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봄이 코앞으로 왔다.
그동안 가져온 짐을 싼 알리즈는 가방을 등에 메었다.
원래도 들고 오기를 많이 들고 오지 않았기에 가방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형님, 가십니까?”
“응, 슬슬 시험 시기라서 이제는 정말로 가야지.”
문 앞에 나오자 수련을 빨리 끝내고 온 서리스가 마중 나왔다.
그는 땀방울을 닦아 내곤 알리즈의 가방을 힐끗 보았다.
앞으로 서리스는 워너힐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을까.’
차라리 여기서 제압해 두고 워너힐 아카데미 입학을 막는 게 알리즈 입장에서도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검에 유달리 집중하던 알리즈를 보고 있으니, 서리스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노력은 진짜였으니까.
“형님,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딱히 없습니다만.”
그를 보내며 부디 그가 예전보다 더 굳건하길 빌 뿐.
“만약 아카데미에 형님을 모욕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전 망나니였던 제가 죄다 머리털을 뽑아 버리겠습니다.”
“뭐? 푸하핫, 그게 무슨 소리야.”
서리스의 이야기를 농담으로 들었는 듯, 알리즈는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끝까지 갑시다. 큰형님과 샬롯은 신경 쓰지 말고, 형님 본인을 좀 더 믿어 주세요.”
“……서리스.”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알리즈가 머금었다.
서리스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그래야 저도 아카데미에서 형님 얼굴 보러 입학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무려 같은 스승을 뒀던 사이니까요.”
“그래. 네가 날 이렇게나 생각해 줄 줄은 몰랐어.”
알리즈는 서리스의 어깨를 손으로 토닥였다.
“고맙다. 형 먼저 가 있을게. 얼른 와!”
“예, 형님.”
그 말을 끝으로 알리즈가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요치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키운 제자 한 명이 하산하는데 모습도 안 비추고 너무한 영감이다.
“요치아 님, 어디 계십니까. 알리즈 형님이 갔습니다.”
떠나간 알리즈를 뒤로하고 서리스는 가옥 안으로 들어섰다.
서리스와의 수련 때도 안 보이고, 또 어디서 혼자 검이나 만지고 있는 건지.
“검제, 대답이라도 해 주십쇼.”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전 검제, 노망난 꼰대 영감.”
마지막 말을 조용하게 속삭일 찰나.
서리스의 발이 우뚝 멈추어 섰다.
햇볕이 들지 않는 곳.
그 그림자 아래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아무리 검제로서 지고한 경지에 이른 자라도 그는 증조할아버지다.
지금까지 저렇게 정정하게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일 정도로 나이를 먹은 노인인 것이다.
“요치아 님!”
달려든 서리스가 서둘러 요치아의 맥을 짚었다.
옅게 흘러나오는 숨소리가 썩 좋지 않았다.
“으, 으으.”
정신을 차린 듯 요치아가 눈을 희미하게 떴다.
“의사에게 데려가겠습니다! 조금만 견디세요!”
“됐, 다. 괜, 찮으니라.”
“쓰러지셔 놓고 무슨 헛소리십니까. 노망나도 병원은 가셔야죠!”
“예끼, 이놈, 아 노부가 쓰러, 졌다고 만만하느냐.”
서리스의 만류에도 요치아는 손을 휘적휘적하곤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의 서둘러 부축하자 요치아는 혀를 차더니 방을 가리켰다.
“방 안에 약이 있느, 니라. 데려가 주, 거라.”
아직 정상이 아닌 듯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요치아를 데리고 서리스는 서둘러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요치아의 지시에 따라 약과 물을 서둘러 그에게 건네주었다.
서리스에게 약을 받아 삼킨 요치아는 한결 나은 표정으로 이불에 누웠다.
아직 쓰러질 때 어지러움이 남아 있는 듯 눈을 깜빡이곤 그가 입을 열었다.
“알리즈는 갔느냐?”
“예, 아까 전에 갔습니다.”
“그놈 제 가르친 스승 얼굴 한 번 안 보고 가 버리는구나.”
“성격이 괴팍하시니 가는 사람 얼굴 안 보겠거니 했겠죠.”
“네놈, 가면 갈수록 노부에게 대드는구나? 어디 한 번 노부가 오래전에 숨겨 둔 정신개선권이라도 맞아 볼 테냐.”
“상태도 안 좋으신데 손 좀 내리세요.”
서리스는 노려보는 요치아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이럴 때라도 좀 놀려 놔야지 언제 놀려 보겠는가.
“그것보다 왜 쓰러지신 겁니까. 지병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동안 서리스가 보아온 요치아는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건강했다.
그렇기에 그가 쓰러진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큰 충격이었다.
“늙었으니 그런 게다. 늙은 게 죄지.”
할 말은 없었다.
요치아의 연세를 감안하면 언제든 이렇게 돼도 이상한 것은 없었으니까.
“혹시 최근 저 때문에 무리하셔서 그런 것 아닙니까.”
“고작 네놈 하나 가르치는데 노부가 무리할 게 뭐가 있더냐?”
요치아는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훅 내쉬었다.
그러곤 서리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켰다.
“네놈도 아카데미로 간다고 하였지.”
“전 아직 한참 남았지만요.”
“가면 알리즈 그놈 좀 챙겨 줘라. 동생이 형도 위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알리즈가 품은 감정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듯.
요치아의 말에 서리스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 얼른 나가서 다시 검 휘두르지 않고. 노부의 제왕월영도를 얼른 이어받아야 할 것 아니냐.”
그의 재촉의 서리스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성내는 걸 보면 아직은 몸이 괜찮은 모양이다.
“또 쓰러질 거 같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세요.”
“노부가 무슨 매일 쓰러지는 줄 아느냐. 쓰러져도 네놈한테는 도움을 안 청할 것이니라.”
“시신 수습은 해야지 않습니까.”
곧 서리스는 날아오는 각종 물건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내게 시간이 흐르듯 누군가에게도 끝을 향해 시간은 흐른다 이건가.’
목검을 쥔 서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적어도 요치아의 기대만큼은 보답해 주자는 생각을 품은 채로.
* * *
서리스가 사라지고 1년.
업무를 보고 있던 청랑단주 하다크는 잠깐 눈을 떼곤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오랫동안 서류를 들여다보아서인지 눈이 침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만 하시다가 쓰러지십니다.”
그런 순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윌리엄 자네도 마찬가지지 않나.”
청랑호법 고든 윌리엄은 어젯밤 야근까지 해 가며 자신과 같이 일을 처리했다.
최근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
“이래서 청랑호법 더 늘리자는 거 아닙니까. 서리스, 그 녀석은 쓸만했는데.”
서리스가 있던 기간 동안 일들이 확연하게 줄었던 것을 떠올린 채 윌리엄은 혀를 찼다.
윌리엄은 서리스의 무위도 무위였지만, 그의 진가는 다른 데 있었다.
벌써 청랑호법이 된 지 몇 년 차인 자신조차도 놀랄 만큼 뛰어난 서류 처리 실력.
펜타니엄 직계에다가 한참 어린 녀석이 어떻게 그리 빨리 서류를 처리하는지.
서리스가 활동해 줄 동안 일손이 얼마나 줄었는지 모른다.
“그냥 다시 오라 하면 안 됩니까?”
“서리스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펜타니엄은 안전해지네. 미래를 생각하면 이게 훨씬 옳지.”
그 말에 윌리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그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서리스는 청랑단 소속이기 이전에 펜타니엄 직계다.
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펜타니엄에는 큰 패가 생기고.
그것은 곧 펜타니엄의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청랑단 또한 세계 침식에서 펜타니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니까.
서리스의 성장을 윌리엄도 충분히 용납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럴 거면 호법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그때그때 재능 있는 자에게 줘야 하는 법 아니겠나.”
하다크의 거친 웃음소리를 들으며 윌리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다 퍼 주는 저 성격은.
은퇴하기 전까지 못 고칠 모양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후보는 있지 않은가.”
똑똑.
하다크가 말한 순간 때마침 누군가 노크를 했다.
하다크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열자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큰 덩치의 남성이었다.
남성의 정체는 레일로 레가놀.
청랑단 48기 멤버이자.
현재 새로운 청랑호법 후보였다.
서리스가 수련을 위해 산에 들어간 이후, 하다크는 청랑호법 자리를 하나 더 늘렸다.
혹시나 서리스가 수련 도중에 청랑호법 자리를 신경 쓸까 싶어 해 준 배려였다.
덕분에 새로 생긴 자리에는 처음에는 용천이 거론되었으나.
용천에게서 몇몇 수상한 정황을 파악했던 하다크는 그를 제외하고 레가놀을 후보로 올렸다.
“청랑단 48기, 49기, 방금 막 귀환 마쳤습니다.”
“고생했네.”
하다크가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레가놀은 경례를 올렸다.
“레가놀.”
하지만 그런 그가 나가려 하는 도중 윌리엄이 그를 불러 세웠다.
“서류 정리 좀 도와라.”
“예, 알겠습니다.”
레가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윌리엄 옆에 앉았다.
“다른 놈들도 너처럼 말을 잘 들으면 좋겠건만.”
“다들 말 잘 듣습니다.”
레가놀의 대답을 듣고 윌리엄은 큭큭 거리며 웃었다.
“웃기지 마라. 문제아 녀석들은 내가 잘 안다.”
윌리엄이 가리킨 문제아라는 말에 레가놀은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가 가리키는 문제아는 다름 아닌 53기와 제로였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들 서리스가 있을 때는 몰랐다만. 각자 성격이 너무 튄다.”
“아카펠은 점잖습니다만.”
“아카펠로는 안 잡히는 녀석들이라 문제다.”
서리스가 수련을 떠난 후 여러 일이 있었다.
“분명 서발광은 과도한 수련으로 탈진한 채로 발견된 게 벌써 다섯 번.”
“어제 또 한 번 쓰러졌습니다.”
“그래, 여섯 번. 도로시는 서리스가 사라지니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의 영혼이 되어 버렸지.”
“세계 침식 지원 때에는 꼬박꼬박 나옵니다.”
“제로는 서리스와 똑같은 절차를 밟겠다면서 세계 침식에 무작정 가서는.”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습니다.”
“보통 4성쯤 되어 가는 애가 넘어진다고 팔이 부러지냐?”
레가놀은 다시금 시선을 피했다.
“각자 서리스를 의식해서 그러는 걸세. 제각기 노력 중인 것이니 너무 그러지 말게나.”
“알고는 있죠. 알고는.”
하다크의 말에 혀를 차며 윌리엄은 다시 서류 정리에 집중할 뿐이었다.
투덜거리는 그지만, 내면에서는 그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하다크는 인자한 웃음을 띠었다.
‘우습게도 사람은 앞서가는 자가 있을 때 더 성장하는 법이지.’
쫓아갈 때 넘어져서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다크는 그렇게 생각한 채로 다시금 서류 정리에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