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글라오스는 대가문의 직계들을 잘 안다.
그들의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일반인들과 다른 사고방식이다.
대가문이라는 직계는 절대로 쉬운 자리가 아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나다.
타고난 별.
타고난 육체.
그리고 천재성.
뭇사람의 위에서 군림하는 자.
더불어 사람들을 세계 침식으로부터 지키는 자에 걸맞게 그들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린 대가문 직계들은 다들 한 번쯤 같은 실수를 한다.
세계에서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는 착각.
사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실제로 뛰어나고, 시간이 지난다면 그 말대로 정점에 설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타고난 이들이라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까지 해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특히 세계 침식과 같이 극한의 상황에 몰린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시험이나 대련의 틀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면 더욱 말이다.
또래, 같은 나이대에 비하면 한없이 뛰어난 재능.
일반적인 인간을 상대로라면, 대가문 직계 중 누구나 오만과 방심이라는 감정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글라오스는 오늘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상식이 다른 대가문 직계들에게 있어서 그건 일종에 날 때부터 지닌 공통된 버릇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선입견은.
“큭!”
우습게도 그가 가장 얕보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시험생 대가문 직계에 의해 깨졌다.
몰아치는 검.
쏟아지는 마법.
그 두 가지에 맞서서 글라오스는 필사적으로 장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리스의 검술과 스타리즈의 마법은 글라오스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정도 수준이면 둘 다 A반을 제외한다면, 3학년생한테까지도 꿀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뭔 괴물들이냐.’
글라오스는 눈앞에 두 명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몇십 년간 호흡을 맞춰 보기라도 한 양 전차와 같은 서리스가 전방을 맡고.
각종 마법으로 보조와 공격을 하는 스타리즈가 후방에서 원호하는 식의 역할 배분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행동하고 나서 느껴지는 별은 글라오스가 눈을 부릅뜨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6성.’
재능이 없는 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소위 벽을 넘었을 때를 지칭하는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영역을 이 두 사람은 고작해야 스물이라는 나이에 넘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시험에서 전력을 다하는 꼴이라니.
글라오스는 미래의 이 두 사람이 얼마나 더 강해질지 두려울 정도였다.
“딴생각할 시간 있으십니까.”
한 번 맞받아 치기에도 무겁기 짝이 없는 검을 휘두르는 서리스가 말하자 그는 입술을 짓이겼다.
서리스의 눈에 담긴 흉흉한 살기는 세계 침식에서 몇 년은 굴러야 나올 법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첫 호흡부터 너무 흐트러졌다.’
방심했던 만큼 처음을 놓친 게 뼈아팠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저 두 녀석에게 말리기만 할 뿐.
여기서 다시 페이스를 가다듬어야 함을 확신한 글라오스가 별을 끌어모았다.
이카루나의 특수한 신성검이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마법은 못 막지만, 어둠에 가까운 그림자를 상대로는 최강의 성능을 지닌 신성검이다.
여기서 서리스를 먼저 리타이어 시키기로 마음먹은 글라오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신성검에 모이던 빛이 픽 하고 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짧은 의문과 뒤늦은 사태 파악.
신성검을 통해 빛의 일격을 먹이려던 글라오스의 동공이 한 차례 흔들렸다.
신성검과 이어진 별빛이 마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짧은 충격은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다가왔다.
이 순간을 노리던 서리스의 악스판시온 위로 그림자가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타리즈.”
조용하게 호명한 그 이름과 함께 글라오스의 주위에서 치솟은 검붉은 손들이 그의 몸 곳곳을 붙잡았다.
붙잡히는 순간 체력을 갉아먹는 마법인 듯 그는 체력이 후욱 빠져나가 기진맥진해짐을 느꼈고.
그 때문에 눈앞에서 휘둘러지고 있는 서리스의 검을 막을 여력은 없었다.
“하, 씨발.”
오랜만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는 자각했다.
오만한 건 자신이었고, 그 오만함 덕에 평생 잊지 못할 자기보다 5살이나 어린 녀석들에게 패배했음을 말이다.
금강귀명도(金强晷銘刀)
오식(五式)
일도(一刀)
곧이어 글라오스를 향해 그어진 그림자가 마구를 박살 냈고, 그 충격에 그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결국 한 번도 기회를 잡지 못한 글라오스가 허무하게 쓰러지자, 시험생들은 의아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간단했다.
마성과 펜타니엄 직계의 활약을 기대했던 것에 비해 거의 못 보고 시험이 끝났기 때문이다.
“상대가 너무 약했던 거 아니야?”
“조교를 잘못 배치했나.”
앞에서 있었던 시험에 비해 너무 간단히 결과가 나왔으니, 그들이 의문을 가질 법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같은 시험 조교들은 경악하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글라오스는 앞에서 말했듯 수문장이라고 불린다.
대가문과 소가문 직계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많은 데다가, 그 명성만큼이나 실력도 있다.
그런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저놈 언젠가 큰코다칠 줄은 알았는데.’
‘아무리 시험생을 상대로 방심하기는 했다곤 해도.’
스타리즈와 서리스의 실력은 규격 외였다.
자신들도 저 둘을 상대로 처음부터 방심 안 하고 맞서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할 그런 수준.
그런데도 정작 둘은 이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 반응하고 있었다.
“와, 니 뭐고! 마지막에 검으로 쓱싹하는 거 완전 멋있었다 아이가! 나 내 마법에 이래 잘 맞추는 아 첨 봤다.”
싱글벙글 웃는 스타리즈가 다가와 서리스의 등을 팡팡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고 서리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누구보고 재능 있다고 추켜세우는 거야?’
진짜 재능 같은 거로 똘똘 뭉쳐 빚어 만든 듯한 녀석이.
서리스는 마법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아니나 어떤 원리인지는 알고 있다.
마법은 별의 천칭을 의도적으로 기울여 힘을 빌려 오는 것이다.
그러나 스타리즈의 천칭은 일반적인 상태와 다르게 항상 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별은 그가 바라지 않아도 항상 힘을 빌려주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마법의 재능.
별을 부르고자 영창 혹은 스크롤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마법사와 달리 스타리즈는 그런 과정조차 필요 없었다.
‘나는 그간 경험으로 쌓아 온 판단 능력이 있지만.’
아까 전 그와 자연스레 호흡을 맞추었던 서리스조차 당시를 돌이켜 보면 황당할 지경이었다.
앞을 나아가서 검을 휘두르는 한 번, 한 번에 맞춰 적절하게 마법을 썼다.
물론 서리스도 거기에 맞추기는 했지만.
그는 서리스와 같이 최흉에서 굴러 본 경험이 있지 않음에도, 마치 몇 년을 함께 지낸 전우처럼 매우 수월하게 호흡을 맞춘 것이다.
스타리즈는 그야말로 난 놈이었다.
‘이런 재능이라서겠지.’
서리스는 기억 속 스타리즈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이런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이타적이었던 그.
‘그래서 마냥 싫어하지 않는 녀석이고.’
조금 시끄럽긴 하지만 말이다.
서리스가 대련장에서 내려오자 이바드라 및 일곱별들은 놀란 눈으로 스타리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언뜻 보면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다.
일곱별들은 전부 기억한다.
자신들을 바라보던 스타리즈 특유의 공허한 눈빛을.
그들이 스타리즈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마성도 눈치챈 거겠지.’
이바드라는 서리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워너힐 아카데미에 가장 영향을 끼칠 인물이 누구일지.
“15번째 시험 제나디아 도로시 그리고 그라말테 세라 크라페.”
그 순간, 때마침 도로시와 크라페의 차례가 왔다.
서발광에게 잘하라며 응원받은 도로시는 앞으로 걸어가다 돌아오던 서리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러곤 배시시 웃으며 브이 자를 그려 보이자, 서리스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지 확신했다.
“도로시, 잘하려나.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랑 협력해 본 적 많이 없는데.”
서리스가 다가오자 서발광이 걱정하듯 말했다.
그러나 서리스는 도로시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챘기에 오히려 조교를 동정했다.
“협력이 문제가 아닐걸.”
서리스는 대련장 위 도로시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만약 조교 중 어느 사람도 도로시의 힘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이번 15번째 시험은 자기보다도 더 빠르게 끝날 것이다.
‘어째 힘을 숨기는 두 명끼리 묶이긴 했는데.’
한쪽은 아직도 꼭꼭 숨기고 있고.
다른 한쪽은.
콰앙!
이제 숨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다.
“저, 저게 뭐야.”
“마수?!”
여기저기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서발광 또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모인 대련장 위에는.
새빨간 꼬리와 비늘.
그리고 화려한 붉은색 깃털 날개를 등에 펼친 도로시가 서 있었다.
마왕화.
타인 앞에서 늘 자신의 힘을 숨기던 도로시가.
드디어 제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로시가 마왕화를 꺼내자마자 주위는 삽시간에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옆에 있던 크라페 또한 평소 나른 표정을 잊고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고.
동시에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악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너 서리 마탑주의 딸이야?”
가문비기 중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비기.
마왕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이 세계에서 단 한 핏줄밖에 없었다.
“본적도 없는 아저씨를 아빠라 부르기 싫긴 한데.”
도로시는 비늘이 생긴 주먹을 쥐고 사태 파악을 못 한 조교를 바라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그렸다.
“이제 무적 도로시라 특별함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거든!”
“……이상한 애.”
도로시와 만난 지 얼마 안 된 만큼 그녀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크라페에게 그녀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확실한 건 알 수 있었다.
마왕화를 한 도로시가 강하다는 것 하나만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