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오냐.”
심드렁하게 대답한 요치아는 뒷짐 진 자세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그를 따라 일어난 서리스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제께서는 제가 오실 걸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노부가 그걸 어찌 아느냐.”
“그게 그다지 당황한 기색이 없으셔서.”
“증손주 놈이 찾아오는 게 무엇이 그리 놀랄 일이라고.”
그건 맞긴 하지만.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노부를 찾아와 봤자 줄 것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요치아였으나, 서리스는 바짝 긴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너무 깨끗했다.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5성이라는 경지에 올랐지만, 서리스는 요치아에게서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요치아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유도 이러한 까닭일 테다.
‘내가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차원이 다른 경지란 소리야.’
삼무제(三武帝)
검제(劍帝)
삼무제는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이 존재하기 전 최강의 세 명을 일컫는 말이었다.
너무 오래전에 존재하던 사람들이라 이제는 다들 돌아가셨을 것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삼무제 전부 다 아직도 살아 있고.’
눈앞에 노인은 과거 그런 삼무제의 검제로서 활동했었다.
지금에서야 은퇴하여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혔지만.
그는 지금도 과거를 추억하는 나이 든 무인들 입에서는 여전히 검제로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일선에서 물러난 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덕분인지.
펜타니엄에서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그가 세상을 떴을 거란 말이 돌았을 지경이니.
그런 검제를 서리스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건 그가 지금으로부터 1년 뒤, 수련을 멈추고 펜타니엄으로 다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오래전에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한 삼무제의 등장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생에 소드란 가주였던 서리스도 그때 검제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쯧, 지금껏 혼자 잘 살았건만. 최근 노부의 소문이 아래에 퍼지기라도 했느냐?”
“제가 개인적으로 검제께 검을 배우고 싶어 자문하여 찾아왔을 뿐입니다.”
“검이라.”
요치아는 자신을 뒤쫓아 오는 서리스를 힐끔 보았다.
‘흐음, 별이 아주 펑펑 흘러넘치는데.’
몸을 이루는 근간도 전부 별.
몸속 곳곳에 별의 기운이 가득하게 깃들어져 있었다.
외양으로 보이는 재능은 말할 것도 없다.
아직 5성 중간쯤 온 모양인데, 벌써 저런 별 출력 양이라면.
또래에서 그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상대가 정공법으로 맞선다는 가정하에 얘기지만.
요치아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놈, 펜타니엄 말고 어느 별의 가호를 받았느냐.”
서리스에게 보이는 선명한 두 개의 별.
조절도 안 될 만큼 강렬하게 흘러내리는 그의 별이 요치아의 눈에 훤히 보였다.
서리스의 몸이 굳었다.
설마 요치아가 한눈에 자신을 꿰뚫어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연 살아 있는 전설다운 눈썰미다.
“……소드란이라는 별입니다. 최근에 새로 떠오른.”
서리스는 숨김없이 고했다.
이미 확신을 한 듯한 그에게 숨겨 보았자 의미도 없다.
일선에서 물러난 그가 굳이 서리스에게 해코지할 이유도 없을 테고 말이다.
“두 개나 되는 별을 품고 있으니 그렇게 그릇이 불안 불안하지.”
“그릇 말입니까?”
그런 순간 요치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서리스가 반문하자, 요치아는 뒷짐 진 자세로 물었다.
“왜 별문신을 한 개씩만 새기는지 아느냐?”
“별문신만 새긴다 해서 별이 무조건 힘을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 그 말대로 별은 바보가 아니니라. 딴 별을 새긴 놈에게 구태여 자기 힘을 빌려주려 하지 않지.”
그러면서 요치아는 조금은 신기하다는 듯 서리스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는 어째서인지 두 별에게 전부 가호를 받고 있구나.”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으잉, 쯧, 설명해 줄 테니 귀 열고 잘 들어라.”
요치아는 혀를 차며 손을 오므려 무언가를 닮을 수 있도록 볼록하게 만들었다.
“사람에게는 무릇 그릇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면서 요치아의 손아귀에서 그림자가 몽글몽글 치솟아 올랐다.
“처음에야 그릇에 물을 담는데 문제없지만, 언젠가는 그 그릇도 꽉 차게 되는 법.”
그 순간 그의 손아귀에 차오른 그림자가 바닥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그 그릇이 다 찼다는 소립니까?”
“눈치는 빠르구나. 남들 물 한 병 담을 때, 너는 각기 다른 두 병을 들이부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더냐?”
예상치 못한 발언에 서리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곤 서리스는 곧장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별이 서리스의 몸을 빠르게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막힘은 없다.
그러나 요치아의 말을 듣고 나니 어딘가 더 이상 차오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거 별을 담을 수조차 없었던 서리스에게는 이러한 사실은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애초에 전생과 지금 생을 통틀어도 자신을 제외한 인물 중 별을 두 개나 심은 인물을 본 적은 서리스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기다려. 거기다가 나는.’
서리스가 지닌 별은 두 개가 아니다.
검은별이라는 또 다른 별이 하나 더 존재치 않던가.
이래서는 훨씬 더 빠르게 그릇이 차오른단 소리와 같았다.
‘그때 셀리앙이 나를 보고 폭발할 것 같은데, 잘도 유지되고 있다고 말한 건.’
설마 그릇을 말하던 거였을까.
최근 들어 벽에 막히기 시작했다는 느낌도 그릇이 꽉 찬 탓인지도 모른다.
서리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요치아는 여전히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꼴이라면 앞으로 성장이 멈추겠지.”
“그래선 안 됩니다.”
“무엇이 안 되느냐. 이미 늦었는데.”
서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두 개의 별을 품은 걸 욕심이라 하기에는,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소드란이 새겨져 있었다.
더불어 검은별 또한.
게다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검은별을 누르기 위해서는 소드란과 펜타니엄 두 가지 모두 필요로 했으니까.
“……방법이 없습니까?”
“그 방법을 찾으러 여길 온 게 아니더냐?”
“저는 그저 검제께 검의 배움을 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상황이 심각해지고 말았다.
이래서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벽이 놓였다는 소리지 않는가.
서리스의 간절한 눈을 보고 요치아는 혀를 끌끌 찼다.
“네가 펜타니엄 사람임을 감사해라.”
“그 말은.”
“그릇 아래도 그림자는 존재한다. 방식만 바꾼다면 차고 흘러넘친 힘을 그림자가 받아들여 줄 게다.”
평생을 검을 갈고 닦아온 요치아의 말이다.
그를 통해 희망이 있음을 깨달은 서리스가 의지를 담은 눈으로 외쳤다.
“그렇다면 바로!”
“싫다만?”
“예?”
그러나 요치아에게서 돌아온 거절에 서리스의 입에서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설명해 주고 나서 싫다고?
“노부가 뭐 하러 귀찮게 널 도울꼬?”
“……저 그래도 증손자지 않습니까?”
“그게 뭔 대수라고. 노부는 네 존재도 오늘 알았느니라.”
요치아는 콧방귀를 뀌며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걸 본 서리스가 당혹스러운 눈과 함께 요치아의 뒤를 쫓았다.
“이렇게까지 말해 주시고 왜 이러십니까?”
“노부는 검 수련하기도 바쁘다. 밑에 놈들한테 가서 부탁하거라. 별을 두 개나 품은 네 죄지. 내 죄랴?”
요치아는 얼굴에서 귀찮음을 전혀 숨기지 않고 말했다.
서리스는 당혹스러웠다.
상황을 다 알면서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밑에서 제가 누구에게 배웁니까?”
“락로드 놈이 있지 않으냐.”
“가주께서는 바쁘십니다.”
“노부도 바쁘니라.”
그러는 사이 요치아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걷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서리스와 거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뭘 어떻게.’
경지 차이가 너무 나는 탓인지 요치아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그를 따라 속력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사이에도 요치아의 속도는 더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별을 쓰지 마라.”
그를 쫓기 위해 서리스가 다리에 별을 깃드는 순간 요치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리스가 고개를 들자 자신을 힐끔 본 요치아가 홱 하니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별을 쓰지 마라.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리스는 별을 흩트려 지웠다.
지금 서리스는 요치아에게 반드시 그릇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배워야만 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의 말을 전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별을 쓰지 않기 때문일까.
요치아를 뒤쫓는 서리스의 입에서 거친 숨이 새 나오기 시작했다.
산행은 고되다.
하물며 험준하기로 유명한 엘리자의 산.
거기에 더해 요치아는 동물도 다니지 않을 법한 길로 아무렇지 않게 가고 있었다.
덕분에 뒤쫓는 서리스만 죽을 맛이었다.
소드란의 별로 단련된 육체가 아니었다면 진작 탈진해서 쓰러질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느리구나. 느려. 별에 매일 둘러싸여서 사니 제힘도 모르지 않느냐.”
“허억, 헉.”
뒤쫓아 오는 서리스를 꾸중하면서도 요치아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별을 쓰지 않고도 여기까지 쫓아온단 말이지.’
생각보다 흥미롭다.
두 개의 별에게 가호를 받아 별만 펑펑 내뿜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가만 보니 육체 또한 그 이상으로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드란이란 별의 힘인가?’
육체를 단련하는 별은 하체펠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서리스는 달리면서 저 스스로 육체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마치 한평생 별 없이 살아 본 경험이라도 있는 양 말이다.
‘흐음, 묘한 놈이로다.’
두 개의 별의 가호를 받았다면 당연히 그런 경험은 없었을 텐데.
별을 쓰지 않고서 여기까지 뒤쫓아 올 수 있을 줄이야.
‘뭔지는 몰라도 기구한 삶을 살았겠군.’
묘한 놈들은 어디에나 있다.
현시대도 그렇고 과거의 검제로서 살던 시대도 그렇고.
‘게다가 저놈에게는 무언가가 더 있는 듯싶은데.’
검제라 불리는 자신의 눈에도 그것까지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두 개의 별을 담는 그릇 아래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으나, 느낌상 해악이 될 느낌은 아니었다.
‘묘한 것들은 숨기는 게 많아도 너무 많아.’
혀를 찬 요치아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산 아랫마을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겨우 따라온 서리스가 무릎을 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흠뻑 적신 땀이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뒤쫓아 왔는지를 보여 주었다.
“놈, 이름이 무엇이더냐?”
“서, 서리스입니다.”
요치아의 물음에 서리스가 얼른 대답했다.
저런 타입의 사람은 빠릿빠릿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서리스가 숨을 멈추고, 허리를 곧추세우자 요치아의 눈에서 ‘호오, 요놈 봐라’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얼마나 사람들 속에서 굴렀는데.’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인간들에게서 지원받고자 얼마나 발버둥 쳤는데.
이 정도야 쉬운 일이다.
“그럼.”
서리스가 공손히 다음 말을 기다리자 요치아의 손이 아무렇지 않게 가게로 향했다.
“한참 뛰어 시장하니 밥부터 먹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후.
“흐음, 삯을 가져오는 걸 깜빡했구나.”
“제가 내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밥값을 계산했다.
“옷을 오래 입어서 그런지 옷이 좀 해졌구나.”
“한 벌 장만하시죠.”
옷도 사고.
“흠흠, 전부터 이게 필요했는데. 마침 나왔구나.”
“얼른 사시죠.”
장도 봤다.
물론 전부 서리스 돈으로 말이다.
그때도 서리스는 줄곧 생글생글 웃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예끼, 노부가 언제 사 달라 했느냐.”
서리스는 아직도 웃고 있었지만.
입술이 슬슬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그냥 저 열 받게 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오, 그걸 눈치챘느냐. 얼른 떨어져 나가거라. 노부는 이제 수련하러 가야 하니.”
훠이훠이 하며 요치아가 손짓했다.
그걸 본 서리스는 미소 지은 채로 굳었다.
‘하하, 망할 영감탱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