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숨이 차오른다.
오로지 도주를 위한 화공을 펼친 덕에 목에서 강렬한 갈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바드라는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멈추는 순간, 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주홍빛 기사단이 망자들을 뚫었거나 혹은 슬슬 지원이 도착했을 거다.
“염성, 염성, 염성, 염성!”
이바드라는 침이 들끓는 목소리로 게걸스럽게 자신을 부르짖으며 미친 듯이 쫓아 오는 광견의 모습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숲 사이를 누비며 기척을 아무리 죽여도 오직 일직선상으로 모든 엄폐물을 박살 내 놓은 채 놈은 쫓아오고 있었다.
터질듯한 근육과 붉은색 개의 머리, 그리고 벌렁거리는 새까만 코.
네발로 달리는 꼴은 영락없이 마수 같은 꼴이었다.
이바드라가 이런 광견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다리 한쪽이 총기사단장 엘다리트에게 당한 상처로 꽤나 큰 화상을 입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며칠째 정신조차 되찾지 못한 엘다리트에 비하면 미미한 상처이나.
그 덕분에 이바드라가 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도망갈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나? 내게, 나에게, 광견에게서!”
광기 어린 정신머리에서 나올 법한 언사를 흘리는 것만 봐도 광견이라는 이름에 딱 맞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무 하나를 몸으로 박살 내 놓는 게, 마치 폭주하는 수라 같았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미친 듯이 주변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그런 정신 나가 버린 괴물 말이다.
그렇기에 대화해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건 계속 도주를 하는 것뿐.
그렇기에 이바드라가 대답하지 않고 뛰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날아오는 나뭇가지에 급히 고개를 숙여야 했다.
흠칫하고 시선을 올리자 숲에 있던 나무들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광견의 환상계 마법이었다.
마치 숲이 살아 있는 것처럼 나무들이 이바드라를 공격해 왔던 것이다.
‘태워 버리면 그만이지만.’
남은 별을 이런 것에 쓸 수 없다.
“서라.”
이바드라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사이, 갑자기 차갑게 식은 광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마치 감정이 완전히 연소되기라도 한 듯.
방금까지 분노로 뒤덮여 집착을 보이던 그와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썩을, 또 다.’
그 순간 눈앞이 새하얀 눈이 덮인 공간으로 바뀌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끝없이 쏟아지는 눈은 이바드라에게 현실같이 느껴졌다.
환상계 마법.
광견이 다루는 능력으로, 허상이지만 오감은 진짜라고 느껴 버리게 하는 마법이었다.
상대가 환상계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바드라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는 환상계 마법사다. 이미 내 환상에 빠진 이상 너에게 도주는 무의미했다. 넌 내 환상 속을 꾸준히 돌고 있을 뿐이야.”
너무도 냉정한 모습.
아까까지 뒤쫓던 광견은 완전히 사라지고, 거기에는 환상계 마법사가 서 있었다.
광견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조금 전과 같이 세상 모든 것에 분노하며 제 몸을 불사를 정도로 달려드는 육탄전의 광견.
또 다른 하나는, 그런 분노를 모두 쏟아 내 차갑게 정신이 식으면 아주 짧게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과 같은 환상계 마법사로서의 광견이었다.
두 가지 다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바드라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단순하지만.’
두 번째일 때 놈은 환상계 마법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바드라를 확실하게 조여 왔다.
그 증거로 이바드라는 그의 감정이 식은 순간 당했던 왼팔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말 잡기 놀이도 이쯤 했으면 좋겠군. 나는 달리기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치고 산책 나온 사냥개같이 미친 듯이 뛰던 놈이.”
“나는 내 감정을 두 가지로 나눠 놨거든. 이해해라. 세상을 증오하기만 해서는 대업을 이룰 수 없으니까.”
크릉 하고 기묘한 웃음소리를 낸 광견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그 순간 땅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달려가던 이바드라도 다리의 힘이 풀릴 만큼 강렬한 진동의 출처는 다름 아닌 산 위.
거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눈사태의 방향은 당연히 자신 쪽.
저것이 환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지만, 이바드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염성이라는 이름에는 걸맞더군. 진심으로 도망만 치니 잡기가 영 쉽지 않아. 별이 너를 어지간히 예뻐해 주는 모양이야.”
눈사태 속에서도 광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러니 너도 한 번 식는 게 좋을 거다. 눈 속에 갇히고 나면 활활 타오르던 별도 꺼지겠지.”
저건 환상이다.
이바드라는 멸천화륜을 일으켰다.
환상계 마법과 멸천화륜은 상성이 좋다.
멸천화륜의 화기는 언제나 몸 전체를 감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밖에서 개입해 오는 정신 계통의 공격에 강한 것이 바로 멸천화륜.
하지만 어째서인지 광견의 환상계 마법 공격은 멸천화륜만으로 막아 낼 수 없었다.
‘이 몸의 경지가 모자란 탓인가?’
코앞까지 쏟아지는 눈사태를 향해 아무리 환상이라 되뇌어 봐도 이바드라는 이 환상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콰과과과광!
곧 눈사태에 휩쓸린 이바드라는 엉망진창으로 눈 속을 구르면서도 악착같이 정신만큼은 붙잡았다.
그리고 눈사태가 끝났을 때쯤, 그는 전신을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에 바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크윽.”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거기다 늑골 하나가 나간 듯 상체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호흡도 별도 엉망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되잡고 있는 게 기적인 수준이다.
쿠웅.
그러나 그의 기적에도 끝을 고하듯 이바드라의 앞에 커다란 광견의 발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두 번째 상태인 광견은 너무나 차가운 눈으로 이바드라를 보고 있었다.
“첫 번째 별은 잡았군.”
끝인가.
설마 이대로?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들이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고?
“으득!”
그 순간 이바드라를 중심으로 불길이 휘몰아쳤다.
마지막 발악하듯 멸천화륜검을 끌어 올린 순간, 이바드라는 둔탁한 충격과 함께 다시금 바닥을 굴렀다.
광견이 망설임 없이 그의 머리를 걷어찼던 것이다.
눈앞이 아찔했다.
조금 전 충격으로 뇌진탕이라도 온 건지 시야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그럼 데려가 볼까.”
이바드라가 꺼져 가는 시야 사이로 뻗어 오는 손을 보며 그렇게 눈이 감긴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광견의 손을 향해 별안간 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이바드라와 광견의 사이를 확실하게 가른 검.
새까만 그림자 검을 본 광견의 미간이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림자 검에서 쏟아져 나오는 별의 흔적이 광견의 눈에서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펜타니엄.”
그림자를 다루는 대가문.
그리고 광견이 목표로 하는 일곱별 중 하나인 샬롯이 있는 곳이다.
주홍빛 기사단이 청랑단과의 친선 대결을 마치고 움직이던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당연히 시간을 지체하면 펜타니엄 쪽에서도 지원이 올 것도 알고 있었고.
‘그렇지만 이 검은.’
검에서 풀풀 흘러나오는 별은 검의 주인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정도의 별 출력을 낼 수 있는 인물은 광견이 생각하기에도 몇 되지 않았으니.
‘설마 검왕이 움직였나?’
아니, 그가 움직일 정도의 일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검황도 절대 아니다.
오래전 끝없는 초롱에 들어간 그는, 소식만 전할 뿐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건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없다.
이 시기에 지원하러 올 놈 중에 이만한 수준인 놈은 분명히 없다.
“광견, 두 눈으로 보니 그 말 그대로네.”
처음 듣는 목소리.
경계 어린 광견의 시선이 숲속 한편으로 닿자,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큰 키에 근육이 돋보이는 듬직한 체격.
그러나 몸에 비해서는 아직 앳된 분위기가 남아 있어 보이는 소년은, 이제야 겨우 성인을 앞둔 듯 보였다.
“……저 검, 설마 네가 주인인가?”
“알 거 없어. 그 검을 곧 네 목에 박아서 네 주인이 돼 줄 테니까.”
광견의 의문에 도발로 답하는 서리스를 보고 그의 미간이 재차 좁아졌다.
“설마 하는 거지만, 네 이름은.”
“펜타니엄 서리스.”
숨길 것도 없다는 양 자신의 이름을 선뜻 말하자 광견은 헛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들어는 봤다.
검성 샬롯을 이겼다는 소문의 주인공.
그리고 얼마 전 염성 이바드라도 꺾었다는 그 주인공을 말이다.
펜타니엄 가문의 셋째.
일곱별에만 관심을 쏟던 광견도 들려오는 소문에 의문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혹시 일곱별 말고도 또 다른 후기지수가 나타난 게 아닌가 하고.
“하, 크흐흥.”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였다.
일곱별이라더니.
스스로에게도 어이가 없다.
저런 놈을 빼놓고서 왜 일곱별만을 주목했는가.
제일 먼저 잡아야 할 놈이 저기에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군.”
바칠 제물이 하나 늘었다.
저놈이라면 일곱별 중 한둘을 덜 잡아가도 채우고도 남을 거다.
광견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네 덕분에 대업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주둥아리가 개라서 그런가. 거참 시끄럽게 짖네.”
어느샌가 새로운 그림자 검을 쥔 서리스의 주위에서 흉흉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광견의 눈은 더욱더 환희에 찼다.
저놈을 바치는 순간 그분이 만족할 게 너무도 잘 느껴졌기 때문이다.
“후기지수 녀석들의 단점이 무엇인지 아나?”
번들거리는 광견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세상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날뛰는 천, 두웅벌거숭이라는 거다악!”
그 말과 함께 광견의 눈동자가 바뀌었다.
방금까지 감정이 절제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분노에 모든 것을 맡긴 전투광이 되었다.
네발짐승처럼 바닥을 박찬 광견의 양팔에는 어느샌가 새까만 염주가 채워져 있었다.
‘검은별.’
그 염주에 검은별이 깃들어 있음을 바로 눈치챈 서리스의 입가 위로 웃음이 그려졌다.
“아쉽게도 세상이 내 것이 아닌 건 너무 오래전에 깨달아 버려서 말이야.”
상대는 광견.
7성이라는 소문이 있는 만큼 그는 움직이는 재앙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이곳에 오는 처음부터 전력을 쏟고 있었다.
서리스의 그림자 검 위로 어둠이 뚜욱 떨어져 내렸다.
새까만 별 하나가 서리스를 향해 움직인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어둠을 전부 담았다.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일식(一式)
흑월(黑月)
칠흑 같은 어둠이 산속 한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한 광견은 갑작스레 반구 형태의 어둠 속에 빠지자 의문을 품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에 빠진 건지.
눈앞에 보이는 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
이러한 광경은 광견에게조차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어떻게?”
이 힘은 세계 침식자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의문은 어둠 속에 허망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마치 자신만이 이곳에 존재하는 듯.
끝없는 어둠 속에서 광견의 분노가 빠르게 연소되었다.
“그렇군.”
이내 차갑게 식은 그의 눈동자가 상황을 인식한 듯,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광견은 한 손은 위로, 다른 손은 아래로 내리며 기묘한 합장을 하였다.
“처음부터 정면승부를 할 속셈은 없었어.”
앞에서 한 호전적인 도발은 자신을 얕보게 하기 위한 같잖은 수.
이바드라라는 오만한 어린애를 쫓다 보니, 그 나이와 같은 이를 보고 섣부른 판단을 한 게 실수였다.
놈은 자신의 수준을 잘 알고 있다.
오만한 천재들만이 보는 세계가 아닌 범인이 세상을 보는 법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가진 힘은 세간의 천재들보다 앞서다니.
“어디서 이런 게 뚝 떨어졌는지 몰라도.”
합장한 그의 손 위로 염주가 올려졌다.
“나와 같은 선택 받은 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 순간 새까맣던 어둠이 모조리 염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샌가 아까와 같은 숲으로 돌아온 광견의 눈이 조용히 주위를 훑었다.
없다.
그리고 이바드라조차도.
서리스의 수에 완전히 당했음을 안 광견의 코가 벌렁거렸다.
“……크릉, 네가 나를 찾을 수 있듯이 내가 너를 찾을 수 있음을 알아야지.”
뚝뚝.
하나둘 떨어지는 빗물 속에서 광견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