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또 한 번 염주가 깨져 나간다.
불길도 뚫고 휘두르는 광견의 권격을 내지르며 끊임없이 몰아쳤지만.
그때마다 염호는 너무도 가볍게 광견의 공격을 물렸다.
오히려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그에게서 쏟아지는 열기가 광견의 피부를 익혀 버릴 정도였다.
뜨겁다.
열기로 인해 숨이 막히고 머리가 제대로 안 굴러갔다.
화염 속 절대로 무너지지 않은 호랑이는 그렇게 죽어 가는 자신을 고요히 노려보고 있었다.
“개, 개, 겍!”
다 타 버린 성대에서 비틀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염으로 몇 번이고 불타 버렸던 안구가 다시금 빛을 받았다.
광견은 알고 있다.
자신의 공격이 염호에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멸천화륜과 환상계 마법은 본디 상성이 좋지 못했다.
바르크 가문의 사람들은 제 몸에 똬리를 튼 멸천화륜의 기운 덕분에 외부에서의 침입에 강한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계 공격에도 강한 것이 바르크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이바드라부터 노렸다.
세계가 아직 자신이 일곱별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염호가 주의를 기울이기 전 이바드라부터 납치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말았다.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불의 장막은 세계 침식까지 써서 각성한 광견조차도 뚫을 수 없었다.
외통수.
두 개의 머리는 이미 불타 버리고 없었다.
그에게 있어 남은 건 염호의 검에 목이 잘리는 것뿐이었다.
“끝이다.”
불길 속에서 흘러나온 염호의 목소리가 광견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 말 그대로 염호의 검 위 주홍색의 태양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닿는 즉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듯한 태양.
이전 친선 대결에서 이바드라가 보여 주었던 태양과는 차원이 다른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태양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숲이 불타오른다.
광견의 피부도 똑같이 익어 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듯한 기분과 함께 광견이 움직였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그의 눈동자는 절망이 아닌 생에 대한 갈망으로 불탔다.
그리고 이윽고 태양이 떨어져 내리고, 광견의 두 다리가 바닥을 박찼다.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
언뜻 보기에는 마지막 발악 같았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날벌레처럼 네발로 미친 듯이 달리는 광견의 모습은 염호에게도 그리 느껴졌다.
멸화를 향해 직접 내달리다니.
자살이란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광견은 무모했다.
파직! 쨍강!
광견이 태양 속으로 사라진 순간 염주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부신 광채에 뒤덮인 광견은 피부와 근육이 모조리 불타는 것을 느꼈다.
아프다.
미칠 듯이 아프다.
그러나 광견의 손은 꿋꿋이 합장했다.
한 손은 위로, 또 다른 손은 아래로.
두 손이 맞닿은 순간, 광견이 부여받은 검은별의 힘이 속에서 꽃을 피웠다.
세계 침식
광견이 자기 몸에 직접 세계 침식을 사용해 버린 것이었다.
세계 침식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로서, 본래의 세계와 단절된다.
물론 그것은 침식 직후에 아주 짧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위기의 순간, 딱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던 그는 전력으로 도약했다.
멸화의 빛으로 인해 무언가를 인식하기에는 힘든 상황.
자신을 끝장내고자 염호가 쓴 큰 기술 덕분에 광견은 목숨을 부지할 기회를 얻었다.
저쪽은 어차피 자신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질 거라 생각 중일 테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광견은 멸화를 뚫고 불의 장막까지 내달렸다.
‘다음에는 무조건 이거 이상으로 되돌려 주마.’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분노를 삼키며 광견은 불의 장막으로 손을 뻗었다.
세계 침식으로 인해 짧게 세상과 단절된 지금, 불의 장막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막을 수는 없다.
지금의 자신을 붙잡으려면 딱 하나.
하나.
‘하나?’
“어디 가냐?”
광견의 머릿속에 스쳐 간 단어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
그리고 눈앞에 정확하게 날아들고 있는 새까만 그림자 검.
처음부터 둘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눈을 떼고 있지 않았던 서리스가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의문을 가질 것도 없었다.
놈과 자신은 같은 검은별을 지녔으니까.
멸화 속에서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저놈도 느꼈을 테니까!
세계와 단절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같은 검은별의 힘을 지닌 자.
펜타니엄 서리스.
코 앞이었다.
불의 장막만 나간다면 환상계 마법으로 자취를 감추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단 0.1초라도 머뭇거려서는 그사이에 단절이 끝나 버릴 테니까.
“고작 너 따위가!”
코앞까지 다가온 검을 보며 광견이 할 수 있는 것은 울부짖는 것뿐.
서걱!
다 타 버린 성대로 내지른 마지막 목소리와 함께 광견의 마지막 남은 머리가 선명하게 잘렸다.
탁.
데구르르르. 화륵!
굴러간 머리와 함께 의지를 잃어버린 육체가 불의 장막 속에 쓰러지며 타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리스는 불길 속에서 일렁이는 검은 것을 보았다.
여느 때와 같다.
서리스가 손을 뻗자 일렁이던 기운은 그대로 흡수되었다.
무려 7성급 광견이 지니고 있던 검은별의 힘.
“윽.”
자신에게 흘러들어 오고 잠깐 주춤거렸던 서리스는 한 차례 숨을 돌렸다.
“펜타니엄 서리스!”
그 순간 서리스가 달려 나간 탓에 뒤늦게 따라온 이바드라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의 뒤에 따라온 염호가 광견이 멸화 속에서 도주를 시도했다는 것을 깨닫곤 놀라 눈을 찌푸렸다.
“미안하군. 뒤처리를 맡기다니.”
염호는 불의 장막을 거두며 서리스에게 사과했다.
진중함이 담긴 그의 얼굴은, 이바드라가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인걸요.”
“무모했다!”
이바드라가 솔직하게 말하자 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마따나 서리스의 몸 상태는 광견과 맞붙느라 엉망이었다.
지금도 무리해서 짜낸 힘이었고, 비교적 외곽이었다곤 하나.
염호의 멸화의 여파가 있는 곳을 내달린 탓에 여기저기 화상으로 욱신거렸다.
방금 광견의 힘을 흡수한 덕에 조금은 상처가 치유되긴 했으나.
이걸로도 다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서리스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훌륭했다. 과연 이 몸을 한 번 꺾은 상대답다.”
그리 말하며 이바드라는 서리스에게 조개 모양의 약을 건넸다.
“발라라. 화상에 좋은 약이다. 응급대처 정도는 될 거다.”
“고마워.”
서리스가 화상 약을 받자 이바드라는 큼 하고 소리 내더니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아카데미에서 복수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떠나서.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됐으니.
그 입장에서는 조금 무안할 만도 하리라.
“둘 다 일단 돌아가자꾸나.”
그런 서리스와 이바드라를 보며 말한 아그닐이 걷기 시작하자 둘은 곧장 그 뒤를 따랐다.
그 뒤 서리스는 청랑단과 주홍빛 기사단에 무사히 합류했다.
장물아비가 정리된 뒤, 가장 문제였던 망자들이 해결되었고.
광견의 잔당을 쓸어버린 청랑단 덕분에 주홍빛 기사단도 무사할 수 있었다.
“직계님, 나 이상한 고목 변태 할아범이랑 막 이렇게, 이렇게 싸웠다니까!”
“도로시, 알겠으니까. 귀에 대고 말하지 마.”
망자지기였던 장물아비를 쓰러트린 것을 열심히 자랑하는 도로시를 보며 서리스는 두통을 느껴야 했지만 말이다.
분명 만만치 않게 다쳤던데 왜 이리 팔팔한 것인지.
“도로시.”
보다 못한 서발광이 그녀를 데리고 질질 끌고 가자, 도로시가 아쉬운 듯 조잘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도로시를 보며 서리스가 안도하던 사이, 그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사람을 보았다.
그녀는 이바드라의 연인이었던 셀링이었다.
“펜타니엄 서리스 님, 이바드라 님의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 벌이나 했을 뿐입니다. 염호 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둘 다 죽은 목숨이었는 걸요.”
“그 시간 벌이가 중요했었으니까요. 이 은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갚겠습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셀링을 보고 서리스는 이바드라 쪽을 바라보았다.
주홍빛 기사단을 확인하는 아그닐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이바드라의 표정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언젠가 바르크를 책임져야 하는 이바드라.
그에게 있어 바르크 아그닐은 어떤 존재일까.
적어도 마냥 행복한 부자 사이는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이바드라한테 잘해 주세요.”
서리스가 말을 툭 던지자 셀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습게도 천재랑 둔재는 때론 비슷한 걸 겪어 보기도 하거든요.”
천재와 둔재는 분명 너무나 다르지만.
둘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독함을 지니고 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서리스는 아직 어린애인 이바드라에게 셀링이 중요하다고 말해 주었다.
“펜타니엄 서리스 님.”
그러자 무언가 알아차린 듯 셀링이 눈썹을 좁혔다.
“이바드라 님은 둔재가 아닙니다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하는 셀링을 보며 서리스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그래, 천재이기 이전에 사람 복 하나는 타고난 놈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리스는 발을 돌렸다.
그 뒤로 청랑단은 바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부상자를 옮겨야 했기도 했고.
이 이상 국경 산속에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맙군. 이번 일에 관한 사례는 우리 쪽에서 잘 챙겨 주겠어.”
윌리엄이 대표로 인사를 하자 염호는 감사를 표하며 주홍빛 기사단을 이끌고 몸을 돌렸다.
서리스는 떠나가던 이바드라와 눈이 마주쳤지만, 두 사람 다 별말 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보게 될 것임을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발광, 도로시, 아카펠.”
돌아가는 길. 서리스는 자신의 옆에서 걷는 세 사람을 불렀다.
세 명이 의아함을 품고 다가오자 서리스는 제 뜻을 전했다.
“내년 봄, 나는 워너힐 아카데미로 갈 거야.”
“아, 맞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도로시가 제일 먼저 신나 하며 말했다.
그녀는 냉큼 서리스 옆에 다가와선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시험에서는 직계님도 안 봐줄 거니까 그리 알아.”
“내가 할 소리야. 서발광 너는?”
“서리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서발광이 미소를 지어 보이자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나 한 명에게는 대답이 없었다.
자연스레 그 시선이 아카펠에게 모이자 그는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서리스, 돌아가면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래.”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고.
그렇기에 서리스는 덤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사람의 인연에는 제각기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조용히 상기한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