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어두운 밤 달빛 아래.
서리스는 구름으로 생긴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두 개의 별빛을 모두 인도한 뒤.
서리스는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는 별을 느꼈다.
지금도 그림자 속 별빛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 오고 있었다.
그동안의 수련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지만.
결과를 놓고 보니 정말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앞길을 막았던 그릇의 문제도 이제 완전하게 해결되었다.
남은 건 요치아를 통해 제왕월영도를 제대로 배울 일만 남은 것.
‘일리가 있나.’
본래라면 성장한 경지와 육체에 기뻐 마지않아야 할 서리스였지만.
서리스의 얼굴에는 기쁨 대신 근심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는 지금 한 가지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자신의 목 뒤에서 빛 나는 별들 아래에 있었다.
자신도 어서 해방해 달라고 미친 듯이 아우성치는 존재.
그것은 다름 아닌 검은별이었다.
그랬다.
서리스가 낮에 인도한 것은 펜타니엄과 소드란의 별뿐.
검은별의 부적은 여전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고 서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개의 별을 인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했다면 정신을 잃고 별에 휘말려 주화입마(走火入魔)라도 당했을지 모를 노릇의 검로였다.
그런데 그런 두 개의 별보다도 강력한 검은별이라면.
서리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부적을 쭉 붙여 두고 싶지만.
서리스가 다른 두 개의 별의 힘을 받아서일까.
부적에도 불구하고 검은별은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요동쳤다.
‘이대로라면 폭발한다.’
자기 멋대로 폭주하게 둘 바에야 제 손으로 해결하는 게 낫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아까의 여파로 몸이 쑤시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늦은 시간에 나온 것이었다.
“후우.”
시간을 더 끌어봤자 의미는 없다.
서리스는 목 뒤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간다.”
뜯자.
인도하면 그만이다.
“젠장, 나중에 할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감이 안 생기던 서리스가 손을 주춤거렸을 때.
휘잉!
그 순간 불어온 바람과 함께 서리스는 자신의 눈앞에 흩날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오늘 보았던 익숙한 노란색.
그 끝에 한 줌의 어둠.
그것이 어디에 붙여져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서리스는.
“씨X.”
욕설 한 번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방금까지 자신을 감싸던 별빛은 물론 하늘 위 달조차 사라진 것이.
서리스의 오감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어서 빨리 이곳에서 달아나라고.
오감이 소리치고 있었지만, 서리스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로 향한 동공이 눈앞에 목격한 것을 담아 내며 미친 듯이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 위 검은별.
본래는 먹물 같은 어둠만을 뚝뚝 흘리던 그 별이 마치 여인의 새까만 머리카락처럼 서서히 흘러내렸다.
미지의 공포 앞에 서리스는 순간 숨 쉬는 것조차 잊었지만.
곧바로 전신에 별을 끌어 올리며 공포와 맞섰다.
‘짓눌리면 안 된다.’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검은별의 힘 앞에 눌리는 순간.
모든 게 검은별에게 삼켜질지도 모른다고.
‘내가 자제력을 잃으면.’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것을 흡수해 온 검은별은 즉시 세계 침식으로 변모할 것이다.
그런 걸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다.
서리스의 손아귀에 어느샌가 그림자 검이 쥐어졌다.
낮과 같이.
아니, 그때보다 더 전력으로!
‘인도한다.’
콰과과과과광!
어둠에게 어찌 소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리스는 쏟아져 오는 어둠과 함께 전신에서 진동을 느끼며 검을 앞으로 뻗었다.
이윽고 어둠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서리스는 그것이 자신을 집어삼키기 전 검로를 그렸다.
그림자는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지난 시간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설령 그림자보다 더욱 진한 어둠이라고 할지라도.’
그림자는 모든 걸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도하기 위해 서리스의 육체에 금강잔월이 강렬히 깃들었다.
금강잔월의 조화는 서리스의 인도를 보다 완벽히 이루어 내었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서리스는 오로지 검에만 모든 집중력을 쏟았다.
모든 어둠이 서리스의 인도를 따라 그림자로 향하고, 그림자 또한 탐욕스럽게 어둠을 집어삼켜 갔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지나.
번쩍!
서리스가 눈을 뜬 순간 저 멀리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아, 하.”
입에서 오랫동안 참았던 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떠오르는 태양의 빛에 거대하게 늘어진 그림자는 어느 때보다 짙은 흑색이었다.
서리스가 천천히 그림자 검을 들어 올렸다.
그간 청운귀명으로 만들어진 그림자 검은 검은색 바탕 위로 다른 색들도 보였으나.
지금 서리스의 눈에 비치는 검은 오직 새까만 흑색만이 보였다.
‘아니.’
검을 내려다보던 서리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별빛이 그림자 검에 깃들기 시작하자 검 위 어둠이 서서히 걷혀가고 진한 기운을 머금은 도신이 드러났다.
뚜욱 뚝.
그림자 검 끝에 맺힌 어둠이 한 줌의 방울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서리스가 검을 아래로 내리자 그에 따라 대기가 일부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라도 되는 양.
세계가 서리스의 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강해졌다.”
이전과 달리 검은별의 힘이 훨씬 강해졌음을 깨달은 서리스가 묘한 눈빛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그림자 속 꿈틀거리는 검은별의 힘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 증거로 서리스가 만든 그림자 검에도 검은별이 진하게 묻어져 있었다.
“하, 진짜 이제는 내가 사람인지, 세계 침식자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기분이다.
하지만 몸에서 흘러나오는 힘만큼은 서리스 자신의 힘이었다.
“그래, 사람이면 어떻고 세계 침식자면 어떠하랴.”
내 인생 내가 바르게 살면 그만이거늘.
그림자 검을 지운 서리스가 검로를 그리느라 지친 몸을 기지개 켰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서리스가 두 손을 허리 위로 올렸다.
올해로 19살.
반년 뒤, 서리스는 그토록 고대했던 워너힐 아카데미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필기시험도 있다고 했던가.’
실기가 가장 중요하긴 하나 세계 침식 및 여러 학문과 관련된 필기시험도 분명 있다고 들었다.
그 사실을 안 서리스가 마른세수를 한 차례 했다.
‘준비해야 할까.’
적어도 올해 시험에 어떤 문제가 나왔는지 정도는 알아봐야겠지.
“아침부터 어딜 기어 나왔느냐.”
그런 생각을 품던 도중 서리스는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막 산에 오른 듯한 요치아가 있었는데, 기다랗게 하품을 하는 걸 보니 방금 일어난 모양이었다.
‘보신 건 아니겠지.’
혹시나 검은별을 다루는 걸 봤을까 싶어 서리스가 살짝 긴장하자, 그를 보던 요치아의 눈이 찌푸려졌다.
“네놈, 간밤에 무슨 짓을 했느냐?”
서리스의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동안 요치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만 해도 별이 폭주해서 출력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더라니.’
지금 서리스는 별이 안정되다 못해 고요할 지경이었다.
본래 벽을 막 넘은 녀석들은 대부분 별을 제대로 조절 못 해 엉망이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하루 아침에 그 많은 양의 별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고?’
서리스는 남들보다 별을 몇 배나 많이 지니고 있다.
당연히 많을수록 그 조절이 어렵고, 실제로 서리스는 처음 만났을 때 별을 조절 못 해 몸 전신에서 별이 흘러나왔었다.
저건 평생 가도 조절 못 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걸 할 수 있게 됐다, 라.’
애들은 빨리 큰다고 하긴 했는데.
저놈은 빨리 커도 너무 빨리 크고 있지 않나.
“뭐, 됐다.”
재능 있는 놈은 뭐든 되는 법이니.
요치아는 신경을 끄고 발아래에서 그림자를 뽑아 검을 만들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요치아가 아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서리스가 바짝 긴장하자, 요치아는 검을 붕붕 휘둘렀다.
“왜긴 왜야. 시험하고 싶을 거 아니냐.”
“예?”
“벽을 넘었으니 써먹어 보고 싶은 건 다 똑같으니라.”
‘그 이야기였나.’
안도한 서리스가 요치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서리스는 지금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기 그지없었다.
1년 반 만에 되찾은 별이다.
그 별이 이전보다도 훨씬 강해진 상황이니 당연히 시험하고픈 건 당연지사.
“다치셔도 모릅니다.”
“노부가 네놈 같은 애송이에게 당할 턱이 있나.”
“그럼 오늘 아침밥 차리기 내기하시죠.”
서리스의 도발에 요치아가 같잖은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 당돌한 놈 네놈이 옷깃이라도 스치면 노부가 고봉밥을 쌓아 주마.”
그 말을 들은 즉시 서리스가 도약하고 그의 그림자 검이 휘둘러졌다.
참고로 당연한 결과지만.
서리스는 요치아의 밥상에 고봉밥을 채워야 했다.
망할 영감은 여전히 더럽게 강했다.
* * *
서리스가 처음 왔던 때와 같이 어느샌가 겨울 초입에 들어선 엘리자.
“오늘이더냐.”
짐을 싼 서리스가 가방을 들어 올린 순간 그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복도에 선 요치아가 있었다.
“예, 이제 이만 가야죠.”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청랑단 일과 시험 준비 등 미리 해 둬야 할 게 몇 개 있었다.
그렇기에 겨울이 끝나기 전 서리스는 산에서 내려가고자 짐을 싼 것이었다.
“쯧, 아직 검이 엉성하기 그지없건만.”
“요치아 님 눈에나 그렇겠죠.”
지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리스는 스스로도 확실한 성장을 느꼈다.
매일 투덜거리는 요치아에게도 종종 서리스에게 방금 검이 괜찮았다고 칭찬받을 정도였으니까.
“이제 저 없으니 외로우시겠습니다.”
“조용하니 좋기만 하겠구나.”
2년간 요치아의 대화가 익숙해진 탓일까.
서리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마지막까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요치아 님.”
“뭐냐.”
“같이 내려가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지난 시간 동안 서리스는 요치아가 쓰러진 모습을 몇 번인가 더 보았다.
그의 경지는 여전하나 육체는 확실하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것이다.
‘실제로 앞으로 1년 뒤면.’
요치아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과거, 그가 산에서 내려온 지 1년 만에 치른 장례식이 그 증거였다.
그랬기 때문에 서리스가 제안을 해봤지만, 요치아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시끄럽다. 이놈아. 생에 마지막까지 검을 휘둘러야 검수 아니겠느냐.”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리스의 눈에 걱정이 깃들어 있음을 눈치챈 걸까.
그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조만간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네놈을 보니 좀 더 해 보고 싶더구나. 원래 불씨도 마지막에 더 화려하게 타오르는 법이니 말이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서리스도 할 말은 없었다.
가방을 멘 서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곤 자신을 따라 나온 요치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워너힐 아카데미 졸업 후 또 찾아오겠습니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서리스는 미래를 알고 있다.
요치아도 자신의 수명을 깨닫고 있다.
둘은 작별 인사 대신 다음을 기약했다.
“그만 가거라.”
요치아의 가옥 문이 닫히고 서리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다음을 기약한 것처럼 자신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