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여름이 지나고.
낙엽이 사각거리는 가을이 지난 뒤.
눈이 쏟아지는 겨울이 막바지에 들어섰다.
어느샌가 찾아온 봄기운에 서서히 눈이 녹아내리는 그때.
올해 나이 18살이 된 서리스가 청랑단 수련장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새까만 그림자의 검이 서리스의 움직임을 따라 서서히 휘둘러졌다.
그림자는 검의 형식을 따라 휘둘러졌고, 그것은 하나의 춤사위와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눈꺼풀을 뜬 서리스의 눈동자에 어딘가 탐탁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막혔다.’
눈앞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벽.
분명 별도 차근히 쌓이고 있고, 육체 또한 보다 강해졌지만.
서리스는 몸속 깊숙이 답답함이 쌓이고 있었다.
“후우, 이런 느낌이었나.”
서리스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전부 가신 것도 아니었건만, 열이 오른 그의 육체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많은 무인이 막힌다고 하는 벽.
그 거대한 벽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과 함께 서리스는 혀를 찼다.
6성에 이르는 것이 이리도 까다로울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던 탓이다.
“어쩐다.”
서리스는 고민하는 기색에 빠졌다.
별의 출력량은 예부터 말할 것도 없었고.
육체의 완성도야 금강잔월로 수준급에 올랐다.
그럼 가장 부족한 게 무엇인가.
‘검술.’
서리스의 검술은 청운귀명도에 형식을 따르기보다 육체적인 감에 의존하는 것이 주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검으로 단련해 왔을 다른 이들과 달리.
고작해야 3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모자란 검 실력을 메꾸기 위한 감에 의존한 검술 방식은 서리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 발목을 잡을 일.
기초 공사를 제대로 다지지 못한 건물은 쌓아 올리면 쌓아 올릴수록 무너지기 쉬워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서리스의 검술을 비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이었다.
“서리스 님, 부르셨습니까.”
그런 순간 서리스가 느낀 인기척과 함께 한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다름 아닌 천랑후였다.
최근 검에 대해 벽을 느낀 서리스가 청랑단 주인 하다크에게 부탁해 그를 청랑단에 부른 것이었다.
“오랜만이야.”
“서신으로는 줄곧 연락하고 있었지만요.”
천랑후에게 세계 침식자와 관련된 여러 부탁을 해 놓았던 서리스가 그를 따라 웃었다.
그에게는 줄곧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천랑후가 없었더라면 서리스는 몰락한 삼남이라는 지위를 벗어나기 여간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성장하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보여?”
“그리고 답답하신 모양이고요.”
눈치 빠른 게 그답다.
서리스가 자조하듯 웃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 특히 검술 쪽이.”
서리스가 청운귀명으로 만들어 낸 그림자 검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몇 달째, 서리스의 답답함은 날이 지날수록 커지고 있었다.
남들이 보았다면 18살에 5성이라는 터무니없는 성취에 무슨 욕심이라 욕할지도 모르지만.
서리스는 소드란 시절 평생을 무와 관련 없이 살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벽에 막힌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두려움이었다.
혹시나 얻었던 힘이 여기가 한계이지 않을까.
혹은 또다시 무기력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내 정신머리가 그 정도로 약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몰락했고, 포기했기에.
그 지독한 감정은 여전히 서리스를 좀 먹고 있었다.
“검술은 솔직하게 말해 서리스 님에게 제가 알려 드릴 만한 것은 다 알려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천랑후는 서리스의 그림자 검을 내려다보았다.
“서리스 님의 검술은 감에 매우 의존하고 있죠. 그리고 그 방식은 저와도 비슷하기에 저는 제가 검을 휘두르는 법을 그대로 가르쳐 드렸지요.”
“고마워. 그건 정말 큰 도움이 됐어.”
지금까지 난관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천랑후에게 검을 배운 덕이 컸다.
천랑후는 스승으로서 큰 감동을 느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다가 부끄러워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곤 표정을 고친 뒤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말은 곧 제 검술로는 지금 저의 수준까지가 한계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건.”
“예, 제 경지인 6성까지가 한계겠죠.”
천랑후의 얼굴에 아쉬움이 담겼다.
서리스의 성장은 너무도 기쁘지만, 이 이상 자신이 관여하기에는 그가 너무 많이 성장해 버렸다.
예전에는 물 한 컵으로도 쑥쑥 자라던 새싹이 이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나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감당치 못한 나무는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이에게 넘기는 것이 맞는 일.
‘조금 더 곁에 있어 드리고 싶었지만.’
이것 또한 스승된 자로서 기쁨이니.
“서리스 님, 다음 스승을 찾으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스승.
그 말을 듣고 서리스가 천랑후를 돌아보았다.
“졸업이라는 소리인가.”
어딘가 아쉬운 듯 서리스의 눈이 그에게 향하자 천랑후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예, 펜타니엄에는 서리스 님을 나아가게 해 줄 수많은 분이 계십니다. 검만 평생을 휘두르신 분들이 너무도 많죠.”
“하지만 그중에서도.”
“예, 뜻에 맞는 분을 찾으셔야 할 것입니다.”
서리스는 검을 지우고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스승을 찾는다, 라.
‘옛날이라면 불가능했겠지.’
불과 3년 전까지 서리스는 몰락한 삼남이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이였다.
매일같이 훔친 술을 마시며 비대해진 몸은 누가 보아도 형편없었으니까.
‘비록 그게 나는 아니었다고는 해도.’
한 번 각인된 인식은 바꾸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서리스는 펜타니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 중 한 명이다.
18살에 5성이라는 재능과 청랑단 최연소 청랑호법이라는 위치.
지금까지 쌓아 온 업적들에 유망주인 펜타니엄 샬롯을 꺾었다는 일화까지.
유명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펜타니엄 내에서도 검술 스승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이는 많겠지.’
대가문 펜타니엄 안에는 수많은 정치가 얽히고 얽혀 있다.
아무리 펜타니엄 가주 검황 락로드라도 노쇠할 때는 올 것이고, 그때는 세대 교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위해 단련해 온 직계들 중 누군가는 가주 자리에 오르리라.
‘그리고 자신이 가르친 후계자가 가주 자리에 오르면, 그의 스승은 정치에서 큰 이점을 얻을 거고.’
서리스는 자신의 볼을 손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드란 시절 정치판에서 끔찍할 정도로 뒹굴어 본 서리스다.
몰락해 버린 가문인 만큼 서리스의 정치 주도권은 늘 아래에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살아남고자 발버둥 쳤었다.
‘정치에 연관되는 건 딱 질색인데.’
서리스는 그런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장 가주를 목표로 하지 않았던 거라 생각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생 동안 살아온 습관인지 미래를 염두에 두고 정치적인 행동을 했지만 말이다.
‘고생깨나 했으니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던 건가.’
자신이 직계인 이상 정치는 뗄 수 없다.
그러나 검에서만큼은 정치와는 먼 곳에서 배움을 얻고 싶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향후 있는 일들을 고려하여 그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정치와 관련이 없으며.
검으로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를 차근히 떠올렸다.
‘딱 한 명.’
서리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 한 명 스치는 이가 있었다.
하지만 곧 서리스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될까.’
확신은 하지 못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만큼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서리스가 고민을 하고 있자 천랑후가 그에게 물었다.
“무언가 생각나시는 분이 한 분 계시나 보군요.”
“……천랑후, 연락 좀 넣어 줄 수 있을까.”
“서리스 님의 뜻이라면.”
천랑후의 대답을 듣고 서리스는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그리고 서리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천랑후조차 눈을 동그랗게 뜰 인물이었다.
* * *
천하오장성, 천상사성.
이런 말들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그건 꽤나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전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기 좋아하는 설화낭인(說話浪人)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문뜩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인들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곳을 다니며 그러한 무인들을 제 눈으로 보고 겪으며 세상에 널리 퍼트렸다.
그때부터 땅 아래 존재하는 이들 중 가장 강한 다섯 명을 천하오장성이라 불렸고.
땅을 넘어서 하늘을 아우르는 강자 네 명을 천상사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명성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나이가 들고 전선에서 은퇴하게 된 후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후대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름을 물려주었을지언정 쌓아 온 무위가 쇠퇴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무위와 별이 절정을 무르익어 넘어섰을 때 어린아이로 돌아오는 반로환동(返老還童)덕분에.
은퇴하며 내려놨던 천상사성 자리를 다시 꿰찬 괴물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괴물은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만나려는 사람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서리스가 만나고자 하는 인물은 그러한 별칭이 존재하기도 전의 사람이었다.
“높구만.”
북쪽 영지 레일로.
펜타니엄에서도 산맥이 거칠기로 유명한 레일로의 산을 오르고 있는 서리스가 오랜만에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래에는 겨울이 지나 곧 다가올 봄 덕분에 초록 잎들이 보이고 있건만.
고도가 한참 높은 레일로는 메마른 나뭇가지와 새하얀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금강잔월 덕분에 웬만한 추위에는 전혀 이상이 없는 서리스라곤 하나.
여기까지 올라오니 서리스조차 으슬으슬한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늘그막에 또 한 번 득도해 보시겠다고 산은 또 왜 오르셔서.”
서리스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느라 굽은 허리를 쭈욱 폈다.
지금 찾아가는 이는 평생을 검에만 미쳐 삶의 끝을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득도를 위해 산을 오른 괴짜였다.
그러나 그런 괴짜라 할지라도 검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자.
서리스가 손꼽은 가장 검의 정수에 대해 잘 아는 이 중 한 명이었다.
“내년쯤에는 아마 결국 포기하시고 내려오는 거로 알고 있긴 한데.”
과거로 돌아오기 전 기억을 떠올리며 서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을 산만 오르고 있으니, 돌아온 시기가 안 좋았다고 괜히 투덜거리는 그였다.
하지만 그 투덜거림도 곧 끝날 예정이었다.
산봉우리를 넘고 나니 이런 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집 한 채가 보였기 때문이다.
“찾았다.”
달뜬 웃음과 함께 서둘러 절벽을 타고 내려온 서리스는 집 앞으로 다가왔다.
오직 검은색의 나무로 세워진 집 주위에는 신기하게도 눈 한 줌 존재하지 않았다.
꽤나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된 서리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그의 눈에 바위 한 개가 들어왔다.
“하, 하하, 뭐야 이거.”
그리고 곧 서리스는 욕설과 함께 헛웃음을 지어야 했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바위에는 검로가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는 이 집과 주변 환경을 단절시켜 서로 다른 공간으로 만드는 말도 안 되는 검로가 말이다.
‘뭔지는 알겠는데.’
이걸 어떻게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짧은 식견으로 알아볼 만한 것은 아님을 눈치챈 서리스는 바위에서 눈을 떼고 집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이 집을 이루는 재료 또한 터무니없는 것임을 눈치챘다.
“……전부 천 년 동안 정기를 흡수한 고목, 천능선목(天能仙木)이잖아.”
손바닥만 한 것으로 저택 하나를 지을 수 있는 값인 천능선목을 보고, 서리스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설마 천능선목으로 집을 짓는 미친 사람이 있을 줄이야.
천능선목으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선망하는 마법사들이 이걸 보았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졌으리라.
집부터 범상치 않은 상황에 서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
하지만 그 순간 서리스는 갑자기 어느새 자신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시야 전환에 그가 당황했을 때.
“쯧쯔, 증손주라는 놈이 이렇게나 반응이 늦어서야.”
그의 목소리에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서리스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거기에는 한 노인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수룩한 얼굴은 락로드를 똑 닮았구나.”
세상 검황 락로드를 어수룩한 취급 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
그러나 그만큼은 락로드를 그렇게 취급할 수 있었다.
서리스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검제를 뵙습니다.”
검제(劍帝).
펜타니엄 요치아.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이라는 별칭이 존재하기도 전 시대를 풍미한 무인이자.
서리스의 증조할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