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선명하게 짓이겨진 가슴팍.
반쯤 갈려 버린 양팔.
튀어 오른 핏물.
검은 달이 추락하며 터져 나온 충격의 여파에 휘말린 광견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광견조차 서리스가 전력을 다한 일격을 정면에서 맞아 낼 순 없었던 탓이다.
“하, 하하학! 크흥!”
그러나 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직 자신은 팔팔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주룩주룩 흘러나오는 핏물에도 불구하고 광견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정면으로 받아?’
광견이 한 것은 방어하기 위해 양팔을 모았을 뿐.
세 개의 별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공격했음에도 광견은 쓰러지지 않았다.
“계속, 계속, 계속이다!”
오히려 불이라도 붙은 듯 포효하더니, 이내 또다시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가슴 근육을 부풀렸다.
육체의 강함을 추구하는 서리스가 보기에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기에, 자연스레 눈살을 일그러트렸다.
‘그걸 맞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터프한 것도 정도껏 하지.’
팔과 가슴에서 쏟아지는 핏물 사이로 근육 줄기가 튀어나와 상처를 틀어막아 버렸다.
저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연거푸 환상계 마법을 걸면 반드시 후유증이 있을 텐데도.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순간 광견의 하울링이 뚝 끊겼다.
놈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고,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이바드라가 말해 준 두 번째였다.
“이거 참, 아프잖나. 사람을 이렇게 막 베서 쓰나.”
‘새빨간 개 머리를 달고 있는 놈이 사람은 무슨.’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기운에 서리스가 긴장하자, 광견은 양손을 천천히 모았다.
한 손은 아래로.
한 손은 위로.
이어 합장을 하듯 두 손을 맞댄 순간, 그의 손 위로 새까만 염주가 둘렸다.
“그럼 당한 만큼 갚아 줘야겠지.”
그 순간이었다.
서리스의 가슴팍에서 갑자기 강렬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커흑?”
입에서 뭉클하고 핏물을 쏟아낸 서리스는, 자기 몸이 광견의 상처와 똑같은 꼴이 된 걸 깨달았다.
‘이게 환상계 마법?’
느껴지는 통각이 전부 뇌리로 꽂히고 있는지라, 환상인 것을 알아도 머리가 깨닫지를 못했다.
화륵!
그 순간 서리스의 손아귀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바드라가 심어 주었던 멸천화륜이었다.
불길이 피어오르자, 확실히 환상계 마법이 조금 와해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바드라의 말대로 멸천화륜은 환상계 마법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뿐.
그가 자신 없어 했듯이 완전히 없앨 수준은 아니었다.
‘광견은 검은별을 쓰고 있다.’
검은별은 기본적으로 세계 침식의 힘이다.
세계 침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정신에 피해를 주는 것이 가장 많다.
‘환상계 마법과 세계 침식의 정신 간섭을 합친 거다.’
그래서 이바드라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환상계 마법이 파훼되지 않는 것이었다.
실수다.
이래선 이바드라라도 광견이 숲 전체에 걸어 놓은 환상계 마법을 뚫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즉, 여기서 나갈 방법은 광견을 쓰러트리는 것밖에 없다는 소리와 같았다.
“딴생각도 많군.”
서리스가 사태를 파악한 순간, 그의 고개가 흠칫하고 들려졌다.
숲을 무너트리며 세차게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는 홍수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들, 근처에 홍수가 일어날 정도로 범람할 만한 강은 없다.
당연히 저 또한 환상계 마법이라는 소리.
서리스는 이바드라의 불꽃을 꽈악 쥐었다.
이바드라의 불꽃은 어둠 속을 나아 갈 수 있는 등불.
남은 건 그 등불로도 비추지 못하는 어둠을 집어삼켜야 한다.
‘환상계 마법에 깃든 건 결국 세계 침식이다.’
검은별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가.
무엇이든 흡수해 버리는 게걸스러운 식탐이다.
그런 생각이 일치하듯 검은별이 입을 벌리며 어둠을 꾸역꾸역 흘리기 시작했다.
“좋아.”
이바드라가 준 등불을 쥔 채 서리스는 환상 속 홍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짧게 심호흡하고 그 눈을 감았다.
콰가가가가가가각!
숲을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홍수 속.
서리스는 고요함을 찾았다.
요치아에게 배운 검.
검은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만병지왕이라 불린다.
딱 한순간.
그 찰나를 노리면 될 터다.
이윽고 홍수가 서리스를 집어삼키는 그 순간.
서리스의 눈이 떠졌다.
“여기다.”
서걱!
휘두른 검 앞에 홍수가 갈라지고, 발아래 그림자가 홍수에 깃든 세계 침식을 집어삼켰다.
“뭐?”
한순간에 벌어진 상황은 광견조차 당황하게 했고, 서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약했다.
‘내가 집어삼킨 세계 침식을 그대로 돌려 주마.’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삼식(三式)
흑월귀참(黑月歸斬)
반월 형태의 새까만 검기가 합장하던 광견과 부딪쳤다.
그러자 검기에 당한 광견은 부서지듯 깨져나간 세 개의 염주 알을 보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젠장, 검은별을 한껏 응축시키고 광견의 힘까지 빼앗아 휘두른 검기였는데.’
광견은 그걸 염주 알 몇 개 희생하는 거로 막아 버렸다.
‘저 염주에도 환상계 마법이 걸려 있나.’
보아하니 아까 흑월락 때도 염주 알 몇 개가 부서진 듯 개수가 줄어 있었다.
‘이쪽은 금강잔월이 있음에도 체력과 별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데.’
반면 상처 입긴 했지만, 상대는 아직 수가 많이 남아 있어 보였다.
“하, 동문인 녀석이라 생각해 살려서 잡아가려 했건만.”
“너랑 내가 왜 동문이야.”
“같은 주인분들을 따르는 자가 어찌 동문이 아니겠느냐.”
검은별을 보고 저렇게 말하는 건가.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광견을 보며 서리스는 혀를 찼다.
물론 서리스는 저놈이 착각하든 말든 고쳐 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저 말을 함으로써 광견이 더 이상 자신을 봐주지 않을 거란 걸 인식할 뿐.
‘저기서 더 강하게 나온다면 아무리 나라도.’
광견과의 격차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저쪽이 어느 정도 봐주고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할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
그래서 서리스는 그럴 때 끝내려 했건만.
“이제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염성이라도 데리고 가야 할 시간이니까.”
그것도 쉽게 가능하지 않았다.
‘제왕월영도를 쓴다면?’
서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2년간 요치아에게서 제왕월영도를 배워 온 서리스지만, 아직도 미숙했다.
요치아가 미완성이라 했던 그 수준조차 서리스는 아직 모두 익히지 못했고.
하물며 제왕월영도를 휘두르는 힘을 자신이 견디지조차 못한다.
별도, 육체도 아직 제왕월영도를 제 마음대로 사용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것이다.
‘이바드라 때와 같은 대련이야 상관없었어.’
생사결을 논하는 자리도 아니고.
실패한다 한들 위험은 없었다.
그렇기에 미완성인 제왕월영도라도 서리스는 연습 삼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광견이다.
‘내가 쓸 수 있는 제왕월영도는 딱 한 번.’
만약 제왕월영도를 썼다고 해도 그 일격으로 광견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거기에 더해 제왕월영도를 광견이 피해 버리기라도 한다면?
‘뒤가 없다.’
풀 컨디션도 아니고 지금 상태로 제왕월영도를 쓰는 순간 별도, 몸도, 한 줌의 힘조차 남지 않을 거란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당장 숲에 걸린 환상계 마법도 해결 못 한 마당이다.
이바드라를 믿지만, 세계 침식의 힘이라면 내 힘이 필요했다.
“그러어니이까!”
그러는 사이 떨어지는 빗물 사이로 광견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놈은 또다시 분노로 일그러진 눈을 한 채 바닥을 박차고는 그대로 돌격해 왔다.
“잡생각이 많다고!”
쾅! 쾅! 쾅!
주먹을 맞받아칠 때마다 그 충격에 골까지 울려왔다.
아까 전 광견의 가슴에 새긴 상처는 이제 근육으로 덮여 완전히 아물어져 있었다.
반면에 서리스 쪽은 환상계 마법을 완전히 물리지 못한 여파로 가슴에서 여전히 시큰거리는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크흥, 재밌는 걸 보여 주지!”
통증으로 한순간 몸의 반응이 늦은 틈을 타 광견의 주먹이 서리스의 턱으로 날아왔다.
정면으로 맞으면 머리가 날아갈 일격이다.
서리스가 가까스로 고개를 틀어 그의 주먹이 턱을 스쳐 지나가자, 충격파가 일어났다.
비틀거린 서리스가 턱이 부러진 게 아닐까 하는 기분으로 손을 그쪽으로 옮긴 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
턱 아랫부분이 횅하니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비어 버린 턱을 보자, 광견의 남은 염주가 더더욱 새까맣게 빛났다.
“하학! 인체 소실은 인식하는 그 순간부터 뇌가 반응한단 걸 알아?”
아래턱이 사라지며 호흡이 엉망이 되었다.
놈의 말대로 뇌가 아래턱이 없단 걸 인식하자마자 몸의 흐름 전반이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서리스가 채비를 가다듬을 틈도 없이 광견은 다시 몰아쳐 왔다.
저 주먹에 조금이라도 닿는 순간 인체 소실이라는 환상계 마법이 걸린다.
‘썩을, 그냥 막는 것만 해도 까다롭기 그지없는데.’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그리고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본인이 겪은 고통이 가장 아픈 법이지.”
광견의 감정이 또 한 번 변화 했다.
내지른 주먹이 합장을 하듯 모이고, 서리스를 향해 뻗어 나온 순간 그의 눈앞이 새하얗게 질렸다.
회귀 직전.
태악룡이 내뱉던 그 새하얀 태양.
그것에 의해 전신이 소멸하던 그 순간이 뇌리에 재생되며 그에 따른 고통이 고스란히 육체에 반영되었다.
“……!”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작열하는 불꽃에 몸 하나하나가 전부 사라지는 그 감각만큼은 절대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니까.
검은별로 가까스로 세계 침식을 부분적으로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는 서리스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꽤나 엄청난 꼴을 당한 적이 있나 보군.”
곧이어 주먹이 날아들어 서리스의 옆구리에 정확히 꽂혔다.
바닥을 나뒹군 서리스의 입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에 젖어 축 처진 머리카락 사이로 광견이 보였다.
개의 형상을 한 새빨간 머리가 빗속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섣불렀다.
서리스는 아직 7성에 세계 침식자에게 조력까지 받은 광견을 상대하기에는 모자랐다.
“광견! 네 상대는 이 몸이다!”
그 순간 이바드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제 몸도 성치 못할 녀석이 멸천화륜을 불태우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광견의 마법을 뚫지 못한 것일까.
“거기 있었나.”
광견의 눈이 이바드라에게 꽂혔다.
‘그렇다면.’
이게 정말로 끝이라면.
바닥을 손으로 밀어내며 일어난 서리스.
그의 검 아래로 먹물 같은 어둠이 뚝뚝 흘러 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솟아나 오던 별은 오히려 기척을 감추고.
서리스의 그림자 검이 모든 별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오싹.
예상치 못한 기운이 서리스에게 감돌기 시작하자, 광견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숲속에서 맹수라도 마주친 양 전신의 털이 쭈뼛 섰다.
“……네놈, 마지막 발악이냐.”
방금까지 다 죽어 가던 놈인데, 대체 어디서 저런 기운이 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그의 말에 서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바드라!”
그림자에 의해 임시로 만들어진 서리스의 턱이 열리며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불길이 광견을 덮쳤다.
단, 5초.
‘그만큼만 버텨라.’
전하지 않아도 알아들은 듯 이바드라가 전신에서 모든 멸천화륜을 끌어 올리며 광견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그러나 서리스도 어쩌지 못한 광견에게 몸 상태도 성치 않은 이바드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뭔진 몰라도 쓰게 둘 거 같나?”
한 방에 이바드라를 날려 버린 광견이 또다시 합장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서리스의 검 또한.
화륵, 콰앙!
“크하아아악?!”
서리스의 두 눈이 깜빡였다.
검을 휘두르기 전에 치솟은 불길이 광견을 뒤덮었고, 그가 불길 속에서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서리스의 시선이 자신을 가리듯 선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미안하다, 애들 보기 부끄럽게 어른이 너무 늦었다.”
등 뒤까지 내려오는 주홍빛 머리카락.
이바드라보다도 심지가 굵은 눈썹.
그리고.
그의 등 뒤 제복 망토에 새겨진 바르크의 문양.
바르크 가주
염호(炎虎)
바르크 아그닐
그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