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꽤나 의외인 이야기였다.
‘세계 침식자의 의도인 건지, 아니면 본인 뜻인 건지 모르겠다마는.’
떠났다고 하니 서리스는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천랑후에게 감시는 맡겨 놨으니 문제되는 행동을 하면 그가 처리해 주리라.
“그것보다 본론이다. 이번 주홍빛 기사단에 바르크 직계가 있다고 한다.”
그건 처음 듣는 소리라 서리스도 흥미를 보였다.
“위치는요?”
“4기사단 단장이라더군. 너와 동갑이라고 들었다.”
“그걸 말해 주신 이유는 아무래도.”
“그자를 상대하는 걸 네게 맡기고 싶다.”
“그러죠.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괜히 대가문 직계랑 부딪쳐서 일반 단원들이 피해 볼 수도 있으니, 서리스가 그나마 상대로 적합하리라.
무엇보다 대가문 직계 대 대가문 직계라면 긁어 부스럼도 덜 생길 테고.
물론 친선 대결까지 친히 와서 사사건건 문제 삼는 바보가 대가문 직계 중에 있지는 않겠지만.
‘게다가 궁금하기도 하단 말이지.’
불터렉스 발렌타인이라는 케이스가 있어서일까.
서리스는 다른 대가문 직계도 궁금해졌다.
하물며 기사단장 중 한 명에다가 동갑이라니 실력도 확실할 테고.
‘분명 워너힐 아카데미에 들어가려고 하겠지.’
지망생을 만나 두는 건 나쁘지 않다.
실력과 인성이 좋다면 발렌타인 때처럼 좋은 연을 만들어 둘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별생각 없었는데, 좀 기대되네요.”
실력이 좋으면 요치아에게 배운 검술도 선보일 수 있겠다며 서리스는 짧게 기대감을 품었다.
* * *
바르크 소속 주홍빛 기사단.
청랑단과 같이 세계 침식을 상대하고자 창설된 기사단으로서, 그들의 실력은 바르크 내에서도 매우 우수하다.
그러한 주홍빛 기사단은 총 6개의 기사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4기사단의 기사단장은 현재 바르크 직계 중 한 명인 바르크 이바드라였다.
19살밖에 안 되었는데 기사단장 자리 하나를 꿰찬 실력 덕분에.
세간에서는 그를 염성(炎星)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샬롯과 같은 기대 받는 유망주들에게 붙는 별호.
그 일곱별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바르크 이바드라였던 것이다.
그의 누나는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입학해 차석을 하며 바르크의 위대함을 알리고.
둘째인 아들은 19살에 기사단장 자리까지 오르며 새로운 별로 부상했으니.
바르크 입장에서는 더없이 자랑스러운 직계들이었다.
그 덕인지 대가문 바르크가 패권을 쥘 거라며 떵떵거리는 바르크 내 가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새로운 별들에게는 공통적인 문제점이 존재했다.
“구석에 있는 촌 동네답게. 멀리도 있군.”
이바드라는 오랜 마차 여행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지껄였다.
그의 얼굴에는 패도적인 오만함이 가득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주홍빛을 기본 바탕으로 만들어진 제복 차림.
마치 사자 갈기를 연상케 하는 사방으로 솟아난 주홍의 머리카락.
찌푸려진 심지 굵고 진한 눈썹은 그의 오만함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뚱한 얼굴만 지으시면 얼굴에 주름이 생깁니다.”
“걱정 마. 그렇게 된다면 이 몸이 바로 환골탈태를 해 줄 테니까.”
눈앞에서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그는 비틀린 웃음과 함께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 다가온 그녀는 손수 깎은 과일을 그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이바드라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마치 그의 애인이라도 되는 양 그에게 살갑게 대했다.
“이바드라 님, 펜타니엄이 대륙 위치상 구석에 있긴 하나 뛰어난 오대가에 들어가는 대가문임은 변함없습니다.”
그녀는 이바드라의 태도를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그들 앞에서도 이런 태도는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쯧, 늙었으면서 쓸모없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녀석들이 문제일 뿐이다. 이 몸의 시대가 오면 모두 바뀔 거야.”
“염성이라는 별칭을 얻고, 가면 갈수록 더 오만해지시는 거 같습니다만.”
“불만 있나. 셀링?”
“아니요.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거니까요.”
솔직한 셀링의 고백에 히죽 웃어 준 이바드라는 마차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다. 감히 나와 맞선 검성, 그 오만방자한 년을 상대하는 거라면 모를까.”
이바드라는 콧방귀를 한 차례 뀌었다.
“청랑단이라는 범재들만 있을 곳과 친선 대결을 하라니.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군.”
그가 펜타니엄에 가는 내내 이런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가뜩이나 조만간 있을 워너힐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어떻게 활약해 자신을 드러내 줄지 고민하고 있건만.
이딴 연례행사 따위에 자신이 참가해야 한다니.
시간 낭비이다 못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청랑단 내에도 펜타니엄 직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직계와 관련해서 위쪽에서도 여러 소문이 들려 신경 쓰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검성 녀석을 제외하면 이 몸을 상대해 봄 직한 녀석은 없다.”
셀링의 말에도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듯 그는 따분한 표정과 함께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 것보다 이딴 마차로 시간 낭비 안 하도록 어디서 비룡이라도 구해 오던가 해야겠군.”
“바르크 영지는 비룡들 서식지가 없어서 키우기가 힘듭니다만.”
“안다. 그냥 해 본 소리니 다 따지고 들지 마.”
셀링이 옅게 키득거리는 사이 마차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주홍빛 기사단이 펜타니엄에서 준비한 여관에 도착한 탓이었다.
“단장님, 여관에 도착했습니다.”
똑똑하고 노크 소리와 함께 기사단원 한 명이 부르자 이바드라는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여관은 펜타니엄에서 준비한 것답게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당분간 지내는 데는 별문제 없으리라.
“여장을 풀고, 쉬고 있도록 해라. 셀링, 적당히 돌아보고 올 거니 따라와라.”
“데이트하자는 말을 돌려 말씀하시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내쉰 아바드라가 그대로 마차를 나서서 걸어가자 셀링이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부럽다.”
“단장, 부러워해서 뭐 하게.”
주홍빛 기사단원 중 유일한 여성.
그것도 누가 봐도 예쁘다고 넋 놓을 셀링을 항상 끼고 다니는 이바드라를 부러워하면서도.
기사단원들은 금방 고개를 저어 털어 내었다.
셀링과 이바드라의 사이가 하루 이틀을 걸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주홍빛 기사단원들이 둘을 내버려 두고 하나둘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하는 동안.
그런 그들의 곁에서 어슬렁거리는 한 무리가 있었다.
“주홍빛 갑옷. 저놈들이다.”
서리스와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그에 비하면 작은 키.
평소와는 다르게 청랑단 제복 대신 평민 복장을 한 그는 다름 아닌 제로였다.
“제로 님,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어떤 놈들인지 미리 정보 염탐만 할 거니까.”
제로와 동기이자 그의 수하 중 한 명의 물음의 제로는 씩 하니 웃어 보였다.
녀석들을 낱낱이 파헤쳐서 정보를 뜯어낸 다음.
청랑단이 손쉽게 승리할 수 있도록 그 정보를 풀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꽤 대견한 짓인 거 같단 말이지.’
턱을 매만지며 자기만족을 한 제로는 여관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창문 쪽을 보자 짐을 옮기고 있는 주홍빛 기사단원들이 보였다.
눈으로 둘러보니 자신 또래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하였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청랑단 쪽에도 직계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듣긴 했지.”
짐을 다 옮기고 쉬는 와중인지 때마침 창문 근처에 있던 기사단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계라는 말에 혹시 자기 이야기인가 싶어 제로가 쫑긋 귀를 세웠다.
최근 세계 침식에서 많이 활약해 온 자신이다.
바르크 쪽에도 자신의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 게 아닐까.
살짝 기대감을 느끼고 있으려니 기사단원의 목소리가 마저 들려왔다.
“이름이 분명 펜타니엄 서리스랬나.”
‘서리스 형 이야기였나.’
조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제로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스는 누가 뭐래도 자랑스러운 형이다.
무려 샬롯을 꺾어 버린 노력가.
서리스의 명성이라면 당연히 바르크 주홍빛 기사단에 귀에도 충분히 들어갈 만했다.
“서리스? 설마 몰락한 망나니 서리스 말하는 거야?”
그런 순간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사단원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반응에 서리스의 이름을 거론한 기사단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몰락한 망나니?”
“내가 방계긴 해도 소가문 사람이잖아. 바르크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해. 술 훔쳐 먹고 여자나 희롱하는 악질로 말이야.”
“뭐야. 청랑단에는 그런 놈도 들어갈 수 있는 거야?”
“그래도 직계잖냐. 위에서 넣으라 하면 넣을 수밖에 없겠지.”
“하, 오대가라더니 변변찮은 놈도 직계라고 꼴에 챙겨 준다 이거네.”
“하여튼 가문이 깡패지.”
그들은 서리스는 물론 펜타니엄과 청랑단 모든 걸 모욕하기 시작했다.
같은 대가문 소속도 아니고.
적이라면 적일 수 있는 관계이니.
둘이서 하는 잡담에서 당연히 흘러나올 수 있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다.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이런 식에 뒷담화 정도는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까.
서리스가 들었다면 오히려 웃어넘겼을 정도로 시답잖은 잡담.
딱 그 정도였다.
쨍그랑!
“너희들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문제는 그건 어디까지나 나이를 다 먹고 사회 경험을 쌓은 성인의 입장이지.
올해 18살밖에 안 된 제로 입장에서는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뭐, 뭐야 넌?”
“다시 한번 지껄여 봐.”
창문을 깨고 들어와 창문턱에 턱 하니 발을 올린 채 제로가 묻자 기사단원 둘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뭐, 깨지는 소리가 났는데.”
창문이 깨진 소리에 부산히 짐을 옮기던 기사단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려들었으나.
제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새끼 늑대처럼 이를 드러내며 으르릉거렸다.
“누구냐! 여기가 바르크 대가문 소속 주홍빛 기사단이 머무르는 곳임을 알고 이러는 것이냐!”
그러자 뒷담화를 하던 남성이 경고하듯 외쳤다.
그 외침을 듣고 제로는 창문턱 위에 우뚝 선 채 팔짱을 착하니 꼈다.
“내 이름은 펜타니엄 제로.”
그의 목 뒤에서 환한 별빛과 함께 제로의 두 눈동자가 화륵 불타올랐다.
“지금 들은 모욕적인 말을 사과하지 않겠다면, 당장 네놈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