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엘리자 산맥 어딘가.
산과 마을을 오간 탓인지 이제 제집 앞마당처럼 편한 엘리자 산이었다.
가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눈으로 뒤덮인 공간.
서리스는 어김없이 목검을 쥐고 섰다.
“쓰읍.”
그가 조용히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집중하듯 목검을 내려 본 서리스가 천천히 검로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려진 검로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밤하늘 아래 자리한 호수의 수면 위가 이런 느낌일까.
고요함을 담은 검의 선로는 어찌 보면 춤사위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검로는 차츰 변해 갔다.
맹수가 사냥을 위해 자세를 낮추듯.
서리스의 검로에는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긴장감은 곧 패도적인 기세를 쏟아 내었다.
터져 나오는 서리스의 기세는 대기마저 저릿저릿하게 만들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심어 줄 만큼 그 기세가 폭발적이었다.
한참을 휘둘러진 검로가 끝마쳐졌을 때.
“후우.”
길게 내쉰 호흡과 함께 조금 전 일이 거짓말같이 느껴질 정도로 금세 모든 기세가 종적을 감추었다.
“꼴을 보니 이제 완전히 무르익은 모양이구나.”
“언제 오셨습니까.”
“네놈이 숨 들이켤 때부터이니라.”
서리스가 고개를 돌린 장소에는 검제 요치아가 서 있었다.
늘 그렇듯 뒷짐 진 자세인 그는 서리스를 보며 어딘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평소 저런 웃음을 잘 짓는 사람은 아니나, 서리스의 성과는 그조차 헛웃음 짓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작년 봄부터 시작해 올해 가을까지.
1년 반 이상을 검 수련에만 보낸 서리스.
그런 그의 검술은 과거 요치아가 보여 주었던 두 개의 기세를 고스란히 담을 줄 알게 되었다.
“깨달은 게 있더냐.”
“검이 왜 휘두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우습게도 그걸 깨달은 건 최근이었다.
이러한 검로를 휘두르기 위해 1년 반을 꼬박 투자했건만, 직전까지도 서리스는 몰랐던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게 참, 깨닫고 나면 이리 쉬운 건데.’
그 벽을 뚫기까지가 왜 이리 힘든지.
지난 1년 반 동안 죽어라 휘둘렀던 검이 깨달음과 함께.
얼마나 멍청해 보였는지 떠올리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이제는 더 성장 못 할 거라 생각한 근육이 더 단단해졌음을 느낄까.
‘덕분에 이제는 별 없이도.’
괴랄한 육체 능력을 지니게 된 서리스였다.
“이제 그걸 뗄 시간이 온 모양이구나.”
그 순간 들려온 말에 서리스가 흠칫하고 요치아를 돌아보았다.
요치아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뗍니까.”
“그래, 하지만 당장 좋다고 떼지 마라. 부적을 뗀 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줄 생각이니.”
지난 1년 반.
별 없이 수련해 왔던 서리스는 어딘가 들뜬 마음이었다.
지난날 오직 육체 능력으로만 단련하기 위해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던가.
‘없을 땐 몰라도 한 번 있고 나서 없으니 얼마나 불편한지 깨달았지.’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기억 못 한다고.
서리스는 별이 없는 시절이 이렇게 힘들었던 줄은 몰랐다.
“그래서 가르쳐 주실 게 무엇입니까?”
“놈, 성질머리 한번 급하기는. 별이란 아무리 단절시켜 놓는다고 한들, 이어진다는 건 기억하느냐.”
그야 잘 알고 있다.
부적이 막고 있긴 하나, 서리스는 여전히 자신과 별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니까.
침묵을 긍정이라 받아들인 듯 요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말을 이어 갔다.
“네놈과 이어진 별은 계속해서 별을 보냈을 테지만, 부적의 인위적 단절로 쭉 막혀 있었다. 그러니 부적을 떼는 순간 별은 기회라는 양 별을 쏟아 놓겠지.”
“본래보다 많아진다는 소립니까?”
가뜩이나 별 출력량이 몇 배나 높은 서리스다.
그보다 많은 별이 쏟아지면 몸이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걸 노린 게다.”
하지만 그런 서리스의 걱정이 무색하게 요치아는 오히려 그 점을 꼽았다.
“대량으로 쏟아지는 별은 네놈의 그릇이 견디지 못하고 주위로 넘칠 것이다.”
“그래서는.”
“그래, 전부 땅에 내다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거기서 네놈은 그 별을 그림자에게로 인도해야 하느니라.”
요치아는 서리스가 쥔 목검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동안 가르친 것은 그걸 위함이었다는 듯.
요치아의 뜻을 알아차린 서리스가 목검을 들어 올렸다.
“검로에 뜻을 담아라. 네놈은 이제 그 방법을 알지 않느냐.”
쏟아져 나오는 별들을 그림자로 인도하는 법.
그 사실을 지난 시간을 통해 배운 서리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뜯거라.”
서리스의 결심을 알아챈 요치아가 입을 연순 간 서리스의 손이 목 뒤에 붙인 부적에 닿았다.
조금은 긴장한 듯 한 차례 숨을 몰아쉰 서리스가 부적을 쫘악 뜯은 순간.
서리스는 요치아의 입에 걸린 사악한 미소를 목격했다.
저 웃음은 분명 서리스가 고생할 때 그가 자주 짓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별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아니나 다를까, 입꼬리가 올라간 그의 입술이 열리고.
“그 충격은 네 몸이 고스란히 견뎌야 할 터이니 잘 기억해 두거라.”
서리스가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눈앞이 아득하게 변했다.
하늘 위 두 개의 별.
소드란과 펜타니엄이.
서리스가 부적을 뜯는 순간에 맞춰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세게 그 빛을 쏟아 내었기 때문이다.
쿠궁!
마치 산사태가 일어나기라도 한 양.
서리스는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는 별 무더기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요치아의 경고가 없어도 잘 알 수 있었다.
저 별을 인도하지 못하는 순간, 압살함과 동시에 이 세상과 안녕을 고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으득.”
이를 악물며 서리스는 전신에서 힘을 끌어 올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별이다.
겁먹을 이유 따위 없었다.
‘늘 제 것처럼 다루던 그때와 같이.’
서리스의 목검이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쏟아지는 별 아래.
서리스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별빛이 서리스를 집어삼켰다.
성장한 서리스의 육체에도 불구하고 별은 순식간에 그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폭주하듯 날뛰었다.
그 탓에 서리스는 오장육부가 비틀리고, 몸 내부가 망치에 두들겨 맞는 느낌을 받았으나 악착같이 버텼다.
초인적인 정신력이 그를 억지로 붙든 그 순간.
찰랑.
서리스의 몸을 가득 채워 버린 별이 넘쳤다.
‘지금.’
검이 앞으로 뻗어져 나갔다.
수천, 수만, 수백만 번을 더 넘게 휘두른 검은.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자신을 짓누르는 별빛 속에서도 검로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리스의 그림자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마치 그를 중심으로 벽을 세우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장벽과 같이 치솟은 그림자의 아래에서 서리스는 별들을 인도해 나갔다.
흘러넘친 별들을 그림자에 온전히 전하기 위해.
그의 정신이 이제껏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빛난다.’
검로를 타고 흘러 들어간 별빛이 그림자 속에서 빛났다.
광활한 밤하늘 속.
은하수가 수놓아지듯.
그림자는 무한히 떨어지는 별빛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탐욕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모든 것을 포용해 줄 수 있을 만큼 너무도 큰 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하늘 위 두 개의 별은 서리스에 맞추어 더더욱 거세게 그 빛을 빛내었다.
소드란의 별빛도.
펜타니엄의 별빛도.
이 순간만큼은 조화를 이루며 오직 서리스의 검로를 따라 움직이었다.
서리스의 목검이 어느샌가 그림자 검으로 바뀌었다.
제 뜻을 따라 움직이는 두 별빛은.
일월합벽(日月合闢)이라 할 수 있었다.
‘기어코 해낼 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서리스를 먼발치에서 바라본 요치아가 대견한 듯 콧방귀를 내쉬었다.
지난날 가르친 것이 덧없지 않았다는 듯.
서리스는 지금, 이 순간 끝없이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싹은 이제 완전히 꽃을 피웠다.’
처음에는 제자 따위 생각도 안 했다.
알리즈가 있긴 했지만, 옛날에 잠깐 했던 것처럼 검이나 좀 가르쳐 줄 뿐.
지금에 와서 자신의 제왕월영도를 완전히 이을 수 있는 놈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완성이었으니.’
요치아는 어딘가 씁쓸한 표정과 함께 자신의 늙어 버린 육체를 내려다보았다.
제왕월영도를 만들어 낸 지 몇십 년.
이놈의 육체는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썩어져 가 이제는 틈만 나면 비명을 질렀고.
제왕월영도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환골탈태(換骨奪胎)도 세월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어린아이로 돌아가 다시금 삶을 사는 반로환동(返老還童)을 노리고 산속에 들어왔으나.
아쉽게도 그것과는 연이 아닌 듯 소식은 없었다.
‘노부의 한이라면 한이었다.’
제왕월영도를 제 손으로 완성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을 가진 채 요치아는 지금까지 검을 휘둘러 왔다.
그러나 전성기를 지나 버린 육체는 더 이상 제 뜻을 따라 줄 마음이 없었다.
이제는 포기해야 할까 할 때.
나타난 것이 바로 서리스였다.
처음에는 그저 한풀이였다.
쓸만한 놈이었고, 재능 하나는 특출 난 놈이었으니.
혹시나 제왕월영도의 명맥이라도 이어 줄까 싶었다.
하지만 웬걸.
보통이라면 질려서 도망갈 수련을 매일같이 받고.
늙은 몸 탓에 갈수록 날카로워진 자신의 투정도 받아 주며.
서리스는 하루가 갈수록 다른 사람처럼 성장해 나갔다.
마치 자신이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괜찮다는 듯한 그 자세는.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가 할 눈과 의지가 아니었다.
‘저 또래에 저 수준이라면 충분히 만족하고, 그를 과시하며 자만심에 빠질 만도 한데.’
서리스는 달랐다.
어린 녀석이 무엇이 그리 생각할 게 많은지.
때때로 그의 눈 안에 깃든 생각에 요치아도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검을 휘두를 때만큼은 검만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저놈은 기어코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깨달음을 쟁취하고, 날아올랐다.
‘늑대 새낀 줄 알았더니 호랑이지 않으냐.’
그것도 보통 호랑이 새끼가 아니라 왕의 새끼였다.
‘저놈이라면.’
이 한을 풀 수 있을까.
청운귀명도를 통해 만들어진 제왕월영도가 하늘 위 우뚝 서는 것을.
‘노부가 이룩 못한 것을 한참 어린놈에게 맡겨 버리는 건 탐탁지 못하긴 하지만.’
요치아의 눈에는 빛나고 있는 서리스의 모습 위로 제왕월영도를 휘두르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세상일은 모를 노릇이구나.”
다른 삼무제 녀석들이 직속 제자를 키우는 걸 보며 비웃던 자신이 제자에게 기대를 걸 줄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날아오르거라.”
하늘 위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세게 드높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떠올린 채로 요치아는 그렇게 호탕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