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콰광!
어디선가 낙뢰가 떨어지기라도 한 듯, 지축을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억수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서리스는 혼절한 이바드라를 업은 채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서리스는 광견을 보자마자 알았다.
저건 지금 수준의 자신이 상대할 만한 게 아니라고.
그렇기에 처음부터 망설임 없이 검은별을 썼고 덕분에 잠깐이나마 광견을 묶어 둘 수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흑월도 얼마 못 가 지워 버린 광견을 보고 서리스는 혀를 찼다.
아직 완전하게 익히지 못한 제왕월영도를 검은별과 함께 쓴다면 그를 이길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하겠다.
광견은 그 정도 상대였다.
그렇기에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이 자신이 그런 강자를 상대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하고.
검제인 요치아에게 검을 배우고 제왕월영도를 익히며 6성에 올랐지만.
서리스는 그동안 진짜 강자와 붙어 본 적이 없었다.
‘마수들 상대로야 있어 봤지만.’
세계 침식자와 같은 이와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이다.
‘나 참, 나도 어지간히 강함에 목마른 모양이야.’
하지만 자신은 이바드라를 구하러 온 것이지 광견과 싸우러 온 게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서 함부로 맞붙었다가는 이바드라가 휘말릴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바드라, 이 녀석이 죽었다간 펜타니엄과 바르크 관계도 엉망이 될 거고.’
대가문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건 좋지 않다.
가뜩이나 세계가 세계 침식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마당이고.
게다가 세계 침식자의 잠재적 조력자가 불터렉스에 있다.
펜타니엄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운 두 대가문과 사이가 틀어져 고립되는 건.
최악의 상황인 것이다.
“윽, 으윽.”
그런 순간 이바드라가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체력과 별을 많이 쏟은 이바드라다.
이렇게 빗물을 계속 맞다간 저체온증이 먼저 오겠지.
게다가 보아하니 늑골 쪽이 심상치 않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느껴지니까.
만약 부서진 뼈가 폐나 간, 비장에 상처를 입힌 거라면.
최소한의 치료를 해 두지 않았다간 도망치기 전에 이바드라가 죽는다.
‘나야 금강잔월 덕분에 비를 맞아도 전혀 상관없지만, 이바드라는 잠깐이라도 쉬어야 한다.’
최소한 그가 정신을 차리는 걸 돕고, 스스로 몸의 온도를 유지할 멸천화륜 정도는 일으키게 해 줘야 할 거다.
‘쉴 만한 곳은.’
산속을 달려가며 빠르게 위치를 확인한 서리스는 자연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비를 피하기에는 적합한 모습이다.
‘일단 여기서 이바드라를 치료하여 정신을 차리게 한다.’
다행히 오를레에서 셀리앙에게 받아 둔 약품은 상시로 가지고 다녔다.
그의 약품 효과 하나만큼은 뛰어나니, 금방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 동굴 안에 들어온 서리스는 이바드라의 상태를 점검했다.
역시 늑골 쪽이 엉망이다.
치료사가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참아달라며 서리스는 허리춤에 있던 약품을 이바드라에게 사용했다.
“그윽, 넌.”
“펜타니엄 서리스다. 지원 요청이 와서 구하러 왔어.”
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이바드라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오만한 심성을 가진 그다.
혹시 서리스가 자신을 구했다는 것에 자존심이라도 상한 걸까.
“……미, 안 하다. 이 몸이 폐를 끼쳤군.”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이바드라는 오히려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바드라의 오만함은 천성이 아님을 서리스는 느꼈다.
샬롯처럼 천성부터 오만함이 깊숙이 박혀 있는 이들은 이런 상황이라도 그 모습을 벗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사람은 인간 본성이 나오는 법이다.
‘스스로 가면을 썼군. 이런 녀석들도 종종 있지.’
자기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고, 가문을 위해서이기도 할 거다.
이바드라를 조금은 이해한 서리스는 그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숨은 제대로 쉬어져?”
“그래, 별도 조금씩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다행히 회복이 빠르다.
이대로 조금만 더 쉬어도 그는 제 발로 움직일 수 있을 듯싶었다.
“광견은?”
“일단 묶어 두고 도망쳤다. 염호께서 오고 계신다고 하였으니, 그때까지만 피해 있으면 되겠지.”
“아버지가 말인가.”
침음을 내뱉은 이바드라는 숨을 고른 뒤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빠르게 한 차례 멸천화륜을 돌려 체내를 정리하곤 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이동하지.”
그리 말한 이바드라를 보고 서리스가 안도의 미소와 함께 일어나려던 순간.
그는 바짝 쫓아오는 광견의 기척을 느끼곤 혀를 찼다.
저쪽도 검은별을 쫓는 법을 아는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요치아에게서 그 부적이라도 몇 개 챙겨 올 걸 그랬나.
“광견이 오고 있나?”
그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읽은 듯 이바드라가 묻자,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업혀 있어. 지금은 그게 더 빨라.”
“윽.”
서리스가 말하자 이바드라는 아주 짧게 주저했지만, 곧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곤 서리스에게 업혔다.
곧 성인인 마당에 이런 꼴로 업히는 건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물불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멸천화륜을 두르고 있어.”
그 말과 함께 서리스는 빗속을 뚫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서리스가 달려 나간 순간 바로 전에 지나간 똑같은 숲이 보였기 때문이다.
빗속이라도 알 수 있다.
이 특유의 이질적인 느낌은 광견이 이 주변에 무언가 술수를 벌인 것이다.
‘환상계 마법이라도 펼쳐 놓은 건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다.
보아하니 바로 쫓아 오지 않았던 이유도 이런 걸 사용하고 있어서였나.
“이바드라, 광견이 환상계 마법을 쓴 거 같다. 내가 시간을 좀 벌 테니 뚫고 도망칠 수 있겠어?”
“……너는 어쩔 속셈이냐?”
“맞서 봐야지.”
이바드라가 도망치는 시간 정돈 벌 수 있을 거다.
애초에 광견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겨룰 생각도 없고.
“그건 좋지 않다. 광견이 사용하는 환상계 마법은 혼자 있는 이에게 더 치명적이야.”
그런 순간 환상계 마법이라는 말에 서리스도 행동을 멈췄다.
마법.
별들의 힘을 직접적 받는 것이 아닌 그 힘을 빌려 내는 기술.
마법과 관련해서는 지식이 짧은 서리스는 이 부분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 그걸 깨부수려면 곁에 다른 이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광견이 환상계 마법만 다루지 않는 게 그 이유다.
그건 일대일과 같은 상황에 강하지, 다수와의 싸움에는 약하기 때문이다.
장물아비와 같은 이를 밑에 둔 것도 그러한 이유였고.
“그래서 총기사단장도 2기사단장과 함께 광견에게 맞섰다.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이바드라를 보며 서리스는 고민했다.
이바드라의 말대로라면 광견과 혼자 맞서는 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바드라, 너도 알잖아. 지금 네 몸으로는 아무것도 못해.”
“……큭, 알았다. 그럼 적어도 네게 멸천화륜을 불어넣어 주마. 원래라면 환상계 마법에 강한 불꽃이지만…….”
이바드라는 뒷말을 흐렸다.
광견의 환상계 마법을 막아 낼 수 있었다면 자신이 이런 꼴도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자신감을 잃은 모양이다.
“고맙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바드라가 풀이 죽어서는 안 되었다.
서리스를 본 이바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손에 멸천화륜을 불어넣어 주었다.
“광견의 환상계 마법이 발동되면 불꽃이 피어오를 것이다. 미약해도 등불 정도는 될 거다.”
“그 정도면 충분해.”
“위험하면 도망쳐라.”
이것만큼은 진심이라고 말한 이바드라가 몸을 돌렸다.
서리스가 시간을 벌 동안 광견이 숲에 걸어 놓은 환상계 마법을 뚫을 생각이었다.
“이바드라, 살아서 보자고.”
“……! 너,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이 가장 위험한 말인 것도 모르나!”
‘위험한 말이라니 무슨 소리지.’
서리스가 의아해하든 말든 ‘그런 생각은 접어 둬라!’라고 외친 이바드라가 먼저 가 버렸다.
‘광견.’
상대가 상대지만.
도망만 치는 건 취미가 아니다.
‘기왕 하는 거 크게 먹여 주자고.’
* * *
합장을 푼 광견은 빗속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조금 무리하게 숲속 전체에 환상계 마법을 걸었다.
같은 길을 끝없이 맴돌게 하는 환상 거울.
이걸로 자신을 쓰러트리기 전까지 숲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용한 강수.
여기서 서리스와 이바드라 두 놈을 잡아야만 했다.
“그래, 네 차례다.”
한쪽 얼굴이 계속해서 제멋대로 일그러지자 광견은 의미 모를 한마디를 했고.
그런 순간 뒤틀린 그의 얼굴에 세상을 향한 모든 분노가 가득 담겼다.
“학, 하학! 술래잡기는 끝이라고!”
개의 코를 벌렁거리며 광견이 바닥을 거칠게 박찼다.
이미 서리스가 있는 위치는 확인했다.
나무째로 부숴 버리며 그가 도약한 순간,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리스가 보였다.
그림자 검을 쥔 채 조용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서리스를 보며 광견은 광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도망치기를 포기하고 맞서기로 결정했나.
“크흥.”
콧방귀를 내쉰 광견의 두 손목 위로 다시금 새까만 염주가 생겨났다.
흥분되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광견은 차분하게 서리스를 살폈다.
놈은 약하지 않다.
거기에 영악한 놈이다.
그를 쓰러트리려면 자신도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테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망설임 없이 전력을 다해 끝낸다.
광견의 양 주먹이 허리 쪽으로 후욱 하고 당겨졌다.
동시에 머리를 쳐들어 하늘을 향해 하울링 하듯 울부짖음과 함께 그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환상계 마법
광폭성의 인드라스트라
자신에게 거는 환상계 마법이 발동되자, 광견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바닥을 박찬 광견의 주먹이 서리스에게 날아들었다.
대기를 찢듯 날아드는 주먹은 맞는 것만으로도 육체를 분쇄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기에 서리스도 처음부터 검은별로 그림자 검을 강화해 막았다.
투쾅!
검과 주먹이 맞부딪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서리스의 몸이 살짝 밀려났다.
‘과연 괴물이네.’
몸으로 전해지는 충격에 서리스도 이를 꽉 깨물며 연이어 날아드는 주먹을 향해 검을 휘둘러 나가기 시작했다.
청운귀명도의 청운귀검로(淸雲晷劍路)
금강잔월의 월반(月反)
검은별의 흑월(黑月)
세 가지 별을 모조리 사용하며 서리스는 광견의 공격을 맞섰다.
그에게 있어서 동시에 이렇게 많은 별을 운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디까지 통하는지 보자고.’
서리스의 눈동자에 광견의 모든 육체가 들어왔다.
육체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모조리 포착하며, 그의 주먹이 향하는 방향에 맞춰 검이 움직였다.
따로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힘을 되돌리는 반류보다 상위 기술인 월반을 통해 광견에게 계속해서 입을 피해를 돌려주고 있으니까.
그 때문에 서리스는 세 가지 기술을 쓰느라 몸이 터져 나갈 지경이지만.
이내 그를 몰아붙이던 광견이 자기 주먹이 계속 엇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눈을 확 찌푸렸다.
“기묘한 검술을!”
그 순간 광견이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빗물로 지반이 약해졌던 바닥이 무너지며 진흙과 흙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주 잠깐 시야가 가려진 사이 날아든 상대의 발차기를 막자, 광견이 양손을 모아 서리스를 내려쳤다.
쾅!
아슬하게 발에서 일으킨 그림자로 미끄러지듯 피한 서리스는 혀를 찼다.
분명 월반을 통해서 피해가 되돌아갔을 텐데도 저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만큼 환상계 마법을 통해 강화한 육체 능력이 자신보다 위라는 소리겠지.
‘그렇지만 당해 줄 마음은 없다.’
검로를 그려 나가며 준비는 마쳤다.
발을 바닥에 끌며 멈춘 서리스의 검 위로 팽팽하게 모여든 별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동시에 그 별의 위를 어둠을 뒤덮어 서리스는 터져 나올 것 같은 힘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서리스의 목 뒤의 별이 후광처럼 떠올랐다.
치솟은 진흙 사이를 헤치고 나온 광견의 눈에도 그 모습이 명확하게 보였다.
“크하학, 큰 거, 큰 거 오냐!”
“오냐.”
시원하게 먹여 주마.
부풀어 오른 다리 근육과 함께 서리스가 바닥을 박찼다.
휘몰아친 그림자가 서리스의 전신을 휘감고.
그 위로 새까만 검은별이 먹물 같은 어둠을 토해 그림자를 한층 더 짙게 만들었다.
그 순간 서리스가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마치, 발판이라도 밟은 듯 공중에 선 채로 광견을 향해 검을 겨눈 그 순간.
하늘 위 새까만 달이 떠올랐다.
콰광!
내려치는 천둥소리.
이윽고.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이식(二式)
흑월락(黑月落)
검은 달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