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은 승낙의 의미.
그리고 서리스가 지금 받은 서신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불터렉스에서 내려온 데릴사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걸 본 서리스는 지금 좋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서리스는 자신의 데릴사위가 되는 건가?
어쩐지 기뻤다.
그 증거로 발렌타인의 입꼬리가 저절로 씰룩거렸다.
그녀가 잠시 기쁨과 놀라움을 오가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서리스는 서신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저도 제나디아는 한번 들려 보고 싶었고. 수하 중에 그쪽이랑 연이 있거든요.”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고 발렌타인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려야만 했다.
제나디아?
고개를 기울인 발렌타인이 풀린 다리의 힘을 주어 서리스 앞으로 걸어갔다.
“서리스 님, 혹시 서신 내용을 저도 볼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양 서리스는 발렌타인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발렌타인은 서둘러 빠르게 서신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나갔고, 잠시 후 옅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귓불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과 루니릴의 꾀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동시에 교차했다.
“왜 그러시나요? 아시던 내용과 다르신가요?”
서리스가 의아한 듯 되묻자 발렌타인은 그에게 서신을 건넸다.
“아뇨. 아닙니다. 제가 오해를 해서.”
발렌타인은 주먹을 꽉 쥔 채 자신의 유모를 떠올렸다.
화가 나야 할 텐데, 어쩐지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기대감이 한순간에 무너진 그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발렌타인을 의아하게 보던 서리스는 다시금 서신을 내려 보았다.
서신의 내용은 이러했다.
최근에 불터렉스에 들어온 소속 상단 하나가 제나디아와 연을 트고 싶어 한다.
그 건을 때마침 서리스에게 맡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펜타니엄 직계가 직접해 주면 불터렉스와의 관계 개선에도 도움 줄 테고.’
무엇보다 이런 일을 도맡아 했다는 것은 서리스에게도 엄청난 이득이다.
불터렉스와의 연을 쌓는 역할을 했다는 거니까.
‘내 처지에서도 전혀 나쁘지 않은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던 서리스는 문뜩 헛웃음을 흘렸다.
‘자연스럽게 정치 쪽에 신경 쓰게 되는 건 전생의 버릇인가.’
조금이라도 몰락한 가문을 유지해 보고자, 이런저런 곳에 발을 들였던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펜타니엄 직계인 만큼 이토록 정치에 힘을 쏟을 필요는 없겠지만.
‘있어서 나쁠 것도 없는 게 사실이고.’
앞으로도 펜타니엄 서리스로 살아가려면 할 수 있는 건 해 두는 게 좋았다.
그런 생각을 품던 도중 서리스는 발렌타인과 눈이 마주쳤다.
“발렌타인 님?”
아직도 멍한 표정인 그녀를 보고 서리스는 괜찮냐는 듯 발렌타인을 불렀다.
“아, 네.”
“그래서 이제 상단 쪽에 찾아가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예, 물론입니다.”
자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양 발렌타인은 얼른 물러섰다.
오늘따라 이상한 태도인 발렌타인을 보고 서리스는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기왕 여기까지 오신 거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서리스가 떠나기로 한 이상 그녀와의 다음 만남은 앞으로 기약이 없이 미루어질 거다.
워너힐 아카데미라면 모를까.
서리스는 펜타니엄 일로.
발렌타인은 불터렉스 일로 바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더 친분을 다져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 물론 일이 없으면 하는 말입니다.”
“아, 네! 저도 하이드 상단 쪽은 궁금했었습니다.”
발렌타인은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대답을 올렸다.
서리스는 그런 발렌타인의 당혹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긍정했다.
하이드 상단은 폐쇄적인 불터렉스가 가문의 성향을 벗어나고자 최근 새롭게 받은 상단이었다.
그러니 발렌타인도 관심을 가질 만했다.
평생을 혼자 살아서일까.
이런 쪽에는 눈치가 없는 그다웠다.
“가실까요.”
“네, 네.”
서리스의 미소를 어쩐지 눈 마주치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돌린 발렌타인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하이드 상단주와의 대화는 별것 없었다.
호탕한 웃음을 짓는 그는 펜타니엄과 연을 쌓게 된 것을 기뻐하며 여러 호의를 보였다.
‘왠지 가면 갈수록 미래 투자만 하고 있는 느낌인데.’
서리스는 입술을 잡아 늘였다.
다른 나라 상단주와도 연을 쌓아 놨으니.
이러다가 인맥왕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긴, 애초에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주위에 사람이 붙는 건 당연한 거겠지.’
소드란 시절 그저 외롭게만 보내야 했던 자신의 삶이 안타까운 것이지.
이게 정상적인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문뜩 서리스는 몸의 원래 주인의 존재를 떠올렸다.
이맘때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땅속에서 미생물에게 분해되었을 진짜 서리스가 말이다.
‘이제는 내가 서리스라는 자각은 있지만.’
원래 서리스는 결국 어떻게 된 걸까.
서리스는 자신의 목덜미를 가볍게 손으로 눌렀다.
이 해답을 풀기 위해서는 어찌 되었든 검은별의 실체를 풀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걸 위해서 성위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서리스의 눈에 발렌타인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유달리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긴 그녀는 서리스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발렌타인 님, 그러고 보니 말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말하지 않은 거라 함은.”
“저희는 내일쯤 떠날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듣고 발렌타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설마 당장 내일이 될 거라곤 생각 못 한 듯하였다.
“수색은 결국 실패고, 제 개인 용무도 끝마쳤거든요.”
확인은 끝났다.
단지, 그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서리스가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뿐.
‘그게 언제가 될는지는.’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서리스가 알고 있는 미래 시점까지는 불터렉스가 당장 붕괴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내부 사정은 몰라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때까지 두고 볼 생각은 없어도.’
당장 불터렉스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간중간 확인도 계속할 것이고 말이다.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리스의 생각이다.
발렌타인에게는 그건 다른 의미였다.
그리고 그런 말을 스스로 내뱉었다는 것에 발렌타인은 놀라 입을 가렸다.
누군가를 붙잡아 본 적은 처음인 그녀는 부끄러움이 어린 눈을 살며시 감았다.
“아하하, 저랑 이별하시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입니다.”
그리고 발렌타인의 반응은 서리스도 꽤 놀랐다.
감정 없는 그녀가 자신에게 유달리 살갑게 군다는 건 서리스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불터렉스는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곤 하나 여전히 폐쇄적이다.
펜타니엄과 달리 소가문의 개념도 없고.
가문의 사람들만이 주요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리고 그러한 가문의 직계인 발렌타인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자는 또래 중에는 한 명도 없었을 것도 확실하다.
서리스와의 만남은 그녀에게도 귀중한 것이었겠지.
‘내 생각 이상이었나?’
그녀와의 관계가 이 정도로 깊어졌을 거라곤 서리스도 예상 못 했다.
한편, 발렌타인도 마찬가지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괜히 실례되는 말을.’
서리스가 언제까지고 불터렉스에서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설마 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붙잡는 듯한 말을 할 줄이야.
그 순간 발렌타인은 서리스가 데릴사위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을 때를 떠올렸다.
왜인지 모르게 그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는 것과.
그리고 받아들인 것이 다른 용무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깨달은 큰 실망감.
‘나는.’
발렌타인은 서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그리 긴 만남은 아니었다.
그러나 발렌타인은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이 만남만큼이나 특별한 것은 없으리라고.
“실언했습니다.”
“아뇨. 발렌타인 님께서 저를 그렇게나 생각해 주시니 오히려 고마운걸요.”
참, 끝까지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강한 사람이었다.
발렌타인은 그런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서리스 님은 펜타니엄의 가주가 되실 겁니까?”
“그건.”
서리스가 잠시 동안 말문을 닫았다.
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그 물음.
너는 펜타니엄의 가주가 될 것이냐.
이 물음의 답을 서리스는 아직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 막연한 목표기도 하고.
전생에 소가문의 가주로서 희생한 그는, 가주 자체에 큰 의의를 두고 있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정해야 할 때는 다가오고 있다.
서리스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그 자리에 오를 겁니다.”
그러던 그때 발렌타인의 입에서 굳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직 남자만이 가주가 될 수 있었던 불터렉스에서.
그녀가 가주가 되려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외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발렌타인은 누구보다 가주 자리에 어울렸다.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발렌타인에게 서리스는 확신하듯 말해 주었다.
미래에서 발렌타인이 가주 자리에 가장 근접했기 때문이 아니다.
서리스가 본 발렌타인은 그 자리에 앉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제가 가주가 된다면 서리스 님께 딱 한 가지만 청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발렌타인이 어딘가 떨리는 눈으로 물음을 던져왔다.
그 물음을 듣고 서리스는 옅게 눈웃음을 지었다.
“불터렉스 가주님의 청인걸요. 들어 드려야죠.”
“약속하신 겁니다.”
“네.”
비록 언제가 될지 모를 기약 없는 약속이었지만.
서리스의 약속을 듣고 발렌타인은 그에게 배웠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서리스 님, 다음은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뵙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서로가 얼마나 강해져서 올지 기대하자며 웃어 준 두 사람은 담소를 끝마쳤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루니릴은 이마를 감싸야 했다.
“아이고, 아가씨.”
거기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낚아챘어야 했건만, 기약 없는 약속을 해 버린 것이다.
자신의 마음 정도는 눈치챘을 법한데.
‘아가씨답다면, 발렌타인 아가씨 답지만.’
못내 아쉬움을 느낀 루니릴은 입맛을 다시다가 자리를 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니.
그렇게 위로하면서도, 워너힐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발렌타인에게 이성을 유혹하는 방법 정도는 가르치자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 * *
다음 날, 하이드 상단의 마차와 함께 서리스는 가문 마차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여름 초입을 넘었기 때문일까.
서리스는 이마에 흐른 땀방울을 훔치곤 손부채질을 하다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다름 아닌 도로시였다.
어젯밤, 서리스는 모두를 불러들여 내일 제나디아로 갈 것을 알렸다.
제나디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어딘가 생각에 잠긴 듯한 도로시는 지금도 여전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시, 이제 출발한대. 가자.”
“응.”
그러는 순간 아카펠이 도로시를 불러들였다.
그녀답지 않은 조용한 대답과 함께 걸어온 도로시는 서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곤 곧 희멀건 웃음을 지었다.
“직계님,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무것도.”
그는 도로시를 따라 미소를 지어 주곤 그녀가 마차를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서리스도 신경 쓰이지.”
그러는 순간 옆에 다가온 서발광이 말을 걸어왔다.
어제 루이지와 종일 담소를 나눴던 그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아까 듣기론 루이지가 울면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고 하는데.
서발광의 새빨개진 얼굴은 꽤나 볼만했으리라.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건 제쳐 두고 지금 화두에 오른 문제는 도로시였다.
“내가 좀 이야기해 볼까?”
서발광이 묻자 서리스는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일단 좀 더 지켜보자.”
어차피 제나디아에 간다면 대강의 사정은 알 수 있을 거다.
무엇보다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 서리스도 물을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이 정도는 기다려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니쉬아 선배님이라면 잘 이야기했을 텐데.”
서발광의 말대로 애니쉬아라도 데려올 걸 그랬나 보다.
그녀라면 도로시가 힘없어도 잘 돌봐 줬을 텐데 말이다.
“그것보다 루이지와는 잘 이야기했겠지.”
“어, 으응, 편지 쓰기로 했어.”
서발광은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여자에게 면역이 없는 그는 아무래도 이런 쪽은 힘든 모양이다.
그래도 서리스를 위해 노력해 준 셈이겠지.
“잘했어. 우리도 가자. 곧 출발할 거야.”
도로시 문제는 가면서 생각해 보자며 서리스는 서발광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 뒤 불터렉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는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떠나게 되는군.’
마차 밖 비추는 불터렉스 성을 보며 서리스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떠나는 시점에서 무의미했다.
불터렉스에 내부 사정은 얼추 파악했고.
예상 가는 지점과 과거로 돌아오기 전 기억을 조합해 해결 방법도 어림짐작했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불터렉스 성에서 눈을 떼었다.
발렌타인과 한 기약 없는 약속을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함을 다짐했다.
덜컹덜컹.
그렇게 하룻밤.
어느샌가 날이 저물어 갈 때쯤 하이드 상단주를 태운 마차가 다가왔다.
“서리스 님, 다음 마을에서 저희 상단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쉴 예정입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예, 그러죠.”
흰색 두건이 눈에 띄는 하이드 상단주 제이록의 물음에 서리스가 대답했다.
제나디아까지 갈 길은 아직 멀다.
가는 길에 휴식은 불가피하기에 그리 대답하자 제이록은 상단 쪽에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마을이 보이고 하이드 상단과 서리스의 마차가 멈추어 섰다.
하이드 상단 쪽이 운영하는 여관이기 때문에 서리스 고급스러워 보이는 객실에서 짐을 풀 수 있었다.
“식사는 1층에 주문하시면 전부 저희 쪽에서 대금을 치를 테니 마음껏 시키시죠!”
인맥을 만들 기회라 여겼는지 그는 서리스에게 팍팍 인심을 쏟았다.
‘게다가 미래에 있을 거래도 생각하고 있겠지.’
펜타니엄 직계와 안면을 튼다.
그것은 하이드 상단주 입장에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서리스는 제이록의 인심을 받아 주며 방에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
서리스와 마주친 세 사람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