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리고 같은 시각.
서리스의 검술이 예상보다 훨씬 웃도는 수준까지 올랐다는 것을 자각한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맞았다.
이대로라면 별을 끌어내지도 못하고 끝나게 생겼다.
“서발광!”
아카펠이 이름을 부르짖은 순간 서발광의 별이 환하게 빛났다.
그의 검이 서리스의 검에 닿은 찰나 터져 나온 빛이 시야를 가렸다.
동시에 서발광의 형섬이 서리스의 검을 한껏 위로 쳐올렸다.
그 사이로 도로시가 뱀과 같이 유영했다.
이내 서리스를 포박하듯 그의 허리춤에 양다리를 걸고, 그의 목을 향해 두 개의 검을 휘둘렀다.
아카펠의 화살이 형태가 바뀌며 다섯 발의 극폭시 또한 이미 준비를 마쳤을 때.
서리스가 가볍게 웃었다.
셋의 호흡은 완벽했으나 서리스의 눈에는 여전히 여유가 흘렀다.
“재밌네.”
짧은 섬광.
폭발이 이어졌다.
모락모락 차오른 연기에 모두가 기침했을 때.
세 사람이 나뒹굴듯 연기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모두는 볼 수 있었다.
그 섬광이 서리스의 목 뒤에서 너무나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6, 6성.”
누군가 서리스의 경지를 알아차린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19살.
약관도 되지 못한 아직은 소년이라 할 수 있었던 서리스가.
청랑단주 하다크와 동급인.
6성에 오른 것이다.
서리스는 물러선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완벽한 호흡과 합.
그동안 세 사람이 얼마나 노력을 해 오며 서로를 믿었는지.
한눈에 보이는 결과는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동료의 성장이라는 건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동시에 오랜만에 만난 자신을 상대로도 투기를 전혀 잃지 않은 세 사람은 어떤 의미론 기특하기까지 했다.
‘처음 만날 땐 세 명 다 아직 한참 어린애였는데.’
과거로 돌아오기 전 나이가 있기 때문일까.
서리스의 눈에 동갑내기 세 사람은 어떻게 하든 어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현실을 모르고.
자신에게 닥친 상황만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이들의 생각을 셋 다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이 된다.
여러 과정을 거치며 저 스스로 걷는 법을 사람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눈앞에 세 사람은 서리스가 보지 않은 사이 훌쩍 커 버리고 만 모양이다.
‘애들은 눈을 떼면 참 순식간에 큰단 말이야.’
그 사실이 꽤나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같이 있어 주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이 보내는 무한한 신뢰의 눈동자는 참으로 기뻤다.
그러니 그 기쁨에는 성과를 보여 주는 걸로 보답해 줘야겠지.
“막아 봐.”
오만스러운 말이었지만, 셋 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감응하는 눈동자는 서리스를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며 서리스의 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공기가 역류하듯 서리스를 중심으로 흘러 들어갔다.
뜨뜻미지근한.
어딘가 한없이 기분 나쁘기 그지없는 바람이 모두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를 사람들은 흔히 위기감이라고 말한다.
배 속 어딘가 찌르르 울린다.
식은땀이 방울방울 이마에 맺힌다.
호흡이 가빠지고, 괜스레 목을 매만진다.
그러한 상황이 서리스가 검을 올리는 동작 한 번에 모두 이루어졌다.
숨 막히는 상황.
서리스는 모두의 주목된 상황 속에서 검을 내려치려던 그 순간.
“서리스.”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검이 우뚝 멈춰 섰다.
검을 내리그은 동작 한 번에 일어난 풍압이 모두의 머리카락을 공중으로 띄웠다가 아래로 내렸다.
다들 홀린 듯이 서리스를 보고 있는 동안 그의 시선은 인파로 향했다.
“다트론 청랑호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청랑호법 호출이다. 대련은 이따가 마저 하도록.”
“음, 알겠습니다. 세 사람 다 괜찮아?”
서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굳어 있는 세 명이 있었다.
별로 만든 활을 부러질 듯이 쥔 아카펠.
평생 감아 왔던 눈조차 뜬 채 검을 쥔 자세를 풀 줄 모르는 서발광.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마치 야생에서 만난 동물처럼 사납게 날이 선 도로시였다.
“어, 응.”
결국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되잡은 아카펠이 대답하자, 서리스는 미안한 미소와 함께 세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방금 서리스가 뭘 하려 한 걸까?”
“모르겠다.”
서발광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아카펠도 고개를 저었다.
그저 막연하게 위험하다는 걸 느꼈을 뿐.
아카펠도 서리스의 마지막 일격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완전 큰 새까만 검…….”
그러는 순간 도로시가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직계님, 직계거인님이 되어 버렸어.”
도로시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꽤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뭐야! 서리스 형이 오셨다고? 어디야!”
그러는 사이 인파를 헤치고 뛰어 들어온 제로가 대련장을 휙휙 둘러봤다.
“서리스 형한테 내가 갈고 닦은 검술 실력을 보여 줘야 하는데! 이제 형도 이길걸!”
모두가 얼이 나간 상황.
혼자 당차게 외치는 제로를 보며 사람들은 그저 안타까운 눈을 보낼 뿐이었다.
넌 평생 무슨 짓을 해도 서리스는 못 이길 거라고.
모두 다 펜타니엄 막내 쌍둥이 동생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할 뿐이었다.
* * *
“그래서 무슨 일로 호출이랍니까?”
호출이라는 소리에 다트론을 따라나선 서리스가 의문을 던졌다.
오늘 낮에 하다크를 만나 귀환 소식을 전했던 만큼 또 한 번의 호출은 의아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바르크 가문을 알고 있나?”
“서쪽 영지 골드라스 옆에 있는 대가문이잖습니까?”
바르크 가문.
불터렉스와 같이 펜타니엄에 인접한 또 다른 대가문이었다.
동쪽 영지인 레일로는 끝없는 초롱과 맞닿아 있고.
북쪽 영지인 엘리자는 고산 지대 너머가 전부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바르크 가문은 서쪽 영지 골드라스 쪽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대가문 중 하나였다.
펜타니엄에 비하면 크기 자체는 작으나.
그래도 펜타니엄과 나름 오래도록 연을 쌓아 온 가문이라 할 수 있었다.
“청랑단과 주홍빛 기사단과의 친선 대결 날짜가 잡혔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긴 했죠.”
5년마다 이루어지는 주홍빛 기사단과 청랑단 사이에 친선 대결.
서리스가 청랑단 입단 당시에는 이미 그 대결이 치러진 뒤였던지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서리스는 그게 올해였구나 하고 납득했다.
“왜 하필 겨울에 날이 잡혔답니까? 다치는 사람 나오기 좋게.”
“바르크 쪽에 문제가 좀 있었다고 한다. 그 문제를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더군.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바르크 쪽에서 생긴 문제라.’
턱을 매만지며 이 시기를 떠올려 본 서리스였지만, 이렇다 할 건 없었다.
하긴, 전생에서 이맘때 자신은 아직 소드란 가주도 되지 못했었다.
대가문 간에 있는 사건들을 알 만한 정치적 자리에 올라 있지는 않았으니.
‘불터렉스도 최근 알아본 게 전부고.’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니 굳이 떠올리려 하지는 않았다.
“다 왔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샌가 회의실에 도착했다.
다트론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기에는 이미 도착한 윌리엄과 레가놀이 있었다.
수련을 떠난 뒤로 레가놀이 새로운 청랑호법 후보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서리스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도 인사로 대답하는 사이 서리스는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서리스, 이놈, 못 본 사이 벽을 넘었구나.”
이어 윌리엄이 고얀 놈이라며 장난치듯 말하자, 서리스도 장난으로 받아쳐 주었다.
“2년이나 투자했으니 넘고 와야죠.”
“십 년째 투자해서 못 넘은 나 놀리는 거냐?”
“노력이 부족하신 겁니다.”
“하, 내가 청랑호법만 안됐어도 검만 휘둘러서 벽을 넘었을 거야. 이 자식아.”
서리스의 농담에도 별 타격 없이 윌리엄은 웃어넘겼다.
일하는 걸 귀찮아하는 그이긴 해도 배포가 넓은 사람이었다.
“다들 왔군요.”
때마침 하다크가 걸어 들어왔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하자, 그는 괜찮다는 듯 손짓하곤 자리에 앉았다.
“다들 대강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바르크 가문과 친선 대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언제입니까?”
“한 달 후겠군요.”
그 말인즉슨 저쪽은 이미 출발했다는 소리와 같았다.
“장소는 어떻게 됩니까?”
다트론이 재차 질문을 해 왔다.
“영지 중심지인 펜타니엄 쪽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친선 대결 도중에 끝없는 초롱이나 세계 침식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겁니다만.”
“참가하는 단원을 제외하면 남겨 둬야겠죠. 호법 중에서도 한 분 남아야 합니다.”
청랑단은 세계 침식 스페셜 리스트들이다 보니, 함부로 인원을 빼기 그랬다.
그렇다 보니 주요 인력이 빠진다는 건 위기 대처가 힘들다는 뜻과도 같긴 하나.
“이쪽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습니까? 세계 침식만이 적이 아닌 건 어린 애들도 아는 이야기이니.”
윌리엄이 혀를 쯧쯧 차며 맹점을 집어 왔다.
그 말대로 대가문끼리의 친선 대결이라 하지만, 실상은 서로에 대한 전력 파악이다.
세계 침식이라는 극단적인 인류의 위협이 존재하여 나름 뭉친 것이지.
지금도 대가문 사이 정치적 암투는 끝없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최흉이라는 세계 침식 탓에 대가문 대 대가문으로 충돌하는 일들은 극히 적지만.
그렇기에 이런 식의 친선 대결은 서로가 서로에게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도 있었다.
친선 대결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면 여유가 없다는 것으로 여겨 틈을 파고들려 할 테니까.
‘이래서 정치는.’
서리스는 앞에 놓인 쿠키를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은 채 혀를 찼다.
저쪽도 그걸 감안하여 일부러 보여 주기 식으로 기사단을 직접 보내오는 것일 테니.
청랑단이라고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 침식에만 온전히 전력을 쏟아부어도 최흉 하나 못 없애는 마당에 참 부질없네.”
윌리엄이 현실을 조롱하듯 이야기하자 하다크도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그러지 말게. 청랑단 입장에서도 다른 대가문 소속과 대결하여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지 않나.”
“좋게 말하면 그렇죠. 문제는 세계 침식이랑 맞서야 할 놈들이 사람 쓰러트리는 법이나 배워야 한다는 게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 말대로 친선 대결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사람을 상대하는 법이니.
결국 혹시나 있을 전쟁 대비 용인 게 현실이긴 했다.
“한 달 후니, 미리 인원을 뽑아 준비해야겠습니다.”
윌리엄이 세상 참 잘 돌아간다는 느낌으로 툴툴거릴 동안, 비교적 정상인인 다트론은 곧바로 일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음, 그러네. 인원 차출은 맡겨도 되겠나?”
“예, 잘 뽑아 보겠습니다.”
어차피 혈기 왕성한 사람들은 잔뜩이라.
친선 대결이라 하면 축제라 생각하며 나올 단원들은 많으리라.
회의는 그 뒤로도 별다른 문제 없이 이어졌고, 주홍빛 기사단을 맞을 준비에 대한 계획까지 마친 채 끝났다.
“찌뿌둥하네.”
간간이 의견을 내긴 했지만, 크게 나설 건 없기 때문일까.
서리스는 어깨를 두드리며 아까 마무리 못 한 대련에 아쉬움을 느꼈다.
됐다.
어차피 시간은 좀 있으니 그동안 마저 해도 괜찮을 거다.
“서리스 청랑호법, 잠깐 시간 괜찮나?”
“아, 레가놀 선배.”
“너는 호법이니 선배라 부르지 않아도 된데도.”
“하하, 입에 붙었나 봅니다.”
레가놀에게 예전에 들었던 말이기에 서리스는 멋쩍게 웃었다.
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어른스러운 면이 있는 레가놀에게는 선배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게 더 편했다.
“그래도 이제 같은 호법이지 않습니까? 선배라 불러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아직 후보다.”
“그게 그거죠. 그러고 보니 용천은 어떻게 됐답니까?”
세계 침식자에게 잠식된 용천이다.
후보 건이 나왔으면 분명 무슨 짓거리를 하려 했을 텐데.
“용천 선배님은 청랑단을 떠났다. 여기에 자기가 있을 곳은 없다고 말했다더군.”
“예, 용천이 떠났단 말입니까?”
서리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