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청랑단으로 무사히 돌아온 서리스는 치료를 받곤 방에 앉았다.
늦은 밤.
광견과의 일이 있었던 만큼 서리스도 다른 이들과 같이 피로했지만,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카펠과 대화해야 할 일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광견에게서 얻은 힌트가 아직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어도 경지가 모자란 게 한이네.’
떠올린 것을 곧바로 시험해 보지 못한단 것에 서리스는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꼈다.
‘힌트를 얻은 게 어디냐만.’
괜히 욕심부리지 말자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
아니나 다를까,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서리스는 방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아카펠이 서 있었고, 그는 서리스를 보곤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서리스, 밤늦게 미안. 몸은 좀 어때?”
“멀쩡하지. 청랑단이 치료 지원 하나는 끝내주잖아.”
오를레와 협업하고 있는 만큼.
청랑단의 치료 인력은 매우 수준 높다.
그렇기에 서리스도 광견에게 당했던 걸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 몸에 남은 피로감은 광견의 환상계 마법에 당했던 여파였다.
“들어와.”
청랑호법에게 지급된 개인 숙소인 만큼 방에는 서리스밖에 없었다.
“커피 한 잔 타 줄까.”
“밤늦었잖아. 잠 못 잘라.”
“하긴, 애들은 커피 마시면 좋을 게 없지.”
장난스레 웃은 서리스는 아카펠이 앉은 침대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커피 대신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내밀자 아카펠은 감사하며 받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침묵이 흘렀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조용함은 두 사람에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도로시가 없으니 조용하네.”
아카펠이 말하자 서리스도 긍정했다.
도로시는 그렇다 치고.
서발광도 겉보기보다 말이 많고 감정이 풍부한 편이기에.
둘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조용한 두 사람이었다.
“아카펠, 너도 처음 볼 때는 꽤 호전적이었는데 말이지.”
“아, 16살 때잖아. 어렸다고.”
과거 이야기에 아카펠이 살짝 부끄러워진 듯 주스를 열심히 홀짝였다.
16살이라고 해 봤자, 곧 20살이 될 것을 감안해도 불과 4년 전이니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하긴, 10대와 어른은 시간 가는 게 다른 법이니.’
서리스는 자신과 아카펠의 4년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카펠이 오늘까지 해 왔을 고민이 더 크다는 것도 안다.
“아카펠, 너는 워너힐 아카데미를 지망하지 않았지.”
서리스가 본론을 꺼내자, 아카펠이 주스를 마시던 손을 스르륵 내려놓았다.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곧 서리스를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이었다.
“미안.”
“뭐가?”
대뜸 건네는 사과에 서리스가 의문을 표하자, 아카펠은 눈을 피했다.
“끝까지 같이 가지 못해서.”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나.
“사람마다 자기 갈 길이 있는 법이잖아.”
“아니, 그런 거랑은 좀 다를 거야.”
그리 말한 아카펠의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광견 때부터 시작해 아직까지 내리고 있는 비는 창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겨울비다 보니 눈이 될 법도 하건만.
비는 열심히 창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서리스 너도 그렇고, 도로시도, 서발광도 다들 빛나. 아직은 괜찮지만, 나는 언젠가 그 빛에 잡아 먹힐 거란 걸 알아.”
“아카펠, 그건.”
“맞아. 꽤나 패배주의자적인 마음가짐이지. 하지만 서리스, 나는 너희 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싶지 않아.”
아카펠이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은 순간 서리스는 입을 닫았다.
아무리 자신의 감정 컨트롤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사람의 감정은 마모된다.
질투, 시기와 같은 감정은 언제나 사람을 몰아세우고, 끝내 옆 사람을 미워하다 자기혐오에 이르니까.
아카펠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세 사람과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나 좋았고, 그 감정을 평생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츰 깨달았다.
세상은 너무 넓고, 자신은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며, 세 사람의 곁에 있으면 언젠가 그 좋았던 기억마저 쓰라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두렵다.
무섭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한심했다.
더 노력하지 않고 왜 그런 걸 걱정하고 있냐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건 잔혹하다.
세 사람에 비해 아카펠은 차츰차츰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워너힐 아카데미에는 너희와 같은 빛나는 녀석들이 수많이 있을 거야. 나는 솔직하게 자신이 없다.”
아카펠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내뱉고 나니 자신 스스로가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카펠.”
그리고 서리스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돌리기 두려웠다.
서리스가 자신을 한심하게 보지 않을까 하여.
“인생이라는 건 엿 같은 일의 연속이야.”
뜬금없는 욕설에 아카펠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게 가는 길목마다 죄다 굴곡져 있고, 경사도 있어서 참 쉽지 않아.”
“그, 렇지?”
“그래서 가끔씩 걸려 넘어져. 일어나는 법도 아는데 왜인지 설 수가 없어.”
서리스 자신이 그랬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서리스는 소드란의 힘을 되찾는 걸 포기했다.
그냥 받아들이고, 이게 내 인생이구나 하고 납득했다.
“일어나도 또 넘어질 거 같으니까. 그게 참 두려워. 자빠질 때마다 살갗이 까져서 더럽게 아프니까.”
그래서 다시 서는 놈들이 대단한 거다.
몇 번이고 넘어져도 또 일어나는 그런 인간들이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꼭 그런 놈들만이 사는 건 아니다.
“근데 넘어져서 쉬는 것도 의외로 꼭 나쁘지만은 않아.”
본디 평범한 사람은 넘어져 다치면 다시 걷는 게 아니라 쉬어야 하는 것이다.
다리의 상처가 나아야 통증이 없고, 더 잘 달릴 테니까.
그래야 또 넘어지는 일이 줄어 들 테니까.
“확실하게 쉬고, 확실하게 회복하면 그때야 보이는 것도 있어. 어른들이 괜히 앞만 보고 달리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거든.”
작게 키득거린 서리스는 오래전의 나날을 추억했다.
소드란의 힘을 되찾고자, 운명을 바꾸고자.
서리스도 미친 듯이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한 번 넘어지고 나니 도저히 일어나지를 못하겠더라.’
자신이 말한 대로 조금 쉬기도 하면서 달렸다면 더 오랫동안 달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지금 너에게 그 시기가 온 거라 생각해.”
자신을 추슬러야만 하는 시기.
그 시기가 아카펠에게 왔다.
“그러니까 괜찮아.”
네가 어떤 생각을 하던.
어떤 선택을 하던.
“우리는 널 버리지 않아. 아카펠, 네가 우리를 소중히 여겼듯이 우리도 그럴 거니까.”
“……낯간지럽네.”
“때로는 이런 말도 해 줘야 하는 법이야. 사람이 늘 가볍기만 하면 매력 없거든.”
서리스를 보고 아카펠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카펠은 쫓아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쫓아 오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 법이다.
“언젠가 도로시도 서발광도 아카펠 너와 같은 선택을 하는 날이 올 거야. 물론 나도.”
인생의 굴곡이란 건 그런 법이니까.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순간은 온다.
그리고 다들 거기서 선택해야 한다.
“난 나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은 널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건.”
“그래, 너에게 별건 아닐지라도 내게는 대단해.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서리스에게는 이런 걸 털어놓을 사람도 없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컸다.
자신이 넘어졌다는 이야기는 부끄럽고, 선뜻 꺼내기도 힘들기에 많은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그래, 넌 암살까지 당할 뻔했었으니까.”
아카펠이 어딘가 이해하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다른 부분으로 이해한 모양이다만.
서리스가 회귀하기 전 일이긴 해도 과거의 서리스는 몰락한 망나니였다.
‘저런 부분으로라도 이해해 주면 좋은 거겠지.’
자신이 만약 샬롯과 같았다면 아카펠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살고 보니 몰락한 망나니 시절이 도움되는 날도 있었다.
“아카펠은 청랑단에 남을 거지.”
“……그래, 나 청랑호법이 되고 싶어. 나중에는 단주도.”
“될 수 있을 거야. 잘 어울리거든.”
아카펠은 팀원 간 조율을 굉장히 잘한다.
실제로 서리스가 청랑호법이 되고 나서 자유분방한 도로시와 소극적인 서발광을 이끈 것도 아카펠이었으니까.
그는 청랑호법이 돼서도 굉장히 유능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서리스,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내 몫까지 해 줘.”
“개판을 만들어 줄게. 그러고 나서 ‘칸빌레 아카펠이 부탁한 일이다.’라고 한마디도 해 주고.”
“그랬다간 천하의 악당이 될 거 같은데.”
이야기를 마친 아카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
“별말씀을.”
서리스가 어깨를 으쓱이자 아카펠은 잠시 웃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도중 그는 문뜩 말 안 한 게 있었다는 듯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 애니쉬아 선배랑 사귄다.”
“어?”
“그냥 그렇다고.”
아카펠의 돌발 선언에 서리스의 몸이 굳었다.
그러는 사이 아카펠은 이미 방 밖으로 나가 버렸고, 서리스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하긴, 여자 중 도로시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애니쉬아이니 아카펠이랑도 접점이 많기는 했다.
‘저놈 저거, 애니쉬아랑 헤어지기 싫어서 워너힐 아카데미에 안 간다고 한 거 아니야?’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 서리스는 안도했다.
연인이란 건 넘어졌을 때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 줄 테니까.
“내가 할 소리냐만.”
살아온 인생이 곧, 연인이 없었던 나날들과 같았으니.
그쪽으로는 아카펠보다 뒤진 서리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날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 * *
그러나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왜?”
“못 따라갈 거 같아서.”
“왜? 왜 그러는데. 난 그런 거 싫어.”
아카펠은 도로시와 서발광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했다.
서발광은 당연히 잘 납득해 주었지만, 도로시는 도저히 아카펠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지 못했다.
“난 이 세 명이랑 같이 가고 싶어. 활쟁이 네가 빠지는 거 싫다고!”
평소 자유롭기는 해도 남이 하는 이야기는 잘 들어주었던 도로시가 오늘따라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녀는 화가 난 표정으로 아카펠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카펠은 예상외로 거센 반응에 난처해했다.
제나디아 가문 내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지 못했던 도로시는 53기 그리고 청랑단에서 저만의 안식처를 찾았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의 인연은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관계였다.
평생 없었기에 너무 소중했던 것이다.
“서, 서리스.”
그 사실을 눈치챈 서리스는 아카펠이 도움의 눈길을 보내왔지만,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미안하지만, 저것만큼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알아서 해.”
절대 애니쉬아랑 사귄다고 해서 괜히 매몰차게 구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서리스도 일이 있었다.
펜타니엄에서 워너힐 아카데미 건으로 사람 한 명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직계가 대가문을 떠나는 길인 만큼 이런저런 절차가 필요했다.
‘생각해 보니 회귀한 후 락로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나.’
문뜩 떠오른 생각과 함께 서리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맘때 락로드가 끝없는 초롱에 들어가 있단 건 알고 있긴 하다만.
어째 아버지란 인간이 아들 학교 들어간다는데 얼굴 한번 보러 와 보지도 않는다.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아니긴 한데.’
락로드는 본래도 펜타니엄 일에는 그다지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펜타니엄 일 중 대부분은 부가주인 검왕이 대리로 처리하고 있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부가주도.’
본적 없구나.
하긴, 다들 바쁘니까.
서리스는 그러려니 하며 펜타니엄에서 온 손님을 위해 청랑단 대접실을 찾았고.
곧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을 깨달아야 했다.
대가문 펜타니엄 가주
천상사성(天上四星)
검황(檢皇)
펜타니엄 락로드
그가 대접실 소파에 앉아 서리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