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휘익휙!
대기를 가르며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울려 퍼졌다.
겨울이 가고 완전한 봄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엘리자 산은 여전히 눈으로 덮여 있었다.
“후우.”
조그맣게 새 나온 숨소리와 함께 서리스는 휘두르던 검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아직 저물지 않은 태양이 보였다.
‘며칠째더라.’
하루 종일 검만 휘두른 탓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확실한 건 서리스는 이제 꽤나 수월하게 만 번의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떠냐. 이제는 눈 감고도 내리칠 수 있겠느냐.”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을 보고 있으려니 요치아가 다가왔다.
“매일 휘둘렀으니까요.”
“그럼 이제 조절할 때가 됐구나.”
무턱대고 내려치는 건 끝이라 이건가.
요치아는 서리스에게 목검을 받곤 휙휙 휘둘렀다.
그러곤 서리스가 하던 내려치는 자세를 잡았다.
“검이 왜 만병지왕이라 불리는 줄 아느냐.”
모든 무기의 왕.
그걸 일컫는 만병지왕이라는 말에 서리스는 입을 열었다.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 말도 맞지만, 더 중요한 것은 휘두르는 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니라.”
요치아는 서리스가 휘두르던 것과 같이 아무렇지 않게 검을 내려그었다.
그 검격은 무척이나 깔끔했지만, 어떠한 힘도 실려 있지 않아 보였다.
“그렇기에 검은 까다롭다. 둔기는 백번을 휘두르면 하나를 깨우치고, 창은 천 번을 휘두르면 깨우치나. 검은 만 번을 휘둘러야 깨우칠 수 있으니까.”
목검이 또 한 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요치아 주변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러나 깨우치는 순간, 검에 담긴 깨달음은 다른 무기를 달리한다.”
천천히 아주 고요하게.
요치아의 검은 화려하게 타오르는 태양마저 감싸 버릴 듯.
내리그어졌다.
서리스는 아까와는 다르게 그 검격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지 못할 거란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잘 보아라. 깨달음이 닮긴 검이 어떤 검로를 보이는지. 그리고 이것이 네놈이 배워야 할 제왕의 검이니라.”
그리고 요치아가 검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요동쳤다.
솟아오른 그림자가 자신들의 왕을 칭송하듯 요치아를 따라 움직였다.
그가 쥔 목검이 그림자에 뒤덮여 새까맣게 변했다.
그 순간 주위가 새까맣게 변했다.
방금까지 새파랗던 하늘에.
어느샌가 밤이 드리웠다.
그리고 밤의 중심, 거대한 별 하나가 거세게 요치아를 빛냈다.
요치아의 뒤편에 자리한 산보다도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그림자를 집어삼킨 그 거대한 검은 요치아의 검로를 따라 보이지 않는 거인이 휘두르는 것처럼 똑같이 휘둘러졌다.
쿠구구구궁!
서리스는 그 후폭풍에 의해 튕겨 날아가지 않으려 악착같이 버텼다.
“윽?!”
저릿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피부가 달달 떨리고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세계를 멸망시켜 버릴 듯한 그림자 검은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였다.
그림자 세계의 제왕이 강림한 순간이었다.
후욱!
그리고 그림자는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그가 제왕임을 증명하듯 요치아가 검로를 멈춘 순간 동시에 그림자는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다.
서리스는 주저앉은 채로 눈을 끔뻑이었다.
대체 지금 자신이 뭘 본 걸까.
검을 멈추고 서리스를 돌아본 요치아는 땀과 함께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잘 보았느냐? 이게 바로 네놈이 익혀야 할 제왕의 검.”
요치아의 목검 위, 그림자가 빛을 집어삼키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왕월영도(帝王月影刀)이니라.”
저런 걸 익히라니.
가능할까.
서리스의 뇌리에는 그런 생각만이 맺혔다.
솔직하게 말해 방금 건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섰다.
동시에 어째서 요치아가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 이 검술을 전수해 주지 못했는지도 깨달았다.
이건, 정말 별에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선 자들이어야만 가능할 테니까.
어쭙잖은 재능은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요치아 님, 이런 검술이 있다면 최흉의 주인들도 쓰러트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정도 위력의 검술이다.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얼 못 상대하랴.
서리스가 의문을 품고 묻자 요치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불가능했느니라.”
하지만 요치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서리스의 몸을 얼어붙게 했다.
불가능했다는 말이 뜻하는 바는 요치아는 최흉의 주인과 맞붙어 보았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런 상식을 벗어난 비기조차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소리고.
“노부가 이 검술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은 끝없는 초롱 기준으로 큰 주인들까지였으니까.”
어딘가 아쉬운 듯 요치아는 쥐고 있는 목검을 내려보았다.
“최흉의 주인은 차원이 다르니라. 그들은 노부와 같은 자들이 몇 명이고 힘을 합쳐도 닿지 못하는 영역에 있으니.”
“썩어 빠진 세상이네요.”
“그러니 후대에게 물려주는 것 아니겠느냐.”
요치아의 손가락이 하늘로 향했다.
수많은 선조들이 담아 둔 가문별의 힘.
분명 머나먼 후대에는 최흉의 주인들을 이겨 내길 바라며 그들은 눈을 감았겠지.
“그래도 걱정 말거라. 익힐 수만 있다면 현 세계 최강은 네놈이 될 수 있을 터이니.”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없어집니다만. 저걸 익히려면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 겁니까?”
“딱 죽을 정도로만 하면 되느니라.”
“제자, 그만두겠습니다.”
“노부의 눈에 들었는데, 도망칠 수나 있겠느냐?”
농담이 아닌 진심으로 눈을 부라리는 요치아였다.
참 괴팍한 영감이라고 생각하며 서리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세계 침식자는 어떻습니까?”
최흉의 주인은 규격 외이니 제외해 두고.
당장 불터렉스를 포함해 세계 여기저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세계 침식자들은 골칫거리다.
그리고 어렴풋이 서리스는 그러한 세계 침식자들과 맞붙게 되리란 걸 느끼고 있었다.
서리스의 물음을 듣고 요치아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까 전 노부가 했던 말이 기억 안 나느냐?”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날카로이 빛났다.
“익히기만 한다면 현 세계 최강은 네놈이 될 거라고. 천하제일인이라는 말은 아느냐?”
“완전 구닥다리 말이네요.”
요치아에게서 날아든 목검을 턱 하니 받은 서리스는 목검을 바로 쥐었다.
요치아의 말뜻은 잘 알았다.
천하제일인.
참 옛날에 쓰이던 말이었다만 무인에게 있어서 꿈같은 이야기기도 했다.
“첫 검로부터 확실하게 주입해 줄 테니. 강제로라도 익히거라. 마음가짐도 똑똑히 바꿔 주마.”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살살합시다. 살살.”
“그럴 시간이나 있더냐? 2년 후면 너도 아카데미로 쪼르르 달려갈 게 뻔하지 않더냐.”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서리스가 알고 있는 몇 가지 굵직한 사건들만 봐도 펜타니엄에 영향을 끼칠 정도니, 당연히 힘은 필요했다.
‘예전에는 강해지는 게 재미있어서 막연하게 했지만.’
불터렉스에서의 일과 더불어 아리온과도 마주쳤기 때문일까.
서리스는 조금씩 세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성인군자는 아닐지언정 살아온 이 땅 정돈 제 손으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걸 위해서 서리스는 강해져야만 했다.
이 세계에 사는 한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하기 위해서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그리고 그렇게 제왕월영도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 * *
펜타니엄 알리즈.
올해 스무 살이 된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후우.”
흘러나오는 숨과 함께 검을 멈춘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이 이리저리 박인 손.
무던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손이나, 알리즈는 제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꼴이 될 때까지 휘둘렀음에도 첫째 형과 여동생에 비할 바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곧 워너힐 아카데미인가.’
입학시험이 얼마 안 남은 지금.
알리즈는 조만간 하산할 생각이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만이 모이는 곳.
워너힐 아카데미.
그런 학교에서.
‘나는 할 수 있을까.’
알리즈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성장하지 않는 자신의 실력이 한탄스러웠다.
밉다.
세상이 미웠다.
순박한 성격인 자신이라도 재능 앞에 노력이 묻히는 건 참으로 억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도망치기에 알리즈는 검을 너무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억, 헉.”
그런 순간 거친 숨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장소에는 아니나 다를까, 서리스가 목검을 질질 끈 채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련을 했길래 갈수록 거지꼴이 돼 가는 걸까.
서리스의 수련 장면을 본 적 없는 알리즈는 의아스러웠다.
동생 중 가장 몰락해 버린 동생.
샬롯이라는 별은 주변의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별이었다.
그렇기에 그 빛을 모조리 빼앗긴 서리스는 땅에 떨어진 별똥별처럼 그 힘을 잃었다.
요치아에게 검을 배우기 위해 나오던 당시, 알리즈는 술을 훔쳐 먹고 시종을 희롱하던 서리스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왜인지 알리즈가 더더욱 검을 놓아서는 안 될 이유가 되었다.
‘나도 검을 놓는다면.’
서리스와 같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생은 꽤나 변해 있었다.
알리즈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
다부진 체격.
그리고 예전의 죽은 눈빛과 달리 반짝이는 눈.
서리스는 어쩐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미약한 별.
서리스는 펜타니엄 가문별에 전혀 축복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도망쳤던 서리스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서리스는 도망치지 않고 몸을 단련하며 요치아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저 꼴이다.
요치아의 밑에서 매일 수련하는 듯싶지만, 그의 별은 쥐똥만큼도 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못내 가슴이 아팠다.
재능 없이 발버둥 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자신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를 부러워하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했던가.’
그 말이 알리즈는 가끔씩 떠올랐다.
누군가는 이런 자신을 부러워하기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알리즈는 다시금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자신을 부러워해 주고 자랑스러워해 준다면.
그것에 보답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니까.
‘서리스, 내가 증명할게.’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너를 위해서라도 내 손으로 증명해 보이겠다.
알리즈는 그렇게 의지를 불태우며 검을 휘둘렀다.
정작 그를 지나치던 서리스가 부적을 붙였음에도 별이 새 나오려고 난리라 고생 중이라는 것도 모른 채.
세상에는 선한 거짓말이 때론 도움이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