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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89화 (88/275)

89화

“좋습니다. 제대로 해 주죠.”

손속을 두는 건 그만두겠다.

그렇게 결정한 한스렘은 별을 한층 더 끌어 올렸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검만을 타고 있던 불길이 어느샌가 그의 팔까지 타고 올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의 팔이 불길에 타고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멸천화륜검은 불을 기본으로 하되.

내부에 깃든 별을 가속화해 육체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화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육체 능력도 올라가는 것이다.

단점은 그 화력을 육체가 견뎌 내야 하는 만큼 부하가 있다는 것이지만.

대가문에서도 손에 꼽는 화력을 지닌 게 바로 멸천화륜검이었다.

후웅!

바닥에서 위로, 종으로 휘둘러진 한스렘의 검이 제로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치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듯.

불같은 그의 검격을 아슬하게 받아친 제로의 검이 뒤로 밀려났다.

화력이 올라간 만큼 한스렘이 힘에서 우위에 선 것이었다.

한스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로를 마구 몰아치기 시작했다.

힘에서 차이를 보인 이상 제로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처럼 또 떠들어 보시죠!”

튀어 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스렘이 노성을 토했다.

‘손속 좀 둬 줬다고 기고만장해서는 도발을 해.’

세월의 격차가 뭔지 똑똑히 알려 주겠다며 한스렘은 끝없이 검을 휘둘렀다.

‘젠장, 뭐지. 뭔가가.’

그렇게 제로를 몰아치던 한스렘이었지만.

그는 갑자기 어디선가 위화감을 느껴야만 했다.

멸천화륜검은 불의 성향을 가장 강렬히 지니고 있다.

그런 만큼 자신의 불길을 가면 갈수록 화려하게 타올라야만 하건만.

어째서인지 그 불길이 묘하게 힘 빠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계속해서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한스렘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멸천화륜검이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이 두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한스렘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깃들었다.

자신은 분명 불길에 별을 더 쏟아붓고 있지만, 마치 밑 빠진 독처럼 별들이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던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한스렘이 제로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는 흠칫한 표정과 함께 검을 멈추고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뭐냐. 벌써 다 끝났냐?”

비아냥을 담은 도발이 이어졌지만, 한스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검과 제로를 돌아볼 뿐이었다.

“……무슨 사술을 쓴 겁니까?”

“갑자기 뭔 사술 타령이냐?”

제로는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내쉬었다.

그러나 한스렘은 방금 전 분명 보았다.

제로의 표정은 절대로 궁지에 몰린 모습이 아니었다.

그건 덫에 걸린 사냥감을 보는 사냥꾼의 눈이었다.

‘내 불길이 줄어든 이유도.’

분명하다.

저쪽이 무슨 수를 쓴 것이다.

“안 오면 내가 간다!”

그 순간 한스렘이 고민할 틈새를 주지 않고 제로가 먼저 달려들었다.

제로의 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한스렘의 태도가 소극적으로 변했다.

곧 제로의 검의 궤적을 따라 그림자가 꼬리를 물며 흐름이 되었다.

그림자는 파도가 되고 곧 이 식 청운귀검로가 펼쳐졌다.

당황한 한스렘이 악착같이 검을 맞받아쳤지만, 좀처럼 흐름을 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자신의 불길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것을 보고 한스렘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제야 알았다.

제로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어째서인지 불길이 제로에게 잡아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눈치채도 늦었어.”

제로가 씨익 하니 웃었다.

최근 제로가 새롭게 만들어 낸 수.

그건 바로 상대의 별을 먹는 그림자 검이었다.

서리스와 같이 폭발적인 힘도.

샬롯과 같이 끝을 모르는 검술도.

제로에게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제로는 차라리 새로운 것에 몰두했다.

청랑단에는 청운귀명도를 재해석한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과 어울려 나가며 그림자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본 그는 곧 한 가지 사실에 도달했다.

그림자는 빛이 있을 때 생겨난다.

그리고 그 빛은 설령 별빛이라도 같다.

그렇다면 별빛이라 하여 그림자가 삼키지 못할 것인가?

그런 의문을 품고 제로는 서리스가 2년 동안 수련을 한 것처럼 그 또한 수없이 수련하였다.

과거 샬롯에게 가려져 포악스러웠던 성격은 사라지고.

오직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의 발판이 그에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온 결과물.

별을 삼키는 그림자였다.

비록 아직은 이름조차 붙이지 못했을 정도로 미약하기 그지없다.

그 증거로 한스렘을 상대로 수십 번이나 검을 맞대고 나서야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으니까.

그림자가 한 번 삼키는 양이 아직은 너무 적은 것이다.

‘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어린 시절 노력을 부정했던 아이는 어느샌가 노력을 믿고 있는 아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절대 헛된 게 아니었다.

무너져 봤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아는 이에게.

더 이상 두려운 것은 없었다.

“크아악!”

패배를 직감한 한스렘이 마지막 발버둥을 담아 별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렸다.

동시에 그가 휘두른 검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너무 과한 손속에 놀란 심판이 말리려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고 그걸 눈앞에서 목격한 제로가 눈을 번뜩였다.

한계인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에게서 흡수한 별이 터져 나오고 싶어서 미친 듯이 아우성치고 있었으니까!

딸칵!

머릿속에서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울리며 제로의 그림자 검에 쌓인 별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 별은 일순간 제로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제로는 수없이 보았던 서리스와 같이.

이 한순간만은 그 압도적인 별을 검 전체에 두르며 아래에서 위로 내리그었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사식(四式)

청운반월섬(淸雲半月殲)

반월 형태의 그림자 검격이 한스렘의 불꽃을 모조리 찢어발기며 그를 덮쳤다.

별을 다 쏟아부은 한스렘은 이렇다 할 반항조차 못 하고 검격에 휩쓸렸다.

내동댕이쳐지듯 바닥을 구른 그가 가늘게 몸을 떨자, 제로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곤 콧방귀를 내쉬었다.

“손속은 둬줬다. 청랑단에 새로 들어온 신입 녀석들보다 못한 녀석이군.”

당연히 허풍이다.

그 증거로 피로가 쌓인 제로의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스렘은 강했고, 그가 처음부터 진심으로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르나.

제로는 이겼고, 그의 패배는 사과해야 함을 의미했다.

“심판!”

“제로 님이 이겼습니다!”

한스렘이 전투 불능에 빠졌기에 그의 수하가 기뻐하며 외쳤다.

그러자 주홍빛 기사단 쪽 심판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패배는 패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머리를 굴렸다.

이제 한스렘이 깨어나면 사과를 해야 할 판인데 어쩐다.

하지만 이렇다 할 해답은 좀처럼 나오지를 않았다.

“무슨 소란이냐.”

그런 순간이었다.

대련장에 귀찮은 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사단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주홍색의 사자 같은 머리카락.

이제야 곧 약관에 들어섬에도 모든 것을 아래로 보는 듯한 오만함을 품은 황금색 눈동자.

그는 다름 아닌 바르크 이바드라였다.

옆에 셀링을 끼고 나타난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련장 꼴을 보더니 허 하고 소리를 내었다.

“거기, 꼬마. 한스렘 녀석 꼴이 왜 저런지 설명해봐라.”

딱 보아도 한스렘과 싸운 것 같은 제로에게 물음을 던지자 제로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넌 누군데?”

“이 몸의 이름도 모르는 놈이 여기서 이런 짓거리나 하고 있나?”

그는 턱을 매만지며 제로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로는 그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얼굴에서부터 드러나는 오만함.

저 오만함은 샬롯의 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홍빛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는 그가 바르크 직계임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셀링, 한스렘을 데려가서 치료해라. 있다가 일어나면 그놈에게 이야기를 듣지.”

“어딜 제멋대로 데려가! 그놈은 나에게 사과해야 할 게 있다고!”

그런 순간 이바드라의 지시에 제로가 소리를 내질렀다.

사과라는 말을 듣고 굵은 눈썹을 꿈틀거린 이바드라는 잔뜩 찌푸려진 인상으로 제로를 바라보았다.

“이 몸의 말에 토 달지 마라.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걸 받고 싶다면.”

그 순간 이바드라의 몸 주위에서 불꽃이 돌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감정을 드러냈을 뿐인데, 따라 나온 불꽃은 그가 얼마나 바르크 별에 축복을 받았는지 보여 주는 것이었다.

“저놈이 속한 기사단의 단장인 이 몸 바르크 이바드라를 꺾고 받아 내라.”

“염성.”

이바드라의 이름을 듣자마자 제로의 눈이 흔들렸다.

샬롯과 같은 떠오르는 일곱별 중 하나.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샬롯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금 은연중에 제로를 짓눌렀다.

서리스와의 일이 있고 나서 샬롯은 제로 앞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그녀의 활약상들이 대부분이었다.

10대 용병단 중 하나인 불혼 용병단을 궤멸시켰다던가.

산적왕을 제 부하로 삼았다던가.

어디서 용 한 마리를 구해 자가용으로 타고 있다던가.

남들이 들으면 경악할 짓거리를 샬롯은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이 어떻다 한들 그녀는 언제나 오만하고 강하며 자신의 실력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천재란 무릇 그런 법이니까.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염성도 샬롯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 천재.

출발선조차 다른 그런 인물.

“좋네. 잘됐어. 부하의 실수는 상관이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오랜만에 샬롯에게 느꼈던 그 감정을 되새긴 제로가 이죽거렸다.

한스렘과의 전투의 여파가 아직 몸에 남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의 노력이 천재에게 어디까지 닿았는지 확인해 주겠다.

“덤벼. 오만방자한 천재 놈아.”

제로가 검을 겨누자 염성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뱁새가 울기는.”

그리고 그 순간 제로는 보았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았음에도 자신의 눈앞에 일순 무언가 점화했음을 말이다.

그것이 불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코앞까지 뻗어 나온 손아귀 속 강렬히 타오르는 불꽃이 순식간에 제로를 덮쳐 온 것이다.

불꽃을 보자마자 가속화된 사고 속에서 제로가 검을 들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눈앞의 불길에 비해 한없이 느렸다.

늦다.

늦어도 너무 늦다.

눈앞에 둔 재해와 맞서기에는 자신의 육체가 너무도 느렸다.

그럼에도 제로의 두 눈은 부릅떠져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해라 할지언정 상관없었다.

다시는 그걸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까.

화르륵!

타오른 불길이 대련장을 가득 메웠다.

손에 닿는 감촉이 있었던 이바드라였으나, 그는 곧 굵은 눈썹을 다시금 꿈틀거려야만 했다.

자신보다도 큰 키의 한 남성이 손목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멸천화륜검의 기운을 잔뜩 머금어 활활 타오르는 자신의 손목을 맨손으로 말이다.

그가 손목을 놓자 이바드라의 눈이 흉흉히 빛났다.

남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뒤로 물린 제로에게 가서 꿀밤을 먹였다.

“악!”

소리를 내지른 제로가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감싸는 동안 남성의 시선이 이바드라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이바드라는 자신이 한 발자국 물러섰음을 깨달았다.

남성의 몸에서 느껴지는 압도감이 한순간 자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누구냐. 넌.”

범상치 않은 인물의 등장에 이바드라가 묻자, 눈앞에 남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해 주었다.

“펜타니엄 서리스.”

앞으로 이바드라가 평생 잊지 못할 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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