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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05화 (104/275)

105화

서리스는 사고가 정지했다.

분명 끝없는 초롱에 갔다던 락로드가 왜 여기 있을까.

지금 자기가 환영을 보는 게 아닐까.

그런 여러 가지 의문들이 머리를 관통하고 있을 때, 서리스를 보고 있던 락로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셋째더냐.”

서리스와 본 지가 한참 되어서일까.

그가 묻듯이 말을 꺼내자 서리스는 흠칫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펜타니엄 서리스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서 흘러나오는 중압감이 서리스를 옥죄었다.

10성

세계를 통틀어 정상이라 할 수 있는 락로드에게서 흘러나오는 패도적인 기운은.

눈앞에 앉아 있는 이가 거대한 산과 비견될 만한 ‘초월자’라고 느끼게끔 했다.

‘소드란 때 느꼈던 중압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때와는 다르게 별을 느낄 수 있어서일까.

락로드가 얼마나 급이 다른 괴물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식은땀이 맺힌다.

검제인 요치아는 고요함 속에 힘을 숨기고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지만.

락로드는 자신의 힘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기에 더더욱 고개를 쉽사리 들 수 없었다.

“됐다. 앉아라.”

한참 서리스를 보던 락로드가 입을 떼자 겨우 기운이 물러갔다.

아무래도 그를 살펴본 듯했다.

곧 서리스는 그의 말에 따라 조심스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칠흑 같은 흑색의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얼굴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리스와 큰 차이가 없었다.

환골탈태라는 무인에게 있어서 바라 마지않는 것을 겪은 만큼.

그에게는 젊음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서리스와 차이가 있다면 눈빛.

너무도 차갑고 무감정한 그 눈은 락로드가 사람이 아닌 마치 별과 같은 차원이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게 할 정도였다.

‘저 눈빛은 여전히 소름 돋아.’

서리스는 전생에도 락로드를 보았던 일이 손에 꼽는다.

그는 존재만으로 펜타니엄을 지탱하고 있다.

업무는 부가주에게 대부분 맡겼던 만큼 세간에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락로드가.’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

여러 의문이 있었지만, 무감정한 락로드의 눈에서 서리스는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었다.

“……별을 잡아먹었나.”

“예?”

이어진 말을 듣고 서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뜬금없이 별을 잡아먹었냐니?

“대답할 거 없다. 오늘 온 건 릴리스의 부탁으로 너를 한 번 봐 두기 위함이었으니까.”

‘어머니가 한 일인가.’

아내인 만큼 유일하게 락로드와 연락을 하는 그녀이다 보니.

아카데미 가기 전에 자식 얼굴 한번 보라고 재촉이라도 한 모양이다.

일단은 서리스가 보기에도 최근 자신의 행보는 이례적이었으니.

‘샬롯이 락로드에게 백귀명을 배운 것처럼.’

릴리스 입장에서는 아버지인 락로드가 뭐 하나 노력한 상이라도 주기를 바랐겠지.

서리스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을 때 락로드가 입을 열었다.

“광견을 쓰러트렸다고 들었다.”

“아, 바르크 가주님을 조금 도왔을 뿐입니다.”

“그건 상관없다. 어땠지?”

뜬금없는 물음에 서리스는 입을 열려다 닫았으나,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제 부족함을 깨달을 뿐이었습니다.”

부족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기연을 잡아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이겨 내기엔 아직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솔직하게 부족함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서리스를 보고 락로드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군.”

다른 아이들은 형제들을 말하는 걸까.

서리스는 락로드와는 말을 섞어 본 적이 거의 없어서인지, 그의 말 한마디마다 긴장되었다.

사색하는 락로드를 서리스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팔하임이라는 곳이 있다.”

서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서리스도 알고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곳에 너에게 도움 되는 물건이 있을 거다. 가는 길에 들러 찾아 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락로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 버렸다.

숨 막혔던 순간이 겨우 끝나자 서리스는 기다랗게 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닦았다.

뜬금없는 락로드와의 만남은 그에게도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오팔하임.’

워너힐 아카데미로 가는 길에 있는 어느 한 사원의 이름이다.

서리스가 이 사원의 이름을 아는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서 샬롯이 20살이라는 나이에 6성이라는 경지에 오르며 세상을 경악시켰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검성의 시대였다.

‘샬롯이 오팔하임을 찾은 이유는 락로드가 해 준 이야기 덕분이었나?’

어쩌다 보니 샬롯의 기연을 빼앗게 된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이었다.

그건 그렇고 자신도 이렇게나 기연을 잡아먹고서야 6성에 올랐는데.

순수 재능만으로 20살에 6성에 오르는 샬롯은 대체.

‘나도 19살에 오르긴 했다마는.’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니 서리스는 그러려니 했다.

지금에 와서 남의 기연 빼앗는다고 죄책감 느낄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기연이란 기연은 다 잡아먹어야 할 판이었으니.

‘조금 이르긴 하다만.’

아무래도 좀 더 빨리 청랑단을 떠나야 할 듯싶었다.

아직도 꿈결같이 느껴지는 락로드와의 만남을 뒤로한 서리스는 그렇게 결심했다.

* * *

락로드와의 만남이 있고 난 후, 서리스는 예정을 앞당겨 빠르게 떠날 준비를 마쳤다.

오팔하임은 워너힐 아카데미를 가는 길에 있긴 하지만, 예정에 없던 새로운 일정이 생긴 만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짐은 다 챙겼어?”

“응, 도로시 것도 여 선배분들이 잘 챙겨 주셨어.”

서발광의 말에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다행이군.

도로시는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만큼, 가장 걱정이었으니 말이다.

락로드를 만나고 바로 다음 날 움직이다 보니, 아무래도 좀 어수선하긴 했다.

“신기하게도 출발하는 날이 딱 1월 1일이네.”

그러는 사이 서발광이 짐을 든 채 작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서리스를 포함한 53기는 스무 살이 되었다.

5년.

서리스가 회귀 빙의를 한 지도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이다.

“시간 정말 빠른 거 같아.”

“그러게나 말이다.”

챙겨 온 짐을 마차에 넣은 서리스는 청랑단 건물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도 참 오래 지냈다.’

그렇기에 그는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청랑단을 꽤 많이 떠올릴 것 같았다.

“으으, 직계니임, 나 머리 아파.”

“그러게. 너무 먹지 말랐잖냐.”

그러는 순간 도로시가 이마를 감싼 채 통증을 호소하며 다가왔다.

스무 살이 되기도 했고, 청랑단에서 마지막 날인 만큼 서리스 일행은 술을 마셨다.

윌리엄이나 다트론도 새해인 만큼 제한을 모두 풀어 준 데다가, 환송을 위해 선배들도 잔뜩 몰려온 탓에.

대대적인 술판이 벌어진 것이었다.

물론 서리스야 이미 술이 익숙하니, 새삼스러울 필요가 없었지만.

도로시는 처음인 만큼 즐거운 분위기에 주체를 못 하고, 신나게 마셨던 것이다.

덕분에 숙취로 지금 저 꼴.

마차를 타는 동안 토는 안 했으면 좋을 지경이었다.

“서발광, 너는 괜찮아?”

“응, 별로 아무렇지 않은데?”

서리스는 제 주량을 의식해서 굳이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발광은 선배들이 워낙 예뻐하는 데다가 성격도 온순한지라 주는 대로 다 마셨었다만,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긴, 술도 일종에 독이긴 하니.’

서발광이 금강잔월을 익힌 만큼 전부 해독해 버린 것이리라.

“가 버리는구나.”

그사이 아카펠이 서리스가 짐을 옮기던 마차로 다가와 쓴웃음을 지었다.

서리스와 같이 술을 마셨던 만큼 아카펠도 숙취로 고생인 듯 꽤나 핼쑥한 모습이었지만.

숙취가 도로시만큼은 아닌 모양이었다.

“너야말로 어젯밤에 애니쉬아랑 중간에 가 버렸잖아.”

“윽.”

찔리는 게 있는지 아카펠이 서리스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이다.

“서리스, 너야말로 클로나 선배님이랑 잠깐 나가지 않았어?”

이야기를 돌려 볼 속셈이 뻔히 보이는군.

서리스는 어젯밤 일을 잠시 떠올렸다.

소란스러운 파티에서 술을 몇 잔 마신 서리스는 오랜만에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새삼 또다시 성인이 되었다는 기분이 묘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맛있네!”

“과일주라는 거야. 도로시, 너무 먹지는 마라. 내일 숙취로 죽는다.”

“더 줘! 아니, 다 가져와!”

처음 술을 먹고 신난 도로시를 보며, 한바탕 난리 속에서 웃고 있었을까.

서리스는 자신에 어깨 쪽에 슬쩍 기댄 사람을 보았다.

“서리스 청랑호법님.”

그녀는 다름 아닌 클로라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잠시 바람을 쐴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클로나를 따라 밖으로 걸어 나오자 쌀쌀한 겨울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취기 탓인지 서리스는 시원하니 기분이 좋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으응, 있지.”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던 클로나가 눈웃음을 지으며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그윽하게 젖은 그녀의 눈동자와 취기가 올라온 붉은색 볼은 클로나의 매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쯤에서 서리스는 회상을 멈췄다.

“별일 없었어.”

정말로 별일 없었다.

그 뒤로 클로나가 술을 조금 과하게 마신 것 말고는 말이다.

아카펠이 미심쩍은 눈으로 보긴 했으나, 서리스가 웃어 보이자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활쟁이.”

그런 순간 도로시가 아카펠 앞으로 다가왔다.

어제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만큼 서발광이 걱정스레 보고 있자 도로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키고 있어. 다녀올게.”

그리고 이어진 말을 듣고 아카펠은 곧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응, 다녀와.”

환한 웃음을 지은 아카펠을 보고 도로시는 칫 하고 소리 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달리 표정이 풀려 있었다.

“잘됐다.”

“그러게.”

안도하는 서발광을 보며 서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 멀리 발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서리스 형!”

그는 제로였다.

급하게 뛰어온 듯 숨을 고른 제로는 허리를 당차게 펴더니 외쳤다.

“내년에는 나도 입학할 거니까!”

이젠 서리스를 따라 워너힐 아카데미까지 목표로 하기 시작했나 보다.

그동안 가장 크게 성장한 건 어찌 보면 제로일지도 모르겠다.

과거 샬롯의 그늘 아래 눌려 살던 그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험에나 붙어라.”

“하, 나 제로야. 워너힐 입학시험 따위야 껌이지!”

호언장담하는 제로를 보고 서리스는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려 주었다.

이러나저러나 제로에게도 정이 쌓인 서리스였다.

“우리 간다.”

서리스는 배웅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마차 문을 열고 올랐다.

뒤따라 오른 서발광이 마차 문을 닫자 그는 아쉬운 듯 말했다.

“선배들도 좀 일찍 일어나서 배웅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카펠과 제로 말고는 아무도 안 나왔기 때문일까.

볼멘소리하는 서발광을 보고 있던 서리스의 눈동자가 창문에 닿았다.

그러곤 끝내 그는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서발광, 도로시, 밖을 봐봐.”

두 사람이 의아함을 품고 창문 쪽으로 붙은 순간 거기에는 청랑단 전원이 나와 서 있었다.

“셋 다 잘 가라!”

“워너힐 아카데미 붙으라고!”

“서리스, 서발광, 도로시! 한 번 청랑단은 영원한 청랑단이야!”

일렬로 서서 커다랗게 외치는 선배들을 보고 서발광이 울컥한 듯 눈물을 훔쳤다.

“진짜 청랑단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곳이었어.”

서발광의 말에 도로시 도 어딘가 아련한 표정으로 작게 웃곤 창문 밖으로 거세게 손을 흔들었다.

“직계님, 나 막 가슴이 아려.”

“그거 숙취야.”

“아닌 거 같은데.”

힝 하고 눈물을 닦는 도로시를 보고 서리스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기대에 부응하자고.”

두 사람은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워너힐 아카데미로 첫출발.

그렇게 성인으로서 서리스의 새 출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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