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붉은이리의 전 용병 단장 잔루크.
붉은이리 용병단은 한때 래빗 마을을 중심으로 한바탕 크게 해 먹던 용병단이었다.
붉은이리의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지레 겁먹었고, 어느 누구나 용병단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잔루크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행복함은 얼마 가지 않았다.
래빗 마을에 나타난 한 남자에 의해 박살 났으니까.
사내는 이유는 몰라도 오팔하임을 찾고 있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옷.
이제야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는 워너힐 아카데미 지망생처럼 보였다.
그 당시 붉은이리 용병 단원들은 겁이 없었다.
세상이 전부 자기 것처럼 보인 그들은 그가 귀족임을 눈치챘음에도 건드렸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대학살이었다.
그림자를 다루던 그는 붉은이리 용병단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 결과 용병단은 괴멸했다.
잔루크는 억울했다.
그를 건드릴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용병 단원 관리를 소홀히 했을 뿐.
하지만 그는 기어코 붉은이리 용병단의 뿌리를 뽑았고, 자신을 건드린 것에 대한 응징으로 잔루크의 왼쪽 눈을 앗아갔다.
그 일 이후, 붉은이리 용병단은 해체되었다.
단원 대부분이 죽은 탓에 더 이상 용병단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쏟아 일구어 낸 용병단을 하루아침에 잃은 잔루크는 그날로 미쳐 버렸다.
펜타니엄인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나가던 마법사에게 거액을 주고 마법을 배웠으며.
매일같이 검을 단련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래빗 마을 최강의 용병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듣고 말았다.
펜타니엄 직계가 이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드디어 왔다.”
오팔하임이 접근을 금지하는 사당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보았다.
사당 밖으로도 치솟는 그림자의 모습을.
그걸 보자마자 그는 별의 힘을 빌리기 시작했다.
마법이란 별의 천칭을 기울여 거기서 흘러나오는 별빛을 빌려 오는 것.
그가 별을 기울여 만든 마법은 거대한 화염구였다.
“불타 죽어라!”
사당에 떨어진 화염구가 연소하며 사당을 불태웠다.
직계가 이걸로 죽지 않을 건 않다.
아니, 오히려 죽지 않아야 한다.
그 빌어먹을 놈을 협박해서 다시 래빗 마을로 오게 하려면.
반드시 펜타니엄 직계를 인질로 잡아야만 했으니까.
타득, 타닥.
불똥이 튄 나무들이 불타는 소리와 함께 화염 구에 의해 생긴 연기 사이로 두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은 황금의 방패를 두른 남자.
다른 한 명은 잔루크가 노린 대로 그림자를 다루는 펜타니엄 직계였다.
“잘됐다. 너 실험 쥐 좀 돼라.”
실험쥐라는 말을 듣자마자 잔루크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 귀족 놈들이 다 이렇지.’
그놈과 같이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그 오만 때문에 저놈은 자기 손에 죽을 것이다.
‘그 오만함을 내가 박살 내 주마.’
귀족을 상대로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다음 마법을 이미 준비해 놨으니까.
‘큰놈이다.’
마법사에게 거액을 주고 산 마법 강화 스크롤.
‘한 장뿐이지만.’
그는 주머니 속 스크롤에 별빛을 부어 넣었다.
무려 딱 한 번 5성급 마법을 쓸 수 있는 스크롤이다.
‘방어하려 해도 절대로 못 하게 해 주마!’
부욱!
그 즉시 스크롤을 찢으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 번개 줄기가 튀며 창 한 자루가 나타났고.
잔루크가 창을 내던지고자…….
파직, 콰앙!
하려던 순간, 뒤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한순간 이명에 휩싸인 잔루크는 비틀거리더니 이내 그 눈을 커다랗게 떴다.
‘폭, 발했다?’
그곳에는 잔루크가 사용했던 뇌전의 창이 폭발해 있었다.
설마 스크롤이 잘못된 것인가.
그 마법사가 자신을 속이고 불량품을 판 건가?
멍한 표정을 지었던 그의 눈에 서리스가 들어왔다.
새까만 검을 하늘로 들어 올린 서리스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러게.”
잔루크는 서리스에게 뭔 짓 했냐고 묻고 있지만, 어안이 벙벙한 건 서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잔루크가 마법을 쓰고자 별의 힘을 빌리려는 순간.
서리스의 감각에 전에 없던 감각이 포착됐다.
하늘에서 무언가 잔루크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서리스가 반사적으로 악스판시온을 들었다.
그 순간 그 무언가는 향하던 방향을 꺾어 악스판시온에게 날아들었다.
악스판시온은 그게 날아들자마자 입을 벌려 삼켜 버렸고.
곧이어 잔루크의 마법이 폭발해 버렸다.
‘……이거 설마.’
서리스의 눈동자가 악스판시온에게 고정되었다.
타인의 별빛을 흡수하는 검.
별이란 모든 이에게 있어 원초적이다.
세계 침식자마저 검은별의 힘을 사용하고 있으며 별이 없으면 약해진다.
물론 요치아와 같은 경지에 이른 이는 내부에 있는 별만으로도 괴물 같은 이들도 있으나.
내부에 잔존 하는 별을 다 써 버린다면 그저 육체가 강한 무인일 뿐인 것이다.
‘별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을 상대로 응용 가능하잖아.’
얼마 전 제로가 그림자로 상대의 별을 흡수했다는 건 들었긴 하지만.
이건 그것보다도 근본적으로 더 위험한 검이었다.
잔루크의 마법이 중간에 끊긴 것만 봐도 그렇다.
천칭을 기울여 별빛의 힘을 빌려 쓰는 마법사들에게 악스판시온은 정말 최악이라 여겨지리라.
‘명장이라더니.’
정말 괴랄한 물건을 만들어 놓았다.
세계 침식자들에게도 악스판시온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존재이리라.
하지만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의 단점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배가 부른 듯 악스판시온은 더 이상 별빛을 먹고 싶지 않은 양 기척을 죽였다.
악스판시온은 아까 전 서리스가 제압한다고 쏟아 낸 별빛을 먹은 뒤였다.
그런 와중 방금 전 별빛을 삼키고, 마지막으로 배가 다 차 버린 것이다.
‘총량이 있다.’
무한대로 별빛을 삼킬 수 있는 건 아니란 소리.
‘이건 나랑 연관 있는 건가?’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느낌이 온다.
이 검에 별빛을 먹이면 먹일수록 점점 그 총량도 늘어날 것이란 걸.
마치 서리스가 지닌 검은별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검이 성장한다는 소리잖아.’
서리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별로 만들어진 검이라서일까, 성장하는 검이라니 난생처음 본다.
그런데 락로드는 어째서 이 검을 버린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또 검은별이라서라는 이유가 덧붙여질 것 같았다.
세계 침식자를 상대하기에 유용한 검이지만, 반대로 세계 침식자라면 대처할 수 있는 검이기도 했다.
결국 원재료는 검은별이니.
하지만 반대로 세계 침식자인 자신이 다루게 된다면?
악스판시온의 가능성이 서리스의 머릿속을 크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기연을 얻은 셈 아닌가?
락로드가 이 사실을 알고 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금 서리스 상황에 딱 맞는 검이었다.
“젠장, 젠장, 이래서는 그놈, 칼릭스 놈을 끌어낼 수가.”
악스판시온을 보고 있는 사이 마법이 끊긴 탓에 당황을 많이 한 잔루크가 횡설수설했다.
‘칼릭스?’
그 내용을 놓치지 않고 들은 서리스는 눈을 찌푸리곤 바닥을 박찼다.
채엥!
그 순간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잔뼈 굵은 용병답게 서리스의 기습적인 공격을 잔루크가 맞받아친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힘에서 밀리는 듯, 그는 검을 맞댄 상태로 한두 걸음 물러섰다.
“썩을, 그래, 내가 언제부터 마법사였다고! 덤벼라! 펜타니엄!”
“너 칼릭스랑 무슨 관계냐?”
칼릭스의 이름을 듣자마자 기분이 팍 식었다.
서리스를 암살하려 했던 전적이 있는 칼릭스는 서리스 입장에서 적이다.
가뜩이나 워너힐 아카데미를 재학 중인 그일 텐데.
또 어떤 수작을 벌여 놓을지 몰랐다.
“관계? 원한 관계다! 개새끼야!”
용병답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용병의 별을 담은 그는 필사적으로 서리스와 맞부딪쳤다.
그러나 반면에 서리스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림자 무사와 싸우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도 걸리지 않았으리라.
‘5성 코앞까지는 온 모양인데.’
잔재주가 많아서 그렇지, 실력은 있다.
천재는 아니나 범재 중에서는 난 놈.
청랑단에 데려간다면 쓸 수 있을 수준이다.
‘나이는 삼십 대 초중반인가? 이 정도 검에다가 마법까지.’
서리스의 눈동자에 흥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놈, 이거 꽤 쓸만한 놈 아닌가?’
펜타니엄 직계를 공격할 정도로 강한 뚝심과 원한.
거기에 행동력.
워너힐 아카데미로 들어가면 서리스는 당분간 행동의 제약이 생길 것이다.
듣기론 1년 정도 세계 침식을 막아 내기 위한 카드로서 극한까지 몰아세우듯 육성시킨다고 하니까.
실제로 워너힐 아카데미 1년의 훈련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자들이 여럿 있다고 한다.
‘즉, 1년 동안 나는 바깥 사정을 알 수 없어.’
정보처가 천랑후 말고는 없는 서리스에게 있어서 다른 귀가 필요했다.
쿠웅!
“크학!”
서리스가 잔루크의 배에 주먹을 정확히 꽂아 넣자, 그는 침을 토해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는 분한 듯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이를 갈았고, 서리스는 그런 잔루크 앞에 다가가 섰다.
그 순간 서리스에게서 별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강렬한 별빛이 눈앞에서 쏟아지자, 잔루크는 숨이 턱 하니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갈고 닦은 모든 것들이 그 별 앞에 한 번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괴물이다.
고작해야 약관이 막 되었을 어린애에게서 이런 별이 느껴지다니.
‘대가문 놈들은 다 이런 것인가?’
상식이 모조리 뒤바뀌는 느낌이었다.
“네 이름은.”
“……잔루크다.”
서리스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잔루크가 고개를 떨군 채 대답했다.
대가문 직계를 건드렸다.
분명 이대로 목이 날아가 버리겠지.
“잔루크, 칼릭스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몰라도 그놈이 밉나?”
뜻밖의 질문이 오자, 잔루크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런 그와 눈을 마주친 서리스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 개새끼 밉거든. 그 개자식한테 암살당할 뻔해서.”
마치 용병처럼 걸걸한 욕설을 내뱉자 잔루크의 눈이 커졌다.
“너랑 나. 좀 잘 맞는 거 같지 않냐?”
히죽 웃은 서리스를 보자마자 잔루크는 깨달았다.
용병 생활로 다져진 오랜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거,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고.
“그러니 우리 손 잡는 건 어때?”
서리스는 안짱다리 자세로 쓰러진 잔루크 앞에 앉았다.
그러곤 입술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같은 원수를 둔 동지로서 말이야.”
날 도우면 칼릭스에게 복수할 수 있다.
그 의사를 확실하게 전한 서리스를 보고 잔루크는 양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대뜸 바닥에 머리를 쿠웅 박으며 서리스에게 외쳤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어차피 그에게 뒤는 없었다.
눈앞에 상대는 자신보다 강자.
하물며 대가문 펜타니엄의 직계.
직계를 습격한 이상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고.
인생에서 하고 싶은 건 찬란했던 과거를 박살 냈던 칼릭스에게 복수하는 것밖에 없었다.
“좋아.”
말 잘 듣는 개는 환영이지.
서리스의 얼굴 위로 떠오른 악의 넘치는 미소는 오늘도 그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