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직속 부대 독수의 수장.
불터렉스 갈리한.
독왕 그리건의 사촌 동생인 그는 오래전부터 그리건의 독수로서 활동해 왔다.
그리건의 신임을 받는 만큼, 당연히 그도 발언권이 강하며 발렌타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독왕의 명령을 어긴 발렌타인을 직접 찾아온 상황이니.
지금이 얼마나 골치 아픈 상황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리건 태상가주께서 하신 말씀이 말 같지 않으신 겁니까?”
독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 노한 듯 그는 발렌타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발렌타인 쪽에서도 할 말은 없었기에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자.
결국 보다 못한 루니릴이 그녀를 뒤로 세우며 앞에 나섰다.
“독수장, 너무 밀어붙이시는 것 아닙니까. 아가씨도 다 뜻이 있어서 이렇습니다.”
“지금 뜻이라 했나. 독산천귀.”
루니릴을 이름으로조차 불러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밖에서의 공적을 인정해 가문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고, 아가씨의 유모로서 봉사할 기회를 주었더니.”
그는 루니릴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던 듯 분노로 이를 까득 부딪쳤다.
“발렌타인 아가씨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게 네가 아니냐! 유모가 되어서 바른길로 인도하지는 못할망정.”
노성이 담긴 그의 말을 듣자 루니릴의 눈동자가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쥔 그녀의 손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태상가주님의 하수인 노릇밖에 못 하는 놈이 직계의 뜻을 무얼 안다고 지껄입니까.”
“뭣? 독산천귀 말 다 했나!”
“덜했습니다. 꼰대 갈리한.”
“너, 너 이.”
아니, 생각보다 이 두 사람 친한 걸지도 모르겠다.
서로에게 날 선 말을 나누면서도 서로를 해칠 의지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하시죠.”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은 발렌타인이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루니릴을 뒤로 물리고 갈리한의 앞에 섰다.
“제가 유모에게 부탁했습니다.”
“아가씨, 지금 태상가주님의 명을 정면에서 무시했다는 겁니까!”
“독수장, 알다시피 저는 직계입니다.”
발렌타인의 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만악의 질병을 막고 불터렉스를 책임질 직계.”
뜻이 담긴 그녀의 고요한 눈동자는 거세게 몰아치던 갈리한조차 멈칫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 눈은 독왕 그리건과 너무도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만악의 질병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들어간다는 겁니까.”
평생의 업이자 의무.
불터렉스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은 그녀다.
고귀할 정도로 숭고한 그녀의 외침 아래 갈리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태상가주님께서도 다 뜻이 있어서 이러한 것을 정녕 모르겠습니까?”
“할아버님께는 제가 직접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유모를 향한 질타는 거두시죠.”
내 사람을 건드리지 마라.
그렇게 경고하는 발렌타인을 보고 갈리한은 짧게 탄식했다.
‘과연 그분의 손녀다.’
갈리한은 발렌타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직계로서의 확고한 태도와 의무감을 보여 주는 그녀를 보고 오히려 기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독왕의 수하다.
그의 명을 어긴 발렌타인을 쉽게 용납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는 순간 갈리한의 눈에 다른 이가 들어왔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
펜타니엄 서리스였다.
명을 어겼다는 것에 분노하여 잠깐 이성을 잃었었던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펜타니엄 쪽 청랑단에서 추가 수색이 온다고 들었다.
그것도 펜타니엄 직계 중 한 명이.
‘분명 청랑호법이라 하지 않았나. 직계라고 해도 너무 어린 것 같다만.’
그런 의문과 함께 그는 발렌타인이 이번에 누구와 함께 만악의 질병에 갔는지 깨달았다.
발렌타인이 만악의 질병에 갔다는 소식 하나만 듣고 오느라 청랑단 이야기를 깜빡했던 것이다.
‘설마 펜타니엄과.’
그의 얼굴이 살며시 굳었다.
‘아직 꼬맹이라지만.’
펜타니엄 쪽에 괜한 약점이 잡힐 수도 있는 노릇.
자신이 펜타니엄 직계 앞에서 너무 섣부르게 발렌타인과 루니릴을 호통쳤음을 깨달은 그는 혀를 찼다.
그리고 그런 갈리한을 지켜보며 서리스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만악의 질병의 잔적이 몸 전체를 두르고 있어.’
오직 검은별을 지닌 서리스에게만 보이는 만악의 질병의 잔적.
그것이 갈리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 수준으로는 섣불리 건들기 힘들 정도로 많이 말이다.
‘잔적이 쌓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독왕의 수하인 만큼 갈리한은 수없이 많이 만악의 질병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동안 잔적들이 쌓이고 쌓여 저 지경까지 간 모양이었다.
검은별이 없던 당시에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던 서리스다.
그는 만악의 질병의 위험성을 새삼 깨달았다.
만악의 질병은 사람을 끝없이 좀 먹는 세계 침식인 것이다.
‘거기다가.’
갈리한에게서 검은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독수장인 그다.
독수와 용천의 만남을 직접 보았던 서리스의 얼굴 위로 미심쩍음이 지나갔다.
불터렉스에 찾아온 이유는 독수가 세계 침식자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냈기 때문이었으니까.
‘독수장인 갈리한은 상관이 없는 건가? 아래 녀석들의 독단적인 행동?’
해소되지 않은 의문에 서리스가 고민에 빠졌을 때.
그 순간이었다.
섬뜩한 기운과 함께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서리스의 시선이 향한 장소에는 한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잿빛의 짙은 머리카락과 수염.
만년설이 연상될 정도로 너무나 차가운 얼굴.
그 안에 자리한 잿빛의 눈동자가 모두에게 닿았다.
오싹.
그것만으로 서리스와 모두가 소름이 돋았다.
눈빛 하나에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느낌이었다.
분명 칠십에 가까운 노쇠한 사내일진대.
그러나 독왕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지금도 사람의 숨통을 조이기에는 충분했다.
“태상가주님!”
그의 등장에 놀란 갈리한이 외친 순간, 서리스의 어깨가 굳었다.
독왕 불터렉스 그리건.
천하오장성 중 한 명인 그가 이곳에 직접 온 것이었다.
서리스의 눈이 곧장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살폈다.
그리건은 서리스가 세계 침식자와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 인물 중 하나.
혹시나 그가 세계 침식자와 연관되어 있을 시 불터렉스는 끝장이라고 생각한 서리스였지만.
‘없, 어?’
갈리한과 마찬가지로 그리건에게는 검은별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갈리한보다도 더 심각하게 만악의 질병의 잔적이 남아 있을 뿐.
‘독왕은 세계 침식자와 연관 없다는 소리인가?’
듣던 중 다행인 소리지만.
독왕이 불터렉스 내부에서 움직이는 미심쩍은 기운을 놓칠 리가 없다고 보는데.
“발렌타인.”
서리스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그리건이 발렌타인의 앞에 섰다.
발렌타인의 눈동자 속에 긴장한 듯한 눈빛이 깃들었다.
그리건이 누구인가.
독왕이라고 불리며 적에게는 한없이 차갑고, 아군에게도 철저함을 강요시키기로 유명한 자다.
그런 그의 명을 발렌타인은 직접 어겼다.
‘안 좋은데.’
혹시나 이 건으로 발렌타인이 일에 책임을 물 거나, 가주 자리에서 멀어진다면.
발렌타인과 쌓아 온 관계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서리스가 무슨 조처를 해야 할까 걱정하고 있을 때.
그리건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설마 뺨이라도 내려치려는 걸까 하고 서리스가 무심코 몸을 앞으로 내민 순간.
그리건의 손이 발렌타인의 뺨을 쭈욱 눌렀다.
“하, 할아버님!”
“날 닮아 고집이 센 건 좋지만 그래도 할아비 말은 좀 들어 주지 그러냐. 이러면 못써요.”
방금까지 냉담하기 그지없던 그리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발렌타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예뻐 죽겠다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서 꿀 떨어지듯 떨어지고 있었다.
“독, 왕이지?”
“나 천하오장성의 이미지가 깨지는 느낌이야.”
아카펠이 경악하듯 중얼거리자 서발광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동네 할아버지네.”
그리고 도로시는 대놓고 한마디 던졌다.
‘손녀 바보였나.’
서리스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냉정, 냉철이라는 두 글자가 무조건 수식언으로 따라올 정도로.
독왕은 냉혈한과도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감정 없는 살수라 불리던 그가.
설마 손녀딸에게 이토록 끔찍한 애정을 쏟아부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선각이 얼마나 독왕의 이미지를 지키고자 통제해 왔는지 보이는 부분이었다.
‘오늘로 다 깨졌지만.’
무려 네 사람이나 되는 외부인이 그의 행각을 봐 버렸으니.
독수장 갈리한도 독왕의 추태에 이마를 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의 애정은 발렌타인에 한한 것일 뿐.
발렌타인에게서 시선을 떼자마자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독왕의 것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저들은.”
“아, 수색을 나온 청랑단 분들입니다. 이번 침식 출입 건은, 서리스 님에게 저를 데려갈 줄 수 있겠냐고 부탁드린 겁니다.”
발렌타인은 혹시나 불똥이 튈까 봐 서리스에 관한 걸 설명하기 시작했다.
서리스 쪽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자신이 떼를 쓴 거라며.
그녀가 부가 설명을 덧붙이자 그리건은 서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서리스의 몸이 굳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리건의 눈동자에서 사나운 백호와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지?’
서리스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깃들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죽일 듯 쳐다보는 그리건 탓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설마 내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단 걸 들킨 건가? 아니면 내가 검은별을 가졌단 걸 눈치챘다던가?’
무려 천하오장성인 독왕이다.
혹시나 서리스가 검은별을 가졌다는 것을 그라면 알아차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의심? 진심? 젠장, 눈으로는 언제든지 죽일 거 같은데.’
서늘한 기분 속 서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을 때.
그리건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서리스라.”
펜타니엄 직계.
게다가 나이대를 보아하니 발렌타인과 동갑이다.
그리건은 서리스를 바라보는 발렌타인의 눈길에서 묘한 것을 눈치챘다.
그 또한 표정이 거의 없기에 발렌타인의 얼굴 변화를 잘 안다.
그리건이 발렌타인을 너무도 예뻐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과 똑 닮았기 때문이다.
물론 제 어미를 닮아 조금 여린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귀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닮았다는 건즉슨 감정에 무디다는 것이고.
이 정도 감정을 품으려면 저 서리스라는 놈과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소리와 같았다.
서리스를 너무 노려본 탓인지 발렌타인이 그의 앞을 가렸다.
‘허어?’
그러나 그 행동은 그리건의 이마 위에 핏줄이 더 치솟게 했다.
금지옥엽인 자기 손녀딸 옆에 나타난 불한당 녀석이 영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펜타니엄의 직계.
펜타니엄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부딪친 적이 더러 있는 그리건이다.
‘오래전 불터렉스가 지역을 완전히 평정할 때도 귀찮게 굴었던 망아지 같은 놈들.’
지금이야 지역 전체를 불터렉스라고 부를 만큼 불터렉스가 모든 걸 지배하에 두었지만.
먼 옛날에는 아니었다.
한때는 불터렉스 지역은 수많은 가문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걸 규합하느라 한 불터렉스가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던가.
문제는 그 고생 중 상당수는 펜타니엄 쪽과 부딪침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리건은 생리적으로 펜타니엄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펜타니엄 치고 제대로 된 놈들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건 입장에서 서리스가 더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감히 펜타니엄 개잡놈이 내 손녀딸 옆에 붙어 있어?’
‘어디까지 들킨 거지.’
실로 동상이몽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손녀딸에게 극성인 그리건.
자신을 의심한다고 판단한 서리스.
전혀 다른 상반된 생각을 품은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