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아리온에게 골탕 먹은 이후.
서리스는 그 뒤 무사히 제나디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이드 상단은 가진 재산이 많아 고급 여관을 잘 잡아 주었고.
펜타니엄 문양이 새겨진 마차 덕에 가는 곳마다 혜택을 누린 덕분이었다.
성벽을 지나고 펜타니엄 영지 안으로 들어오게 되자 서리스는 조금 풀린 기분을 느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 집이니.’
불터렉스에서 혹여나 있을 불상사를 대비해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일까.
펜타니엄 영지에 들어오자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은 제나디아인가.’
서리스는 창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톡톡.
검지가 간헐적으로 그의 볼을 두드렸다.
도로시의 얼굴에서 다시금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은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듯 서리스가 불러도 힘없이 웃는 그녀였다.
자유분방함과 엉뚱한 성격의 표본인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곧 알게 되겠지.’
도로시가 이런 이유를 얼마 안 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그런 생각대로.
얼마 뒤, 서리스의 마차와 하이드 상단이 제나디아에 도착했다.
제나디아는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적당히 풍족하고.
적당히 평화로우며.
적당히 행복하다.
불터렉스와의 교류 지역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할 필요가 없는 곳.
그것이 바로 제나디아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나디아 저택의 집사를 맡은 세리스찬입니다.”
제나디아 저택에 도착한 서리스가 마차에서 내리자 하인을 대동한 집사가 인사를 올렸다.
불터렉스 쪽에서 하이드 상단 건은 이미 표국을 통해 서신을 보내 놓았으므로.
미리 서리스 일행을 맞이하고자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도로시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집사는 잇따라 내린 일행 중 도로시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그녀는 집사를 눈으로 흘깃 보곤 서리스의 뒤편에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집사는 그런 도로시를 신경 쓰지 않는 듯 인사를 마저 올리곤 안내를 시작했다.
저택 내부도 서리스의 눈에는 평범했다.
너무도 평범한 이곳에서 도로시는 줄곧 자라났을 것이다.
제나디아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아이로.
“정말로 도로시 아가씨네.”
“청랑단에 들어갔다던데? 저 자유로운 분이 어디에 몸담으시다니 신기해.”
도로시 쪽을 보는 하녀들의 수군거림이 서리스의 귓가를 간질이고 갔다.
혐오나 싫음의 기색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신기함.
분명 대부분 시간을 이곳 제나디아 가문에서 살아왔을 도로시이건만.
그녀의 취급은 외부인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아는 건지, 도로시가 복도를 바라보는 눈은 마치 처음 온 곳을 온 듯 아무런 향수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서리스.”
그런 도로시가 조금 걱정된 듯 아카펠이 그를 불렀다.
“계속 지켜봐 줘.”
그리고 아카펠의 당부에 서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스는 제이록과 함께 제나디아 가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도로시를 보고 있을 순 없기에 아카펠과 서발광 두 사람에게 그녀의 동태를 살피도록 맡겼다.
“이곳이 제나디아 회의실입니다.”
“오, 드디어 하이드 상단도 제나디아와 연을 잇게 되는군.”
제이록에게서 깡마른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활기가 훅훅 흘러나왔다.
거래로 먹고사는 상단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있다 봐.”
세 사람에게 인사를 해 둔 서리스는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볕이 잘 드는 회의실에는 세로가 긴 탁자가 보였다.
서리스와 제이록 둘만이 들어서서 집사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자 때마침 다른 문을 열고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한 명은 이번 상단 거래 건을 이야기하기 위한 제나디아 재무 담당 제나디아 멜아즈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제나디아 현 가주이자 도로시의 친오빠인.
제나디아 도크만이었다.
도로시의 친오빠이지만, 그녀의 붉은 머리와는 달리 금발인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괜찮습니다. 두 분 다 앉으시죠.”
서리스와 제이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손을 들어 인사를 사양하곤 의자를 빼 앉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제나디아 가주 도크만이라고 합니다.”
“펜타니엄 서리스입니다.”
“하이드 상단주 하이드 제이록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짧은 소개가 이어졌다.
“그럼 우선 상단 건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예, 그러시죠!”
그리고 곧바로 제이록과 도크만이 거래를 시작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전부 상단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하이드 상단이 취급하는 물건 중 제나디아에 필요한 것과 부족한 물품에 관한 공급이나.
이 지역에 하이드 상단의 지부를 건설하는 것에 대한 승낙 여부 등.
여러 이야기가 그들에게 나와 논의되고 중간중간 흥정이 반복되었다.
‘지루하구만.’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서리스는 하품을 숨겼다.
애초에 서리스는 어디까지나 펜타니엄 직계로서 자리를 마련해 줄 겸 함께 온 사람일 뿐.
자신이 회의에서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기에 그는 묵묵히 이야기만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소드란 가주일 때가 떠오르네.’
줄어드는 자금에 어떻게든 뭔가 쥐어짜 내 보자며 지역 상단주들과 매일 골머리를 썩이던 나날들.
이제는 추억이라는 기분을 느끼며 창밖을 보던 도중.
서리스는 창문 밖 한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딱 보기에도 도로시의 또 다른 오빠처럼 보이는 그는 어딘가 화난 눈초리였다.
‘귀찮은 예감이 드는데.’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예,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서리스가 허튼짓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때마침 이야기가 끝났는지 도크만과 제이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를 귀담아듣지는 않았지만, 제이록의 표정을 보아하니 잘된 모양이었다.
“아, 이번 건은 전부 서리스 님의 덕이 큽니다. 서리스 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런 순간 제이록이 서리스를 언급하며 추어올렸다.
대화가 이쪽 중심으로 돌아간 만큼 공을 챙겨 주려는 마음인 것이다.
‘상인답네.’
의외로 이런 것 하나하나가 의외로 이름값을 올리는 법이다.
자리에 있었던 것만으로 그 사람을 중요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물론 나도 그걸 생각하고 온 거긴 하다만.’
생각해 보면 아직 가주를 목표로 확실시하지 않은 자신에게 이게 필요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이러한 이름값은 어디까지나 가주를 목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에 밴 습관인 거지.’
소드란 시절 때 무슨 자리든 끼이려고 아등바등했던 그것이 지금도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저도 좋은 상단과 거래를 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서리스 님.”
도크만도 같이 감사 인사를 하자 서리스는 정치 전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불터렉스 쪽에 부탁받았을 뿐인걸요. 저야말로 동생분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동생 말입니까?”
그런 순간 서리스의 말을 듣고 도크만의 시선이 묘해졌다.
마치 누굴 말하냐는 듯한 그의 반응에 서리스 또한 의아함을 품었다.
“도크만 님은 도로시와 친남매가 아니셨나요?”
“도로시, 아, 도로시 말입니까.”
생각에 빠진 듯 중얼거리던 그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가 서리스 님에게 어떤 신세를 졌는지 모르겠지만, 폐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서리스의 눈이 한 차례 깜빡이었다.
지금 이 인간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도크만 님, 도로시가 저와 함께 청랑단에 소속되어 있단 건 아십니까?”
도크만이 모호한 표정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바쁜지라 여동생까지 챙길 여력은 없어서 몰랐네요. 청랑단에 들어갔었군요.”
너무도 무관심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마왕의 자식인 도로시이니 그와는 핏줄이 다르다는 것은 서리스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 증거로 도로시의 머리카락 색은 마왕의 색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제나디아 가문은 도로시의 어머니 제나디아 에리미가 가주였으며.
그녀의 남편은 셋의 자식을 가진 뒤, 세계 침식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마왕과의 만남은 남편과 사별 이후.’
그런 도로시를 낳은 뒤 에리미는 얼마 안 가 가진 지병이 악화돼 사망했으며.
그 뒤에 가주로 오른 것이 첫째였던 도크만이었다.
도로시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남매들 사이에서 자라왔을 거란 건 서리스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그래도 핏줄이 이어진 여동생일 텐데.’
도크만의 지금 행동은 완전히 타인을 대하듯 하였다.
도로시의 그간 행동 따위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그는 서리스의 언행에만 신경 쓸 뿐이었다.
혹시나 이 일로 서리스에게 안 좋은 감정을 심을까 고려하는 가주로서의 행동만으로.
가족인 도로시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거였나.’
서리스가 도로시가 유달리 힘이 없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초창기 그녀가 어째서 장기간 청랑단이라는 집단에 적응하지 못했는가 또한.
‘가족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도로시가 타인인 우리에게 터놓고 지낼 수 있을 리가 있나.’
서리스는 머리카락을 한 차례 쓸어 올렸다.
비록 자신은 가족에게는 아니라도 주위 사람에게 외면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도로시와 모두를 데리고 그냥 빨리 떠야겠군.’
도로시에게 여기는 집이 아니다.
자신이 있을 곳 없는 그저 매우 불편한 공간일 뿐.
그런 순간 서리스는 아까 전 도로시의 친오빠로 보이는 남자가 화를 잔뜩 품은 채 어딘가로 가던 사실을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회의는 끝난 듯하니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얼굴을 굳힌 서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괄량이지만 도로시는 자신의 팀이다.
어느 사람이든 내 사람을 건드린다면.
‘가족이고 뭐고 엎는다.’
서리스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