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서리스가 식은땀을 흘리고.
그리건의 눈동자 속에 화마가 불타오르는 순간.
이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던 발렌타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할아버님이 은인인 서리스에게 자신이 명을 어긴 데에 대한 책임을 물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할아버님을 서리스 님에게서 떼어 놓아야 한다.’
자기 일로 서리스에게 피해가 가는 그것만큼은 기필코 피하고 싶었다.
“할아버님, 전부 제 잘못입니다.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발렌타인이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녀의 행동에 서리스를 노려보던 그리건의 시선도 발렌타인에게로 돌아왔다.
차갑게 식었던 그의 눈동자가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로 변했다.
그는 손으로 손녀딸의 머리를 누르곤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명을 내린 이유는 이런 일은 아직 어른들에게 맡겼으면 해서다.”
자신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품고 루니릴까지 유모로 붙여 줬지만, 손녀는 너무 올곧은 아이인 모양이다.
조금은 비뚤어져도 괜찮겠건만.
세상사 제 뜻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발렌타인, 만악의 질병은 어땠느냐.”
인자한 눈빛이 된 그리건이 질문을 던지자 발렌타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말로나, 공기를 가득 잠식한 질병은 금방이라도 숨통을 조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발렌타인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굳건함이 담긴 그 눈은 그리건이 과거의 자신을 떠올릴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막고 싶습니다. 불터렉스 직계로서.”
자신이 키운 손녀딸다운 대답이었다.
그리건은 웃음과 함께 그녀의 머리를 눌렀다.
그래, 새삼 느끼지만 이런 아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아이를 악습에서 지키고 싶었다.
“알았다. 오늘 가 본 것으로 충분하겠지.”
그런 순간 루니릴이 옅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충분하다마다요. 발렌타인 아가씨께서 무려 독운낭인까지 쓰러트렸는데.”
타박은커녕 칭찬해야 하지 않겠냐고 루니릴이 그리건을 바라보자 그도 조금 놀란 듯하였다.
“루니릴, 그 말이 사실이더냐?”
“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파문시키긴 했으나 루니릴은 제 딸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을 터.
“아닙니다. 전부 서리스 님 덕입니다.”
그리고 그런 루니릴의 말에 놀란 발렌타인이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독운낭인은 서리스 님이 쓰러트렸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조금 도왔을 뿐입니다.”
서리스.
또 한 번 언급된 이름의 그리건의 눈이 그를 흘겼다.
확실히 발렌타인 또래치고 흘러나오는 별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까는 발렌타인에게 붙은 잡놈이라 판단해 제대로 못 살폈다만 이놈.
‘나중에 크게 되겠군.’
손녀와 연관된 것은 기분 나쁘기 그지없으나 가진 잠재력만은 확실한 놈이다.
이건, 주의 깊게 봐 둬야 할 듯싶었다.
펜타니엄의 변화는 불터렉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알았다. 독운낭인은 예로부터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 사자이니 그에 따른 보상을 하도록 하마.”
그 말을 듣고 발렌타인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무척이나 예뻐 흐뭇했던 그리건이지만, 그는 곧 몸을 굳혔다.
웃는 거라곤 입술 꼬리 조금 올릴 줄밖에 모르던 손녀였다.
그런데 이런 웃음을 짓는다고?
“서리스 님, 잘 되었습니다!”
“네, 그러네요.”
서리스에게 달려간 발렌타인이 똑같은 웃음으로 화기애애하게 말했다.
설마 저놈을 만나고 손녀가 이렇게 변한 것이란 말인가.
충격과 함께 분노에 휩싸인 그리건이었지만, 그는 기뻐하는 손녀를 보고 이를 으득 깨물어 감정을 죽였다.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 걱정인 손녀가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 기쁘지만.
저런 잡놈과 어울리는 것은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을 가진 채 주먹을 쥐던 그의 눈에 루니릴이 들어왔다.
그녀는 우산을 어깨에 기댄 채 옅게 웃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나요?’
그리건을 바라보는 루니릴의 입 모양이 그려졌다.
독운낭인 이야기를 꺼낸 건 발렌타인의 변화를 그리건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망할 딸 녀석이.’
‘어머, 전 파문당한 몸이라 딸이 아니랍니다.’
딸의 수작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은 그리건은 이마를 감싸곤 몸을 돌렸다.
“나는 허락 못 한다.”
“고지식하시긴.”
피눈물을 삼킨 그리건이 떠나자, 갈리한도 한숨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일촉즉발 같았던 상황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한 번 눈감아 준 건가? 아님. 나중으로 미뤄 둔 건가.’
그저 서리스만이 그리건의 살벌한 눈의 정체를 깨닫지 못한 채로 식은땀을 흘렸지만 말이다.
“서리스.”
그러는 사이 서발광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음을 던졌다.
독왕이 세계 침식자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고 셋에게는 미리 말해 두었다.
그 탓인지 다들 독왕이 사라지자마자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서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당장은 세계 침식자와 접촉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나 없을 때 들리는 거 있으면 말해 줘.”
“알았어.”
서발광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저런 인간한테서 칼릭스 놈은 독을 어떻게 얻은 건가 몰라.’
서리스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이 몸의 원주인이 칼릭스의 수하인 레투앙에게 독왕의 독으로 살해당했다는 걸 떠올렸다.
물론 독왕한테 직접 독을 받아 사용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칼릭스의 행보에 조금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알아내야 할 게 많아서 즐거워 죽겠네.’
* * *
서리스 내가 무사히 불터렉스 성으로 귀환하고.
발렌타인 유모인 독산천귀 루니릴은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가주관이었다.
불터렉스 특유의 꾸미지 않은 듯한 복도를 지나친 루니릴은 가문관의 문을 노크 없이 열었다.
“또 관 앞에 호위도 안 두고 혼자 계십니까.”
루니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분재에 난초를 다듬고 있던 남성이 고개를 돌렸다.
40대 중반의 잿빛 머리카락을 한 남성은 인자한 웃음과 함께 혀를 찼다.
“혼자가 마음 편해. 그것보다 둘이 있을 때는 말 편히 해도 상관없다니까.”
“가주께서 오냐오냐해 주시니 제가 이리되는 것 아닙니까.”
독혈마군(毒血魔君)
불터렉스 그릭슨.
이 남자가 바로 불터렉스의 가주였다.
가주답지 않게 편한 옷차림인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찌하냐. 파문당했다 한들 네가 내 여동생임은 달라지지 않는데.”
“여동생도 여동생 나름입니다. 버릇없는 여동생이 뭐가 이쁘다고 굳이 다시 받아 주었는지.”
“하하, 다 뜻이 있는 것이야.”
“불터렉스 사람이 왜 이리 선하게 태어나셨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루니릴은 그릭슨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진짜 성격과 야심.
지금의 모습과 달리 그는 그리건의 직속을 제외한 가문 내의 사람들을 확실하게 휘어잡았다.
그 사실을 그리건이 눈여겨보고는, 자연스레 불터렉스를 그릭슨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리고 태상가주께서도 뜻이 있는 법이니.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마라.”
“……우리 가문의 숙명이니 알고 있습니다. 그 숙명 때문에 제가 가는 길조차 붙잡지 않으셨으니까요.”
“여리신 분이지.”
난초를 다듬던 가위를 내려놓은 그릭슨은 몸을 돌렸다.
그러곤 방에 구비된 목조 의자에 털썩 앉더니 긴소매를 정리하며 물었다.
“이런 이야기는 넣어 두고, 무슨 할 말이 있어 날 찾아왔지?”
본론을 꺼내자는 그의 말을 듣고 루니릴은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펜타니엄 쪽에서 온 청랑단 객들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그중 청랑단 소속 청랑호법인 직계 펜타니엄 서리스에 관한 것입니다.”
그릭슨의 눈에 살짝 흥미가 돌기 시작했다.
펜타니엄 일은 그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다.
최근 불터렉스의 변화도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 여러 일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니까.
무엇보다 루니릴이 직접 의견을 꺼낼 정도라면 예사롭지 않은 것이리라.
“무엇이지.”
“발렌타인 아가씨도 나이가 꽤 차지 않았습니까. 펜타니엄 서리스 님을 데릴사위로 들이는 것이 어떤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변화하고 있긴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근의 이야기.
불터렉스는 오래전부터 오직 가문의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폐쇄적인 성향을 지닌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폐쇄적인 성향을 지닌 가문이라도 딱 하나 외부 사람을 들일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데릴사위와 같은 제도였다.
“나이가 꽤 찼다곤 하지만, 발렌타인은 아직 어리다만.”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릭슨은 이미 루니릴의 뜻을 눈치챘다.
“서리스라는 아이가 그럴 정도로 가치가 있나 보군.”
“그 말대로입니다.”
루니릴의 눈이 처음으로 거세게 빛나기 시작했다.
“보물입니다.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 언젠가는 천하를 호령할 보물! 빼 올 수만 있다면 반드시 빼 와야 하는 보물이죠.”
루니릴은 직접 눈으로 보았다.
서리스가 펼치는 압도적인 무위를.
그것은 언젠가 펜타니엄이나 불터렉스 같은 대가문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천상사성.
그 위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를 무한한 값어치를 지닌 보물인 것이다.
“독산천귀라 불리며 세상을 직접 돌아본 네 말이니 확실하겠지.”
그리고 그릭슨은 루니릴의 눈을 믿고 있었다.
실제로 인재 등용할 때 그릭슨은 루니릴을 긴밀히 불러 살펴보게 하곤 했으니까.
“아가씨는 훌륭합니다. 제 조카이긴 하지만, 직계 아이 중 누가 뭐래도 불터렉스 가주 자리에 어울리죠.”
“하지만 서리스라는 아이는.”
“예, 그 이상입니다. 불터렉스는 반드시 서리스와 연을 쌓아야 할 겁니다.”
이 정도의 극찬이라니.
그릭슨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불터렉스의 보물인 귀왕령을 다루는 발렌타인을 보고도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던 루니릴이었다.
그런 루니릴이 이렇게까지 극찬을 한다는 건 그가 정말로 놓쳐선 안 될 인물이라는 소리였다.
“때마침 펜타니엄 직계 중 셋째라는 애매한 위치. 아직 꽃이 완전히 피지 않았을 때 수를 써 둬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나 서두른 것이었군.”
“불터렉스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고 그릭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몇십 년 전 그녀가 지긋지긋한 불터렉스라며 소리치고 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새록새록 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여동생이 이렇게나 바뀔 줄이야.’
사람은 참 여러 이유를 통해 바뀌는 법이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리건이다.
만약 발렌타인의 데릴사위 건을 지시했단 걸 알게 된다면, 그가 직접 모든 걸 뒤엎을지도 모른다.
“알았다. 그럼 루니릴. 아버지께는 들키지 않도록 부탁하지. 그 아이와 함께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너뿐이니.”
“맡겨 주세요.”
환한 웃음과 함께 루니릴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은 인자한 웃음으로 보고 있던 그릭슨의 표정 속에서 곧 웃음기가 사라졌다.
허리춤의 뒷짐을 쥔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창문 밖을 식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펜타니엄 서리스라.”
그 이름을 조용히 곱씹으면서.
* * *
방 한편.
가부좌를 튼 서리스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 뒤 몇 번인가 만악의 질병을 더 들리며 서리스는 불터렉스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러나 검은별의 기운에는 끝끝내 도달할 수 없었다.
단지, 알아낸 것이라고는 만악의 질병에게 오염당한 이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뿐.
‘골치군.’
서리스가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단 하나.
만악의 질병의 잔적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 사실은 불터렉스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악의 질병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신들의 숨통이 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서도 후계에 뒷일을 또다시 넘긴다.
세계 침식에서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대가문의 사명 때문이다.
‘그리건이 발렌타인을 만악의 질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이유는.’
자신의 손녀딸에게만은 그런 사명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기 때문이었겠지.
서리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지닌 검은별의 힘은 분명 흡수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펜타니엄의 청운귀명과 무척이나 잘 맞는 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을 통해 서리스는 만악의 질병의 잔적 또한 흡수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경지가 모자라다.
독왕과 같이 오랜 시간을 만악의 질병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쌓인 잔적은 서리스라도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다.
흡수는커녕 그러는 도중 서리스가 잡아 먹혀 버릴 수준의 잔적.
더 오랜 시간 단련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터렉스가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은 것은 나와 같은 힘을 지닌 이라서인가?’
가능성은 크다.
어느 사람이라도 죽음은 두렵다.
‘거기다가 불터렉스는 폐쇄적인 성향만큼이나 자기 사람을 아끼기로 유명하지.’
손녀를 그토록 아끼는 그리건이다.
‘손녀가 만악의 질병에 의해 죽는 것은 절대로 바라지 않을 테고.’
만약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세계 침식자와도 충분히 손을 잡겠지.’
물론 지금도 확실시된 것은 없다.
막연하게 불터렉스 중 누군가가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았다고 어렴풋이 느낄 뿐.
서리스는 그자가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 충분하다.’
서리스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불터렉스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성장에 달려 있었다.
만약 만악의 질병에 잔적이 문제라면 그걸 해결할 힘이 필요하고.
반대로 불터렉스 내부에서 무슨 꿍꿍이가 있다면 그걸 부술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정진하자.’
불터렉스가 세계 침식자에게 잡아먹히게 둘 수는 없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니까.’
아무리 펜타니엄과 척을 지는 일은 많아도 불터렉스는 인류의 편이다.
만악의 질병을 상대로 이토록 굳건하게 지킬 수 있는 건 불터렉스만이 유일하니까.
‘그럼 불터렉스 일은.’
이쯤 해 두는 게 좋을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