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첫 번째 시합의 결과는.
이바드라의 얼굴 위로 오만한 웃음이 한껏 드리우는 걸로 충분했다.
박살.
그 말대로 아즐리는 소소를 박살 내 놓았다.
분명 연차가 비슷한 둘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실력 차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아즐리는 바르크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밤빛 기사단 소속이었으니까.
표면적으로는 주홍빛 기사단 막내나, 진짜 실력은 따로 있던 것이다.
이바드라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즐리에게 일부러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쓰러진 소소를 보며 아즐리는 이죽거리듯 웃었다.
“청랑단, 이름값에 안 어울리게 너무 싱겁네요.”
“으우윽.”
의복과 몸이 엉망진창으로 타 버린 소소가 분한 듯 소리를 내었다.
“……승자. 주홍빛 기사단 아즐리.”
그리고 아즐리가 실력을 숨기고 올라왔다는 것을 눈치챈 다트론이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홍빛 기사단 쪽 승리를 선언했다.
“압도적이구만.”
“분명 같은 연차 아니었나?”
“바르크 쪽 주홍빛 기사단은 막내부터 다른 건가.”
그러는 사이 관객 쪽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말마따나 두 사람의 대결은 누가 봐도 아즐리의 압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경기를 지켜본 주홍빛 총기사단장 호크웬 엘다리트의 얼굴 위로 살짝 금이 갔다.
아즐리가 밤빛 기사단 소속인 걸 알고 있지만.
그가 현재의 신분을 위해 항상 그에 맞는 힘으로만 움직일 걸 알기에 이번 대회도 올려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규칙을 어기고 진짜 힘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누가 그에게 관여했는지 그도 알아차린 것이다.
‘또 이바드라인가.’
청랑단과의 친선 대결에서도 사고를 치다니.
그는 이글거리는 분노를 삭이며 옆에 있는 청랑단주에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하다크, 우리 쪽에서 실수가 있었소. 이번 일은 보상할 테니.”
“하하, 무슨 소리십니까. 경기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엘다리트의 사과에 하다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직 경기가 전부 끝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웃음을 보자마자 엘다리트는 눈치챘다.
‘이 인간, 열 받았군.’
그가 은근히 좀생이 같은 구석이 있는 걸 아는 엘다리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나중에 좋은 술이라도 선물하든가 해야지.’
* * *
‘저놈, 저거 또 쳐 웃네.’
아즐리와 소소의 대결이 끝난 이후.
서리스는 자신을 향해 짓는 오만함이 가득 담긴 이바드라의 웃음을 보자마자.
이번 첫 대결이 어떤 식으로 굴러갔는지 눈치챘다.
정확한 걸 몰라도 저 아즐리라는 자가 실력을 숨기고 참가했고.
그리고 이바드라가 그에게 그걸 이용해 소소를 박살 낼 것을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보는 걸 보니 목적은 도발인 모양인데.’
제로와 주홍빛 기사단 간의 일 이후, 이바드라는 유달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아진 듯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리스는 이마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쉽게도 서리스는 소소와 그리 큰 접점이 없었다.
서리스가 없을 때 들어온 막내 기수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는 호법인지라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크게 감정의 동요는 없었지만.
“저것들이.”
“우리 막내 꼬꼬마 애기를.”
“……좀 화나네.”
문제는 옆에 있는 세 사람은 달랐다.
아카펠과 도로시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고, 서발광마저도 살짝 열이 받은 듯하였다.
서리스는 세 사람을 보며 대진표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이바드라는 분명 4기사단장이다.
다른 기사단과 어느 정도로 친한지는 몰라도 그에게 영향을 줄 만한 건 역시 4기사단이겠지.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 와 줬으니.’
대응해 주는 것도 괜찮겠지.
아쉽게도 아카펠과 도로시는 4기사단원과 결투가 잡혀 있지 않았다.
결투가 잡힌 건 단 한 사람.
서리스가 내심 가장 든든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서발광, 네가 대표해서 힘 좀 써줘야겠는데.”
“응?”
의문스러운 기색을 띠는 서발광을 보며 서리스는 웃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대결은 계속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결과가 나왔다.
점수 자체는 비슷했다.
하지만 4기사단이 나올 때면 그들은 마치 목숨을 건 것처럼 모든 걸 쏟아부어 승리를 쟁취했다.
비록 아즐리와 소소 때 같은 상황은 나오지 않았지만.
근소한 차이든 무엇이든 4기사단원 전원이 승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저놈이 직접 보고 뽑은 거려나.’
4기사단원이 승리하고 올 때마다 더더욱 오만함이 짙은 표정을 짓는 이바드라였다.
보아하니 보는 눈이 꽤 있는 모양이다.
단원들의 실력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주홍빛 기사단 4기사단 소속 돌폰, 청랑단 53기 서발광, 대련장 위로 올라오도록.”
그런 순간 드디어 서발광이 호명되었다.
“착쁜놈! 말아 버리고 와!”
“찍어 없애 버려.”
도로시와 아카펠 열렬하게 서발광을 응원해 주었다.
“서발광 선배님, 작살 내 주고 와 주세요!”
“우리 발광이! 이기고 오면 누나가 뽀뽀해 줄게!”
“이겨라! 서발광! 지면 너 위로 내 아래로 집합이야!”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다른 단원들도 그에게 성원을 쏟아부었다.
중간에 이상한 말이 있어서 볼을 붉힌 서발광이었지만, 그들처럼 자신을 굳게 믿는 듯한 서리스의 기색을 읽고는 당당히 대결장 위로 올랐다.
상대는 4기사단 소속 돌폰이었다.
남자치고 길게 기른 머리를 꽁지처럼 묶은 그는, 목 위에 그려진 험악한 용 문신 탓인지 기사와는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뭐야. 어린애잖아.”
대결장에 올라온 그는 서발광을 보고 얕잡아 보듯 말했다.
금강잔월 덕에 키가 꽤 자란 서발광이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의 체격을 훨씬 상회하는 돌폰이 보기에 서발광은 작기 그지없었다.
“잠깐, 애인 건 둘째치고 설마 눈도 안 보여?”
그리고 무엇보다 돌폰의 눈에 거슬리는 건 꼭 닫힌 그의 눈이었다.
일부러 감은 것은 아니겠고.
행동을 보아하니 맹인인 듯싶었다.
“하, 청랑단은 기사도도 없네. 인재가 얼마나 없으면.”
조용히 듣고 있던 서발광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을 얕보는 건 상관없지만, 청랑단을 욕하는 건 그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서리스랬나? 그런 망나니 같은 사람도 청랑호법이라니. 말 다 했지.”
그런 순간 그의 입에서 절대 나오면 안 될 말이 흘러나왔다.
대놓고 하는 도발이었다.
누가 봐도 상대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도발이었지만.
돌폰은 선을 넘었다.
“당신, 입이 방정맞네.”
서발광의 눈이 반달 형태로 휘어졌다.
“다시는 열지 못하게 해 줄게.”
세상 어느 누구도 서리스를 욕보일 수 없다.
그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따르는 주인이니까.
서발광의 말을 듣고 돌폰은 같잖다는 듯 핫 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궁지에 몰려도 못 무는 쥐인 줄 같았더니 성깔 있네.”
다트론이 시작을 알리기 위해 손을 올린 순간.
“어디 한 번 해 봐.”
“대결 시작.”
돌폰의 말과 함께 서발광의 검이 뽑혔다.
짧은 섬광.
서발광의 검이 정확한 궤도와 함께 돌폰의 입이 있던 자리를 갈랐다.
그 속도는 너무도 빨라 돌폰의 인지마저 뛰어넘었고, 그 결과 그의 입술 위로 기다란 상흔이 남았다.
“아악! 감히!”
“목소리도 빼앗아 줄 테니. 짓지 마.”
순식간에 입술이 반으로 갈라진 돌폰이 분노와 함께 주먹을 휘둘러왔다.
격투술을 주로 사용하는 그의 주먹이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지만, 서발광에게는 닿지도 못했다.
서발광은 아주 조금의 움직임만으로 돌폰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은 보이지 않는데도, 마치 돌폰의 모든 행동을 읽고 있는 듯하였다.
주먹도.
다리도.
회심의 박치기까지.
서발광은 모든 공격을 피할 뿐만 아니라 틈이 날 때마다 검을 내질렀는데,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쥐새끼처럼 요리조리!”
“아까는 쥐라며?”
“이익!”
그리고 은근히 사람 성질머리 긁을 줄 아는 쥐였다.
열이 받은 돌폰의 주먹 위로 불길이 휘감겼다.
멸천화륜검은 자유도가 낮은 만큼 두 가지로 파생된다.
하나는 앞에서 말했듯 검법인 멸천화륜검이고.
둘은 권법인 멸천화륜권(滅天火圇拳)이었다.
검 대신 육체 자체에 화공을 두르는 멸천화륜권은 일종의 화염 전차와도 같았다.
돌폰이 멸천화륜권을 쓰기 시작하자, 전신에서 서발광도 움찔하게 할 만한 위협적인 불꽃이 흘러나왔다.
‘하여튼 불은.’
구사조 때도 그렇고 까다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구사조 때 그 강렬한 화염도 이겨 냈기 때문일까.
돌폰의 불은 그 화염에 비하면 고작해야 작은 불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서발광은 빠른 속도로 돌폰의 멸천화륜권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걸 적응해?’
그걸 눈치챈 돌폰은 발을 한 차례 굴려 불길을 일으켰다.
한순간 시야를 가리며 치솟은 불의 벽 사이로 돌폰은 허를 찌르듯 팔꿈치를 휘둘렀다.
서발광의 목을 정확히 노린 공격이었으나, 돌폰은 잘못 판단했다.
맹인과 싸워 본 적 없는 탓에 시각을 차단하는 기술이 무의미하단 걸 한순간 잊어버린 것이다.
일반 사람과 싸울 때 나오는 버릇에서 비롯된 행동을 한 그는 뒤늦게 실수를 자각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금강잔월 반류로 화염의 흐름을 반대로 흘려낸 서발광이 그의 가슴팍을 향해 최단 거리로 검을 찔러 넣었기 때문이다.
화염을 물리고 그 사이로 검을 넣는 일련의 동작이 너무도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중간에나마 실수를 알아차린 돌폰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푸슉!
“크하악!”
제복을 찢고 튀어 오른 핏물과 함께 가슴팍이 갈린 돌폰이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가까스로 몸을 뺀 탓에 전투를 못 이어 나갈 정도의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뼈아픈 실수를 만회하기에는 모자랐다.
빠르다.
저 녀석은 나보다 확실하게 빠르다.
멸천화륜권을 몸에 불어 넣었음에도 자신보다 한 수 빠른 서발광을 보며 돌폰은 입술을 짓이겼다.
반으로 나뉘어 버린 입술에서 오는 통증이 자신을 더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저런 놈한테 진다면.’
단장에게 어떤 취급을 받을지 잘 아는 돌폰은 가까스로 이성을 부여잡았다.
애초에 저런 맹인에게 진다면 자신도 분노해서 미쳐 날뛸 게 분명했다.
‘인정하자. 빠른 건 빠른 거야.’
숨을 고른 돌폰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묘수를 떠올린 그는 속으로 웃음을 띠곤 곧바로 서발광에게 달려들었다.
매서운 공방전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돌폰의 덩치가 덩치인지라 그가 몰아쳐 오자 서발광도 물러나며 그의 공격을 받아쳤다.
물론 속도 면에서 서발광이 우위인 만큼 방어를 하는 서발광보다 공격을 하는 돌폰 쪽이 상처가 더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급소만은 보호하며 돌폰은 계속해서 서발광을 몰아쳤다.
그러는 사이 그의 발걸음을 따라 불길이 바닥 위로 퍼졌다.
서발광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
이미 불길은 돌폰과 서발광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만들어져 있었다.
돌폰이 진각을 그렸다.
멸천화륜권(滅天火圇拳)
삼식(三式)
멸천화절각(滅天火絶脚)
화르륵!
그 순간 엄청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마치 벽이 세워지듯 치솟은 불길은 하늘까지 닿을 기세였고.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돌폰은 양팔을 좌우로 펼친 채 씨익 하니 웃고 있었다.
“끝이다.”
그 말과 함께 돌폰이 양손을 동시에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에 맞춰 화염 벽이 순식간에 돌폰과 서발광을 조여 왔다.
멸천화륜을 다루는 돌폰에게 불은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다.
반면 화염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입는 서발광에게는 치명적이다.
이대로 화염 감옥을 조여 끝장내 주겠다고 이죽거린 돌폰이 서발광을 바라본 순간 그는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어느샌가 검을 검집에 되돌린 서발광이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있었기 때문이다.
“너 뭔 짓거리를!”
무언가 사태가 좋지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돌폰이 화염 감옥을 더 강하게 조였다.
더 빠른 속도로 조여든 화염 감옥이 순식간에 서발광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서발광의 감긴 눈이 아주 잠시 떠졌다.
금강비섬류(金强怌閃類)
이식(二式)
형섬발도(螢閃拔刀)
반딧불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