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세계 침식자와 싸우는 것.
앙켈니우스에게 그 말이 나왔을 때부터 시험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세계 침식자가 어떤 존재던가.
그들은 공포의 존재이자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 혹은 하다못해 월하십강 정도는 돼야 싸워 볼 수 있는 괴물들이다.
그런 녀석들과 싸우는 것이라니.
시험생들이 납득하기에는 너무 황당한 시험 내용이긴 했다.
세계 침식 조력자인 광견과 싸워 본 서리스 입장에서는 더욱 말이다.
“세계 침식자 역할은 여기 조교들이 해 줄 것이다. 이들은 일정 이상의 피해를 주면 부서지는 무구를 착용했다. 눈치챘겠지만, 이를 파괴해야 합격이다.”
시험의 합격선을 말해 준 앙켈니우스는 곧 씨익 하니 웃음을 지었다.
“조교는 전원 졸업생들이니. 제군들은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졸업생.
미개척 지역에서 워너힐 아카데미 일원으로 몇 년이나 먼저 굴러 본 선배들이 세계 침식자로서 맞선다.
그것도 수상쩍은 무구를 두르고.
‘쉽지 않겠는데.’
일곱별과 같은 이들이라면 몰라도 졸업생을 상대로 일대일로 괜찮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번 시험은 2인 1조로 치르게 될 거다. 상대는 지금까지의 성적을 보고 수준에 맞게 짜놨으니, 우선 제군들은 앞으로 30분 동안 자기 조원을 확인해라.”
잇따라 이어진 말과 함께 하늘 위 조원이 적힌 화면이 떠올랐다.
2인 1조라는 말에 서리스도 자기 조원이 누군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었고.
곧 그는 자기 이름 옆에 적힌 인물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 녀석이랑 나를 붙여?’
그의 옆에 있는 이름은 다름 아닌.
차기 새벽 마탑주 마성 스타리즈였다.
* * *
서리스가 자기 이름을 확인하던 때.
자기 상대를 확인한 한 남자는 짙은 황색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어제까지 세계 침식에서 구른 뒤, 조교로 차출된 그는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글라오스, 사람들 앞이야. 표정 좀 풀어.”
“꼬맹이들 상대하라고 끌려 나왔는데, 어떻게 푸냐.”
짜증 난다는 말투로 말한 그는 버릇처럼 입술을 손으로 잡아 늘이곤 말했다.
“것보다 내 상대 뭐냐? 펜타니엄이라는데. 얘, 락스카 단장 동생이야?”
“직계라니까 맞겠지.”
“허어, 그 인간 동생이라.”
펜타니엄 락스카.
졸업생 중에서도 압도적인 실력자이자, 규수단 테르넬에서 최연소 단장으로 활동 중인 그다.
졸업생 중에 그의 명성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그런 락스카와 한때 같은 학년이었던 글라오스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동생이라 하니,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왜 이놈이랑 마성까지 붙여 놨냐? 얘, 일곱별이잖아.”
“그래서 너한테 맡긴 거야.”
글라오스는 하 하고 기가 막힌 소리를 내뱉더니 눈을 빛냈다.
“애들 기강 다질 겸. 조져도 상관없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감독관님이 말했어.”
“이야, 날뛰는 것도 허락해 주시다니.”
킬킬거린 그는 입가를 손으로 스윽 닦았다.
졸업생들 사이에서 ‘사자’라 불리는 글라오스가 오랜만에 먹잇감을 발견한 듯 두 눈을 빛냈다.
하지만 정작 그 눈빛을 받는 서리스는 다른 곳에 신경이 팔린 채 떨떠름함을 느끼고 있었다.
‘스타리즈랑 한 팀이라니.’
앙켈니우스는 수준에 맞는 상대를 골라 놨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스타리즈가 힘을 합쳐야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나온다는 소리와 같았다.
혹은 자신의 수준을 너무 과소평가했을 수도 있지만, 무려 졸업생이다.
‘이거 암만 봐도 빡센 상대가 나오겠는데.’
스타리즈와 힘을 합쳐야 쓰러트릴 수 있을 상대가 말이다.
“요오, 니랑 내 같은 팀이더라.”
서리스가 고민에 빠져 있는 찰나 어느샌가 스타리즈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보아하니 늦잠을 잔 모양인지 머리카락이 눌려 있는 그는 하핫 하고 가볍게 웃었다.
“잘됐다. 아이가. 내 니한테 관심 좀 많았는데. 이왕 팀 된 거 우리 잘 지내 보자잉.”
그는 살갑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살가움 너머에 있는 서리스에 대한 호기심을 전혀 지우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자신의 마법을 꿰뚫어 본 사람은 오직 서리스 한 명뿐.
당연히 그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천하태평.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리즈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사실 매우 드문 이야기다.
그의 눈은 언제나 공허하다.
적당히 살갑게 다가와 주긴 하나, 거기에는 진심이 없다.
그 증거로 그는 항상 인식 저하 마법을 사용하고 다녔다.
그런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딱 한 명.
정말로 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자, 바로 검성 펜타니엄 샬롯이었다.
그러나 어제 그에게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다.
펜타니엄 서리스.
뛰어난 능력과 더불어 그가 높게 치는 샬롯과 남매인 사내.
본래 아버지의 명령으로 흥미 없이 워너힐 아카데미에 응시한 그였지만.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인식 저하 마법을 꿰뚫어 보는 서리스와 마주치며 그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이래 관심 가는 것도 오랜만 아이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스타리즈를 보며 서리스는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왔어. 마성, 나랑 미리 호흡 좀 맞춰 놓자.”
“어, 호흡 말이가?”
하지만 이어진 서리스의 말을 듣고 스타리즈는 눈을 깜빡이었다.
스타리즈가 머릿속에 예상한 것은 그와 라이벌처럼 누가 먼저 조교를 쓰러트리는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거였다.
그러나 한없이 진지한 서리스는 그런 치기 어린 짓 따위 조금도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야, 뭔데.’
스타리즈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여지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서리스의 재능은 샬롯과 비견될 정도다.
일곱별들 중 어느 누구도 꿰뚫어 보지 못한 인식 저하 마법을 알아챈 시점에서 그의 재능은 남들과 궤를 달리했다.
그리고 그러한 천재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오만.
자신이 천재이기에 가지는 오만이라는 자신감.
스타리즈가 보기에 그런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남을 시기하는.
즉, 패배를 겪고 힘들어하는 자는 천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범인의 눈에서 뛰어난 자일 뿐이지, 진짜 천재가 보기에는 그들 또한 범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지금 서리스가 하는 행동은 그런 점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내랑 같은 20살 아이가?’
한창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기에 가장 적합한 나이.
하물며 대가문이라는 틀에서 자라난 직계는 그러한 특성이 매우 강하다.
시기마다 거처를 옮기는 새벽 마탑주의 차기 후계자로서 스타리즈는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야가 하는 거는 범인 아들이 하는 방식인데.’
잠시 동안 볼을 천천히 검지로 두드리던 스타리즈는 곧 미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이거, 더 관심이 간다.
언제나 무채색같이 보이던 공허한 세계가 서리스를 중심으로 색이 입혀지는 느낌.
벌써부터 재밌다.
“좋지. 어디 같이 함 짜 보자. 기왕 하는 거 1등 해야 하지 않겠나.”
1등이라는 건 늘 따라오던 거라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오랜만에 1등이란 걸 해 보고 싶어졌다.
싱글벙글 웃는 스타리즈를 보며 서리스는 따라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얘도 정상은 아니구만.’
스타리즈가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눈치챈 채로 말이다.
천재라곤 하나 아직 20살, 그에 비하면 다양한 사람을 겪어 본 서리스는 스타리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여타 다른 천재와 같은 오만함은 기본이고, 세상을 오직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는 자.
‘어떻게 천재들은 하나같이 귀여운 맛이 없냐.’
이바드라 정도만 돼도 귀여운 수준으로 봐주겠는데 말이다.
그러는 사이 서리스의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기 조원을 찾아갔다.
어제 시험으로 인원이 또 절반 이상 준 만큼 조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리스 무리 내에서도 같은 조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발렌타인과 아이랑.
그리고 도로시와 크라페가 있었다.
저 멀리 보니 이바드라와 뇌성 또한 같은 조원이 되어 있었다.
‘이래저래 잔뜩 묶였네.’
서발광은 2차를 붙은 사구룡과 함께 조원이 되었다.
참고로 서리스 팀 귀족 두 명은 진작 떨어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발렌타인과 아이랑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면식은 없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
하지만 발렌타인은 어째서인지 아이랑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서리스에게 그녀가 다가서면 괜스레 마음이 술렁거렸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이랑은 발렌타인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독왕의 손녀라죠.’
일곱별에 속하지 않았지만, 발렌타인의 실력은 일곱별 못지않았다.
오히려 독왕이 싸고돈다는 소문이 있기에 뽑히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서리스에게 가진 감정을 아이랑은 명백히 눈치채고 있었다.
“불터렉스 발렌타인 님이시죠?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
그걸 눈치채는 건 간단했다.
서리스와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웃음꽃을 피우던 그녀였으나, 지금은 너무도 무표정했으니까.
자칫 했다간 차갑다고 느낄 만큼 무감정한 기색에 아이랑은 면사포 너머에서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일곱별 말고도 동년배 사이에 재미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생각하며.
“그럼 지금부터 3차 시험을 시작하겠다.”
시험생들이 각자 자기 조원을 찾아 이야기를 마쳤을 때쯤.
시험감독관 앙켈니우스가 시간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손에 든 종이를 가볍게 눈으로 훑고는 주머니에 넣어 둔 뒤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첫 응시자는 불터렉스 발렌타인, 그리고 윌즈베르크 아이랑. 두 제군은 대련장으로 올라오도록.”
발렌타인과 아이랑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걸어가자 그런 둘을 본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암성이다. 처음부터 일곱별이라니.”
“발렌타인이면 독왕의 손녀지? 예쁘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대련장 위로 오르자, 앙켈니우스는 뒤쪽에 눈짓했다.
그러자 조교로 서 있던 여성 한 명이 대련장 위로 올라왔고, 그녀는 둘을 마주 보며 가볍게 인사를 하였다.
“각수단 로렐라이 단원 델리스 미키입니다.”
“세계 침식 전문으로 유명한 로렐라이 분이시군요.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자라나는 새싹분들을 상대할 기회를 얻어 영광입니다.”
신사적인 미키를 보고 미소 지어 준 아이랑은 발렌타인을 슬쩍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녀를 보니 그녀의 안 좋은 버릇이 또 스리슬쩍 머리를 들이밀어 왔다.
“그럼 아카데미 졸업생이신 선배님께서 하나 평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평가라 하면?”
“여기 있는 소녀와.”
아이랑은 면사포 아래 미소와 함께 발렌타인을 가리켰다.
“발렌타인 님, 누가 더 뛰어난지요.”
미키가 한 차례 긴 속눈썹을 깜빡이었다.
눈앞에 맹랑한 소녀가 무슨 꿍꿍이를 품은 건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기 싸움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발렌타인 님은 어떠신가요?”
“……?”
그리고 상황을 이해 못 한 건 발렌타인도 마찬가지였다.
잿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리며 고개를 기울인 그녀는 아이랑이 한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뛰어난 사람 곁에는 뛰어난 사람이 있는 게 맞겠죠.”
곧이어 그녀의 해석을 도와주듯 아이랑이 말을 던졌다.
면사포를 살짝 넘긴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거기에는 마치 루비를 하나하나 공들여 깎은 듯한 선홍빛 눈동자가 있었다.
눈꼬리가 조금 휘어져 여우 같은 상인 그녀는, 곱디고운 외모로 진한 눈웃음을 흘리곤 대기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스타리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리스가 있었다.
발렌타인에게 있어서 어딘가 기분 나쁜 그 눈동자는 또다시 그녀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능력을 한 번 증명해 보고자 하는 거죠.”
“……서리스 님은 상관없지 않나요.”
“과연, 그럴까요.”
아이랑이 면사포를 내렸다.
그러면서 보랏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머리카락을 귀 너머로 넘기곤 미키를 돌아보았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으음, 네. 미래의 후배분들이 원하신다면야.”
깊게 관여하고픈 마음은 없었던 미키는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시험 시작.”
그리고 때마침 앙켈니우스가 첫 번째 시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앙켈니우스의 목소리 사이로 발렌타인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조용하게 울려 퍼진 그녀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옅은 적의가 실렸다.
“저도 지고 사는 성격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녀의 주위에서 새하얀 수만 개의 유리 조각이 폭풍우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