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펜타니엄 서리스.
주위 사람 말로는 남들 이름을 잘 기억하지 않는 이바드라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굵은 눈썹을 재차 일그러트렸다.
‘누군데 그게.’
이바드라의 기억 속에 제 또래 중에 펜타니엄과 관련된 인물은 오직 검성 단 하나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이바드라는 지금 자신이 물러날 정도의 상대가 펜타니엄에 있다는 사실에 인지 부조화가 오고 있었다.
이바드라는 반드시 강자는 기억한다.
그는 오만하지만, 강자를 앞에 두고 절대로 방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자와의 싸움은 끝없는 수 싸움이다.
비록 가문의 뜻인지라 뒤를 캐내거나 하는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지만.
또래에서 만큼은 일곱별 말고는 자신이 강자라 여긴 대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했다.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온 거지?’
그렇기에 그는 서리스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새로운 강자의 등장에 슬그머니 기분 나쁜 감정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발아래 두어야만 풀리는 성격 때문이었다.
손이 제멋대로 근질거렸다.
“이바드라 님.”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은 다가온 셀링에 의해 제지되었다.
안 좋은 버릇이다.
하물며 자신은 바르크를 대표하는 기사단장 중 하나.
가문의 이름을 걸고 이곳에 온 이상 예전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동생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사과드리죠.”
그리고 그런 이바드라를 두고 서리스는 무덤덤하게 말해 왔다.
이쪽은 호승심이 샘솟기 시작하는데 저쪽은 반응이 전혀 없으니 괜히 심통 나는 이바드라였다.
“서리스 형!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니까! 저놈들이.”
“제로, 아무래도 오랜만에 형제끼리 이야기를 좀 길게 나눠 봐야 하는 모양이네.”
“죄송합니다.”
서리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지자 흠칫한 제로가 대뜸 고개를 숙였다.
이바드라가 제로를 뱁새 취급하긴 했지만, 녀석은 꽤 실력 좋은 한스렘도 꺾었다.
나이에 비해 재능이 확실히 있다는 것인데도 서리스에게 조금도 반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이바드라는 턱을 매만졌다.
실력만큼 아랫사람도 휘어잡는 법도 아는 녀석이라 이건가.
“그럼 저희는 이만.”
이바드라는 서리스가 물러가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단지, 아까 전 자신이 잡혔던 손목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셀링.”
“네, 말씀하세요.”
“아까 이야기했던 펜타니엄 직계가 활약했다는 거.”
이바드라의 눈동자 속이 오만함 대신 오랜만에 투지라는 불길에 휩싸여 들었다.
“자세히 말해 봐라.”
* * *
“제로.”
“다시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옳지.”
척수 반사적으로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며 서리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푸른 잠자리 여관에서 돌아온 이후 서리스는 제로의 돌발 행동을 나무라며 청랑호법으로서 얼차려를 시켰다.
그 얼차려라는 게 서리스가 만든 그림자 공 속에 제로를 넣고 뻥뻥 차 주는 것이었기에 제로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진짜로 그냥 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뒷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겨. 거기에 하나하나 다 따지면 피곤하다.”
제로는 살짝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서리스가 쏘아보자 깨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도 꼴에 형 생각해 준다고 나선 거였다.
그 마음만큼은 좋게 생각해 주기로 하며 서리스가 제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자 녀석은 금세 침울함을 잊고 히히 웃었다.
간혹 보면 인정 욕구가 부족한 녀석이라 이런 간단한 거에도 좋아하는 게 좀 걱정되긴 하지만.
최근에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서리스는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대신.
“너는 근신이니까. 대회는 못 나간다.”
“우악!?”
멋대로 한 벌은 확실히 받아야 했다.
“서리스, 어디 갔다 왔어. 다트론 님이 찾으시던데.”
침울한 제로를 데리고 펜타니엄에서 준비해 준 별채 쪽으로 오자.
쉬고 있던 청랑단원 한 명이 서리스를 발견하고 말해 왔다.
그러고 보니 주홍빛 총기사단장과 기사단장들이랑 간단한 회담을 한다 했었지.
“아, 잠시 볼일이 있었거든요.”
어차피 저쪽 기사단장도 한 명 빠져 있었으니 이해해 주겠지.
이쪽은 어머니 호출이 있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바르크 이바드라였나.’
염성(炎星)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서리스는 제로를 향해 내뿜던 불길을 떠올렸다.
분명 자신과 같은 동갑이나,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별은 보통이 아니었다.
‘샬롯과 비슷, 아니, 별만 따지면 그쪽이 위일 수도 있겠는데.’
과연 괜히 일곱별로 불리는 게 아니라 이거지.
세상에 샬롯과 같은 천재가 여섯 명이나 더 있다는 게 참 기막힐 노릇이다.
물론 서리스가 보기에도 샬롯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같은 신성으로 취급받는 이유는 있는 것이다.
‘어차피 그 녀석도 워너힐 아카데미로 갈 테니까. 좀 친해져 두려 했건만.’
제로 녀석 덕분에 저쪽에 안 좋은 인상을 심어 둔 모양이고.
아쉬운 마음인 서리스는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다음 날.
주홍빛 기사단 대 청랑단 친선 대결 날이 다가왔다.
이번 대결이 외부에도 공개되는 것이니만큼 펜타니엄 영지는 축제 분위기였다.
원래도 놀거리가 그리 많지 않은 평민들이다.
“이야, 누가 이길 거 같나?”
“아무리 그래도 청랑단 아니겠어? 펜타니엄이 자랑하는 정예 집단인데.”
“에이, 이 사람아. 주홍빛 기사단도 바르크가 자랑하는 정예지 않나.”
“판돈 올라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는구만.”
강자들의 싸움은 눈을 즐겁게 해 주니 따지고 보면 확실히 축제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개방된 대결장이다 보니 구경꾼이 무척이나 많았다.
“아, 으아. 보러 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소극적인 사람이라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옆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서발광을 보고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눈도 안 보이는 녀석이 사람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게 조금 어이없는 기분이었다.
“왜, 왜, 사람 많으면 좋지!”
그리고 그런 서발광과 다르게 도로시 쪽은 주먹을 휙휙 휘두르며 잔뜩 불붙은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둘 다 참 정반대로 행동한다.
“서리스, 너는 청랑호법으로 나가지?”
“응, 아무래도.”
쓴웃음을 짓던 아카펠의 물음의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진표는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어제 회담을 통해 참가 희망자 수준과 연차에 맞춰서 대진을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리스는 나이도 같고 직위도 같은 이바드라와 붙게 되었다.
저 멀리 시선을 두니 의자에 앉은 이바드라가 어딘가 불붙은 눈으로 이쪽을 강렬히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대진표가 나오고부터 줄곧 저러고 있는데.
곧 눈이 빠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구경꾼이 몰린 대련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싶었더니.
청랑단주와 주홍빛 총기사단장이 대련장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두 집단을 이끄는 수장들인 만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하다크가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구경 와 주신 내빈분들 반갑습니다. 청랑단주 하다크라고 합니다.”
그가 이름을 말하자마자 관객들 쪽에서 거센 호응이 일어났다.
평민들에게 있어 하다크는 자랑스러운 존재다.
가문 없이 평민으로 올라 청랑단주 자리까지 오른 살아 있는 전설이었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엄청났다.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까지도 인망 하나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높아지는 인망에 비해 머리칼은 줄어들게 되지만.
“이번 친선 대결은 주홍빛 기사단과의 친선 대결입니다. 청랑단과 주홍빛 기사단, 둘 다 세계 침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들 응원해 주시며 봐 주셨으면 합니다.”
하다크의 인사를 따라 주홍빛 총기사단장 호크웬 엘다리트도 인사를 올리자 평민들이 박수로 맞이했다.
‘어찌 보면 대가문 직계들보다 사람들에게 더 가까운 사람들이니까.’
최전선에서 세계 침식을 막고자 노력하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청랑단주라는 자리는 청랑단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인망을 얻어야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두 사람이 인사 후 자리에서 내려오자 다트론이 올라왔다.
그는 친선 대결이 일대일로 이루어지며 최종 점수를 결산하여 승패를 가를 것이라 전하고.
마지막으로 대결 후 열릴 축제에서 패배하는 쪽이 음식과 술을 무상으로 나누어 줄 것이란 말로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 올렸다.
이번 대결은 일반 시민들의 스트레스 완화도 겸하고 있으니.
아예 제대로 축제 분위기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지는 녀석들은 공짜 술도 못 먹을 줄 알아라.”
“와, 죽는 한이 있어도 이겨야겠다.”
“오늘 난 무적이다.”
윌리엄의 말에 청랑단 쪽도 거세게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나 원 술이 그렇게 좋을까.
‘후, 당연히 좋지.’
서리스는 모두가 의지를 불태우는 것에 공감했다.
그러나 서리스는 씁쓸한 눈으로 그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몇 주 뒤면 성인이 되긴 하나, 아직은 아니다.
그 말은 즉, 서리스는 아직 술은 입에 대지 못하는 나이라는 소리였다.
이미 술맛을 알아서일까.
이럴 때만큼은 자신의 젊은 나이가 무척이나 아쉬운 그였다.
“서리스, 끝나고 우리도 몰래 몇 개 빼 오는 건 어때?”
아쉬워하는 서리스를 본 아카펠이 슬쩍 귓속말로 물어왔다.
눈치 빠른 동갑내기 친구다운 제안이다.
“이기면 클로나한테 아예 부탁해 볼게.”
“하핫, 그러자. 클로나 선배라면 오히려 챙겨 주실 거 같다. 곧 성인인데. 우리도 술 정돈 먹어 봐야지.”
“뭐야. 뭐야. 뭘 먹는데?”
“애는 몰라도 돼.”
중간에 끼어든 도로시가 아카펠에게 주먹을 날릴 동안 서리스는 가볍게 웃었다.
유일하게 아직 긴장을 못 푼 서발광만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서리스는 지금 이 순간이 참 즐겁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도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 첫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런 타이밍에 다트론이 첫 경기 시작을 알렸다.
사람들이 흥분한 기색으로 호응하는 사이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이바드라가 입을 열었다.
“아즐리.”
“네네, 4기사단장님.”
“박살 내라.”
“하하, 예.”
4기사단 소속 막내인 아즐리가 능구렁이 같이 웃었다.
첫 경기부터 박살 내라니.
너무하신 분이시지만.
‘저 성격에 한 번 불붙으시면.’
끝장을 볼 때까지는 꺼지지 않는다.
주홍빛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바드라를 옆에서 보좌했던 인물인 아즐리는 어깨 위에 검을 올린 채 대련장 위로 올랐다.
이바드라가 박살 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명을 완수하는 게 기사로서의 예의.
‘내가 첫 번째라 다행이네.’
다른 기사단 순번이 첫 번째가 아니라 다행이다.
이름이 호명되며 신입 단원인 듯 풋풋한 티가 나는 청랑단원을 보며 아즐리는 눈웃음을 지었다.
“잘,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마주한 이의 정체는 불과 몇 달 전 53기를 동경하고 서리스를 보며 놀랐던 청랑단원 소소이었다.
어벙해 보이는 게 누가 봐도 막내다운 티가 팍팍 흘러나왔다.
“네, 잘 부탁드려요.”
내려간 눈꼬리를 휘며 아즐리가 웃었다.
‘저쪽에는 아무런 죄가 없지만.’
단장의 명에 따라 상대를 박살 내야 했다.
“첫 번째 결투 시작.”
곧 두 사람 사이에 선 다트론이 시작을 선언하자마자 아즐리를 중심으로 불길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