간을 상대하는 단이었다.

그런 만큼 대인전에 특화된 자들이 많으며, 세계 침식자와 부딪친 전적이 가장 많은 단이기도 했다.

‘훈련은 아마 대인전 쪽에 맞춰져 있을 거라 보는데.’

세계 침식자와 가장 많이 부딪친 전적이 있는 악스달인 만큼.

운이 좋으면 검은별과 관련된 것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훈련 중에 그런 기회가 생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악스달에는 알리즈가 있다고 했지.’

가는 김에 기회가 된다면 그의 얼굴을 미리 봐 둬야겠다.

전생과 같다면, 알리즈가 세계 침식자와 접촉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렌타인 님이 조금 심통 나시겠는걸요.”

그러는 순간 위수단으로 향하는 도중 뭐가 그리 신났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아이랑이 말했다.

“발렌타인 님이 왜요?”

“그야, 가장 원하던 자리에다가 제가 앉아 버렸으니까요.”

서리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쉽게 말해, 발렌타인 님이 저랑 같은 조가 되고 싶으셨단 거죠?”

“어머, 알고 계셨네요.”

“그야 저도 발렌타인 님이랑 같은 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녀와는 합을 맞춰 보기도 했고, 마음도 잘 맞는다.

적어도 눈앞의 두 사람보다야 훨씬 수월하게 5개월을 보내지 않을까.

“어머, 어머.”

아이랑은 서리스의 대답을 듣고 뭐가 그리 좋은지 면사포 사이로 손을 넣은 채 몸을 찌르르 떨었다.

‘좀 꺼림칙하니 안 저래 줬으면 좋겠다만.’

어쨌든 조용한 크라페와 아이랑과 함께 서리스는 악스달 본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리스가 온다는 연락을 아카데미와 미리 주고받았는지,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입구에 서 있던 악스달 단원은 친절하게 그들이 갈 곳을 알려 주었다.

“서리스.”

그렇게 발을 옮기던 도중, 우연의 일치로 서리스는 알리즈와 마주쳤다.

오랜만에 만난 알리즈는 서리스를 보고 반가운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찾아갈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설마 가는 길에 마주칠 줄이야.

‘마침 잘됐다.’

근황도 물어보고 싶었고.

“무사히 입학했구나. 다행이야.”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은 잘 지내셨나요.”

잘 지냈냐는 물음의 알리즈는 ‘나야 뭐…….’ 하면서 살짝 얼버무렸다.

그 행동이 조금 신경 쓰인 서리스는 그의 얼굴이 이전보다 수척해졌음을 깨달았다.

‘역시 내가 기억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 건가.’

안 좋은 예감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두 사람은 같은 1학년?”

“윌즈베르크 아이랑이라고 해요.”

“그라말테 세라 크라페.”

알리즈가 관심을 보이자, 뒤에 서 있던 둘은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그러자 알리즈는 이들이 동생 친구들이라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도 따라 말했다.

“저는 펜타니엄 알리즈에요. 서리스를 잘 부탁해요.”

다시 봐도 펜타니엄 치고는 참 순박한 알리즈였다.

그래서 서리스가 더 신경 쓰이기도 하는 것이었고.

“알리즈, 또 농땡이 피우고 있는 거야?”

그러던 순간 이쪽으로 오는 발걸음과 함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까지 서리스를 보고 밝아졌던 알리즈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서리스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웨이브 진 은색의 머리칼을 지닌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이는 알리즈와 동갑으로 보이는 그는, 알리즈를 보자마자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실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매일 그렇게 놀면 제자리걸음이잖아.”

“……엑스널.”

대놓고 면박을 주는 그를 보고 알리즈가 중얼거리자, 서리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키나 엑스널.

알리즈와 동갑이자 펜타니엄과는 악연이라 할 수 있는 라이벌 가문.

천상사성 영황(靈皇)의 아들인 마키나의 장남이었다.

“어린 애들이나 붙잡고 있고, 하아, 그래도 나와 같은 오대가라는 게 부끄럽지는 않게 해 줘야지. 오대가 출신이 A반에도 속하지 못하다니.”

그런 말을 하면서 엑스널은 서리스 쪽을 힐끗 보았다.

딱 봐도 보인다.

1학년생인 우리들 앞에서 일부러 그를 깎아내리려는 게.

알리즈도 이런 일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닌지 무어라 반박조차 못 하고 있었다.

‘이 자식이었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서리스는 머릿속에 불이 붙듯 열이 끓어 오름을 느꼈다.

알리즈가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게 된 원인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놈이자.

서리스에게는 과거 소드란 시절, 가문의 지원금을 절반이나 깎아 먹게 했던 원흉.

“너희들도 알리즈를 상대하기보다는 생산적인…….”

“아저씨.”

알리즈의 기를 죽인 것에 만족한 듯 미소 지은 엑스널이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말을 끊은 목소리의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뭔데 알리즈 형님이랑 대화하는데 끼어들어?”

양손을 제복 바지 주머니에 꽂은 서리스는 상당히 불량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들보다 체격이 큰 서리스다.

그건 엑스널 상대로도 마찬가지였고, 위에서 노골적으로 내려보는 서리스는 꽤나 위협적이었다.

“……아저씨? 후배가 선배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아, 내가 좀 그런 규율을 신경 안 쓰는 망나니라서 말이야. 못 들어 봤어? 펜타니엄 셋째는 망나니라고.”

서리스는 네가 어쩔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귀까지 파며 그를 무시했다.

예의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 엑스널은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이 휘었다.

“펜타니엄 셋째면 시험 때 월석을 부쉈다는 놈이 너였구나.”

“그게 뭐 어쨌다고.”

“펜타니엄 사람답네. 예의도 없고 유치하기 짝이 없어. 너나 알리즈나 상대할 가치도 없는 친구들이야.”

코웃음을 친 엑스널은 고개를 홱 하니 돌리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리스는 이죽거리듯 웃었다.

“왜 겁먹었어?”

엑스널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화는 났지만, 그 화에 쉽게 휘둘리는 녀석은 아니란 소리다.

‘쯧, 주먹이라도 날아오길 바랐는데.’

생각보다 감정 조절이 능숙한 놈이다.

서리스는 마음 같아서는 주먹이라도 날려버리고 싶지만, 그래선 저쪽에 명분을 줄 뿐이다.

‘그래도 이걸로 알리즈에게 향하는 관심을 나한테 돌렸으면 좋겠는데.’

저놈이 모욕당하면 담아 놓는 녀석이길 바라야겠다.

그래야 확실하게 조질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서, 서리스.”

“알리즈 형님.”

엑스널을 향한 행동에 알리즈가 당황한 듯 부르자, 서리스는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펜타니엄입니다. 모욕당하면 저놈도 모욕해 버리세요. 형님이 꿀릴 거 전혀 없습니다.”

적어도 알리즈가 속 안에 안 좋은 감정을 쌓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알리즈의 어깨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이제 저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 생기면 말하세요. 저놈 대가리 깨트릴 테니까. 우리 가족이잖아요.”

가족이라는 말에 알리즈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입을 가리며 옅게 웃었다.

펜타니엄에서는 직계 간의 경쟁이 일상인 만큼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는 자들이 없다.

그렇기에 선뜻 가족이란 말을 내뱉어 준 것이 알리즈에게는 크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맞지. 응, 우리 가족이지.”

“거기다가 같은 스승을 둔 사이지 않습니까.”

“고마워. 서리스도 무슨 일 있으면 형한테 말해.”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알리즈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제 헤어질 시간인 모양이었다.

“다음에 또 봐.”

“예, 형님.”

알리즈가 손을 흔들고 뛰어가자 서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부디 알리즈가 버텨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엑스널 그놈을 조질 방법도 찾아봐야겠고.’

소드란 때 알리즈 사건으로 자금 지원이 끊어져 나가던 걸 아직도 몸서리 칠만큼 잘 기억하는 서리스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엑스널 놈은 역시 대가리를 깨버려야 할 듯싶었다.

“서리스 님한테 의외의 면이 있었네요.”

그러는 순간 옆에 있던 아이랑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해 왔다.

그제야 서리스는 둘에게 살짝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불량한 모습은 뭔가요? 망나니 시절 때는 그렇게 다니셨나요? 혹시 소녀한테도 그런 식으로 대해 주실 수 있나요?”

보통이라면 질색할 모습인데 아이랑은 왜 더 좋아하는 것 같은지.

질문 세례를 퍼붓는 아이랑을 보고 서리스는 발걸음을 내뻗었다.

“가자. 크라페, 나 때문에 늦겠다.”

“아, 말 돌리시기는.”

그러면서도 아이랑은 웃으며 뒤를 따라왔다.

“의문.”

그러는 순간 쭉 입 다물고 있던 크라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서리스와 알리즈가 간 방향을 번갈아 보더니 중얼거렸다.

“형제가 크기가 달라.”

“확실히 서리스 님께서 더 크시기는 하시네요.”

‘그게 의문이었던 건가.’

서리스가 키와 체격이 좋은 건 금강잔월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난 아버지 닮고, 알리즈 형님은 어머니 닮은 거겠지.”

물론 서리스는 락로드보다도 큰 편이지만.

그 사실을 두 사람이 알 수는 없으니, 서리스는 대강 얼버무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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