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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77화 (76/275)

77화

참을 인 세 번이면 사람도 살린다.

그 생각 하나로 서리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잠재웠다.

‘화병 나겠군.’

최근 들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살아온 덕분일까.

과거 평생토록 감정을 죽여 왔던 자신이 어딘지 모르게 존경스러웠다.

전생에는 홀대받는 거야 익숙하다 못해 일상이었건만.

이제는 이런 것 하나에 열을 받아 이를 뿌득뿌득 갈게 될 줄이야.

‘이제 내 삶은 그만큼 서리스에 익숙해진 거라는 소리겠지.’

소드란 시절이 멀어져 간다.

그 사실을 차츰 깨달아 갔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소드란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그것보다 이 인간, 정말로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줄 속셈인가?’

뒷짐을 진 자세로 장터를 돌아다니는 요치아를 보며 서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치아의 실력은 존경한다.

아직도 그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와의 격차는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성 됨됨이만큼은 존경하려야 존경할 수가 없었다.

“어이, 큰일이야!”

그런 순간이었다.

금강잔월 덕분에 청력도 좋아진 서리스의 귀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청림단 병사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세계 침식이 발생했다고?”

“그래, 마을 근처에다가 엄청 빠르게 증식 중이야. 어떡하냐. 우리로 막을 수 있나?”

“미친, 일단 단장님부터 찾아. 그 양반 또 낮술 하러 갔을 거야!”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계 침식이 자주 발생 안 하는 엘리자이다 보니 아무래도 청림단 쪽 대처가 늦는 게 보였다.

“세계 침식이더냐.”

그러는 사이 요치아도 들었는 듯 그가 발걸음을 멈춘 채 물어왔다.

“예, 그런 모양입니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못 들었다면 모를까.

들은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애꿎은 희생자를 만들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흐으음, 노부도 가마.”

“예? 저 혼자서도 충분할 겁니다.”

엘리자에서 높은 별의 세계 침식이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런 만큼 요치아까지 나설 필요는 없기에 의문을 가지자, 그는 시끄럽다는 듯 고갯짓했다.

“볼 게 있어서 그러니 출발하거라.”

뭐가 볼 게 있단 건지.

서리스는 의아해하면서도 방금 전 청림단원 한 명을 찾아 길을 물었다.

서리스가 펜타니엄 직계에다 청랑호법인 사실을 듣고 청림단원은 화색을 띠며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아까 들었던 대로 세계 침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 모양이었다.

“정말 따라오실 생각입니까?”

“미리 말해 두지만, 노부는 따라간다 했을 뿐이지 도울 생각은 없다.”

기대도 안 했다.

‘그럼 왜 따라온단 건지.’

자신의 수준이라도 확인해 보려는 속셈일까.

하는 행동은 영락없이 민폐 할아버지인 요치아를 보고 서리스는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마을 밖 근처에서 세계 침식 경계선이 보였다.

경계선을 지점으로 새하얀 단풍잎이 하나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겨울과 가을이 뒤섞이면 이런 느낌일까.

눈 대신 바닥을 가득 채운 단풍잎을 보며 서리스는 세계 침식 특유의 기분 나쁜 감각을 받았다.

‘3성에서 4성 사이 급인가.’

이 정도라면 청랑단원 없이 서리스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주의만 잘 기울인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문제는 체력 분배인데.’

요치아를 따라가느라 무리한 다리는 쉬는 동안 회복했으니 괜찮겠지.

“서리스.”

그 순간 요치아가 서리스를 불렀다.

이에 그가 돌아보자 요치아는 흰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거 써 봐라.”

“예?”

서리스가 의아해하기도 전에 그는 날아든 검 하나를 받았다.

장식 없는 평범한 검이었다.

대체 언제 이런 걸 챙겨 온 거지.

‘아까 그 청림단원 거인가.’

자세히 보니 그립 쪽에 에리든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애꿎은 청림단원 검은 왜 뺏어서는.

왠지 울상을 짓는 청림단원 에리든의 표정이 떠올랐다.

미안하니 잘 쓰고 돌려줘야겠다.

“펜타니엄 별 없이 싸워 봐라.”

“세계 침식 앞에 두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애들 장난도 아니고.”

“고작 이 수준의 침식이 두려운 게냐? 나 때는 말이다.”

서리스는 요치아가 말을 더 늘어놓기 전에 등을 돌렸다.

됐다.

요치아의 말마따나 저 정도 수준이라면 소드란만 가지고도 충분하긴 했으니까.

‘뭘 그리 시험하고 싶으신 건지는 모르겠다만.’

상상 이상을 보여 주면 그만이다.

검을 쥔 서리스의 눈이 번뜩였다.

* * *

콰앙, 쾅!

세계 침식 숲속 어딘가.

마치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무너진 나무 사이로 튀어 오른 한 남자는 다름 아닌 서리스였고.

그는 바닥을 박차며 앞에 나타난 새하얀 단풍잎으로 만들어진 개의 머리를 검으로 박살 내었다.

벤다는 느낌보다는 둔기처럼 휘두르는 모습.

금강잔월의 힘을 여실히 담은 서리스는 괴물 같은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서리스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오는 것은 검제라 불리는 요치아였다.

뒷짐 진 자세로 가끔 서리스가 놓친 마수의 머리를 지르밟으며 그는 서리스를 지켜 보고 있었다.

“고놈, 힘 하나는 하체펠 녀석들 저리 가라구만.”

요치아에게 당했던 것을 풀고자 하는 듯.

서리스가 휘두르는 검격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으잉, 쯧쯧, 청운귀명도는 고요함에 가깝건만.”

보아하니 청운귀명도도 저 모습과 똑같이 휘두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요치아는 딱히 그걸 문제점으로 삼지는 않았다.

청운귀명도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유동성과 뭐든 품을 수 있는 포용력.

저런 힘조차도 청운귀명도와는 어우러질 수 있다.

‘육체로는 사실상 완성이구나. 제 몸을 확실히 쓸 줄 아는 놈이야.’

거기다가 순간순간 깃든 판단력과 감.

그것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니 장래가 기대되는 녀석이었다.

‘최근 아래 애들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후기지수 중에서는 꼭대기에서 놀 놈이었다.

‘거기다가 두 개나 되는 별에 축복받고 있으니.’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터져 나오는 별이 그 파괴력을 더욱 늘려 주고 있었다.

‘신기한 놈일세. 어디서 저런 게 태어났을꼬.’

자기 핏줄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덜 다듬어진 곳은 있구나.’

검에 대한 조예는 확실히 부족한 게 눈에 보였다.

저놈 스승이 누군지는 몰라도 순간순간을 감으로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놓았다.

‘안 봐도 뻔하지. 세계 침식에서 오랫동안 구른 놈이겠지.’

세계 침식에서는 한순간에 판단력이 생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걸 감안해서 가르친 게 분명했다.

‘정석에서만 노는 놈들보다야 훨씬 낫지만.’

저래서는 청운귀명도에 담긴 힘을 전부 끌어내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런 걸 다 차치하고도 꼭대기에 놀 놈이라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무식하게도 개화했구나.’

저기서 그릇까지 늘려 놓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미래가 아른거리듯 보였다.

‘락로드 그놈이 요즘 말로 천상사성인가 뭐시기였나?’

최근에 본 꼬맹이 녀석 중에서는 그놈이 제일 난 놈이었는데.

이번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세계 침식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요치아의 넓은 기감에 기척 하나가 다가옴을 느꼈다.

“주인 놈이 왔느니라.”

“알고 있습니다.”

펜타니엄의 힘을 쓰지 않아서인지 평소보다는 체력을 많이 쓴 서리스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호흡을 고치고, 팔을 당기며 대지를 짓밟은 발로 몸체를 굳건하게 지탱했다.

사사삭.

새하얀 단풍을 뚫고 다른 녀석들과 같이 하얀 단풍으로 이루어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형태는 매우 작기 그지없었지만, 날름거리듯 드러난 혀에서 세계 침식의 힘이 물씬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펜타니엄의 별만 쓰거라.”

바라는 것도 많으시다.

서리스는 혀를 차면서 검을 바닥에 던지곤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쏟아져 나온 별과 함께 서리스의 손아귀에는 칠흑의 그림자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서리스가 그림자 검을 쥐자마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느낀 것인지.

단풍흰묘가 나뭇잎을 곤두세웠다.

그것을 시작으로 단풍흰묘가 바닥을 박찬 순간, 주위의 흰 단풍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날아든 흰단풍이 아슬하게 볼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뺨을 타고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여기 있는 흰 단풍들이 전부 단풍흰묘의 무기인 듯하였다.

싸아아아아.

흰단풍들이 흩날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대로 있다간 흰 단풍에 베여 넝마가 될 판.

서리스는 그냥 싸우지는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발을 쿠웅 굴렸다.

그 순간 치솟은 그림자가 서리스를 덮었다.

그러자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흰단풍이 서리스를 몰아쳤지만, 어느샌가 그림자 망토를 두른 서리스는 그 공격을 모조리 받아 내었다.

‘위치는.’

서리스가 빠르게 흰 단풍 사이를 쫓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 입장에서는 흰 단풍 사이 단풍흰묘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테지만.

검은별을 지닌 서리스에게 세계 침식의 주인 위치가 훤히 느껴졌다.

편법이라면 편법이지만.

세계 침식 상대로 편법 따위 따질 이유가 없다.

서리스의 목덜미에서 펜타니엄의 힘을 쓰고자 환한 빛이 후광처럼 떠올랐다.

그럼과 함께 검 위에 그림자가 가득 차오른 그 순간.

서리스의 검이 난무를 쏟아 내었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삼식(三式)

귀영난무(晷影亂舞)

휘몰아친 검들이 흰 단풍을 모조리 갈라 버렸다.

흰 단풍의 공격이 상쇄된 짧은 틈.

서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을 박찼다.

뒤늦게 흰단풍들이 서리스에게 쏟아졌지만, 그가 두른 그림자 망토를 꿰뚫을 수는 없었다.

푸욱!

“끼이이이이이익!”

곧이어 비명과 함께 숨어 있던 단풍흰묘가 서리스의 검에 꿰뚫렸다.

놈은 핏물을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고 서리스는 망설임 없이 목을 갈라 목숨을 거뒀다.

“후우.”

짧게 내쉰 숨과 함께 서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쭉 지켜보고 있던 요치아가 턱을 매만졌다.

“청운귀명을 다루는 방법은 어디서 배웠느냐?”

“기초는 천랑후, 심화 과정은 청랑단에서 여러 가지 것을 겪으며 배웠습니다.”

서리스가 솔직하게 말하자, 요치아는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청랑단 생활은 몇 년이더냐?”

“2년 조금 됐습니다.”

“흐음, 녀석, 별을 쓰는 방법은 선천적 재능인 모양이구나.”

“그렇다는 건.”

“아직 결정 안 했다.”

요치아는 아무렇지 않게 평하며 걸음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보다 별로인가.

검제라 불리는 살아 있는 전설이 보기에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서리스가 어떻게 그를 설득할지 고민하는 동안, 요치아는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다.

‘저놈을 앞으로 어떻게 요리할꼬.’

건드리는 곳마다 개화할 게 분명한 놈이다.

난 놈이니까.

“돌아갈 테니 따라오너라. 이번에는 별을 써도 되느니라.”

주인이 사라져 꺼져 가는 세계를 뒤로하고 나오자 요치아가 대뜸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괴팍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단, 노부도 별을 쓴다. 노부가 도착했을 때, 고개를 돌려 보이지 않으면 다 끝이니라.”

마지막 시험이라 이건가.

그 말을 듣고 서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앞서가면 어찌합니까? 고개를 돌리면 안 보이실 텐데.”

“하하, 놈, 입방정이 심하구나. 참고로 이미 시작했느니라.”

그 말과 함께 요치아의 인영이 사라졌다.

‘망할 영감이!’

뒤늦게 서리스가 산을 내달렸다.

그러나 그런 그가 하나 잊은 게 있었으니.

청림단원 에리든의 검은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쓸쓸히 나무 옆에서 버려진 채 잊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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