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무너지는 집 사이로 서리스의 눈동자에 다수의 인영이 포착되었다.
새까만 이빨과 눈.
다 빠진 머리카락.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들이 검은 모랫바닥에서 튀어나왔다.
보기에는 앙상하여 제 발로 걷는 것조차 못 할 것 같은 이들이었지만.
놈들은 살아 있을 적보다도 기민한 몸놀림과 힘으로 서리스 일행을 덮쳐왔다.
“사자(死者)들이다! 이빨과 손톱은 무조건 피해! 질병에 당한다!”
사자(死者)
본래는 인간이었으나 만악의 질병에 의해 변질한 인간형 마수들이다.
그들의 이빨과 손에는 질병이 묻어 있으며, 별마저 오염시키는 힘이 있다.
사자가 되어 버린 이상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비 없이 서리스는 달려든 사자의 머리를 검으로 박살 내 버렸다.
녹아내린 뇌와 살점을 터트리는 감각은 끔찍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수였다.
모래에서 끝도 없이 솟아오르는 손들이 사자의 수가 끝도 없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사자는 만악의 질병의 모래 속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
이대로라면 사자들에게 파묻혀 죽는 일만 남는다.
“루니릴 님, 제가 한 번 진형을 부술 테니, 모두를 데리고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달려드는 사자들을 부숴 내며 서리스가 외치자 루니릴이 이쪽을 보았다.
“맡겨 주세요.”
그녀가 우산을 빙글 돌린 순간, 서리스가 별을 끌어모았다.
그의 강렬한 별의 위용에 루니릴과 발렌타인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그의 별에 이끌리듯 모든 사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죽은 것들이 뭘 봐. 산 자 처음 보냐?”
히죽 웃은 서리스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금강잔월(金强虥狘)
박살(撲殺)
검은 모래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서리스의 강렬한 일격 앞에 모래 속에서 올라오던 사자들이 분쇄됐고.
범위 밖에 있던 대부분도 그 충격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걸 확인한 서리스가 고개를 위로 올렸다.
거기에는 우산을 펼치고 모두를 공중에 묶어 둔 채 유유히 걷고 있는 루니릴이 보였다.
역시 그녀에게 맡기는 건 옳았다.
“그대로 빠져나가겠습니다.”
서리스가 하려는 건 어디까지나 만악의 질병과 맞서는 게 아닌 수색이다.
굳이 사자들과 싸워 줄 이유는 없었기에, 서리스가 그리 외치자 루니릴 쪽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스!”
하지만 이내 서발광의 목소리를 들은 서리스는 그것마저도 힘든 것임을 직감했다.
검은 모래를 마치 물속처럼 유영하고 있는 거대한 고래 한 마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살들이 썩어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감각을 일으키는 고래, 독경이다.
독경은 검은색 모래를 등에서 거칠게 뿜어 올렸다.
그리고 그런 고래의 위에는 얼굴 형상이 새까맣게 그을린 한 인간형 마수가 서 있었다.
팔짱을 낀 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산발이 된 긴 잿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거칠게 휘날렸다.
“이런, 운이 없군요.”
그리고 그런 마수의 등장에 모두를 데리고 내려온 루니릴이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
사자들은 오래전 만악의 질병에 잡아먹힌 이들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 중에도 별호로도 불리는 사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생전에도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독운낭인입니다. 그가 여기까지 나오는 일은 잘 없는데. 이상하군요.”
300년 전 사망한 인물이나, 사자가 되어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인물.
독운낭인였다.
“독운낭인은 독경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뒤쫓기 어렵고,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쓰러트려야겠군요.”
지금까지 독운낭인이 잡히지 않았던 이유도 독경 탓이 크다.
저쪽이 자신들을 목표로 잡은 이상 응전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루니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서리스는 발렌타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안전하게 귀가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그는 만악의 질병이 처음일 발렌타인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서리스는 생각을 고쳤다.
‘그녀는 불터렉스 직계다.’
서리스가 걱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응전합니다.”
서리스가 대표로 입을 열자 모두가 동시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카펠.”
제일 먼저 이어진 것은 아카펠의 화살 비였다.
쏟아져 내리는 화살 비가 독경의 등에 박혀 나가자 독경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맞춰 서발광과 도로시가 동시에 뛰었다.
두 사람의 별이 환한 빛에 휩싸인 순간, 두 개의 검이 동시에 휘둘러졌다.
콰앙!
도로시와 서발광의 검격이 독경과 부딪쳤다.
“우우우우우우웅!”
고래 특유의 울음소리가 모두의 귀를 강렬하게 때린 순간, 독운낭인이 독경의 위에서 뛰었다.
그걸 본 루니릴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펼쳐진 그녀의 우산이 독운낭인이 휘두른 주먹을 정확하게 막았다.
뒤이어 루니릴이 우산을 빙글 하고 돌린 순간.
그녀의 우산에서 무수한 독침들이 독운낭인에게 쏟아졌다.
독침에 당한 독운낭인이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독운낭인도 과거 불터렉스였던 인물.
독침에 당했음에도 그는 별다른 지장 없이 재차 주먹을 휘둘러 왔다.
“쯔읏.”
루니릴이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악의 질병은 불터렉스 가문의 담당이기에, 그들에게 가장 까탈스러운 것이 바로 불터렉스 사자들이었다.
불터렉스 비기 사마독주(死魔毒主)를 익힌 그들은 기본적으로 독에 면역이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불터렉스의 독이 그들에게 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제로 이러한 사자들 때문에 불터렉스는 종종 펜타니엄과 주변 가문들에게 지원을 청해 왔다.
당시 청랑단 지원도 그런 이유였고.
결국 독을 쓰는 건 포기한 루니릴은 우산을 휘둘러 독운낭인의 공격을 쳐내곤 몇 걸음 물러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유모,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 서리스와 발렌타인이 동시에 섰다.
“발렌타인 님?”
그런 발렌타인을 보고 서리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발렌타인은 불터렉스의 직계로서 당연히 사마독주를 익혔다.
그건 즉, 그녀 역시 독운낭인을 상대로 불터렉스의 특기인 독들을 쓸 수 없다는 소리.
독산천귀인 루니릴의 독도 통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나선다 한들 같은 상황만 되풀이될 뿐이다.
그렇기에 독운낭인을 상대하는 건 서리스가 맡는 게 옳았다.
“서리스 님, 괜찮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루니릴 쪽이 서리스를 말리며 그녀의 뜻에 힘을 보탰다.
발렌타인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 했을 그녀가 말이다.
‘별다른 수가 있는 건가.’
“서리스!”
그러는 사이 저 멀리서 아카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쪽을 보니 모래 사이로 또다시 다른 사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독경까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마당.
사자까지 더해진다면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루니릴 님.”
“예, 부탁드립니다.”
서리스와 발렌타인에게 독운낭인을 맡긴 루니릴이 사자들에게 도약했다.
그림자 검을 쥔 서리스가 독운낭인의 앞에 섰다.
“선두에 서겠습니다.”
독운낭인은 루니릴과도 비등하게 전투가 가능한 강자다.
발렌타인이 맞서기에는 버거우니, 선두에 서는 건 자신이 하는 게 옳았다.
“맡기겠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아는지 발렌타인 쪽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독운낭인 쪽에서 다시금 공격을 시작했다.
“후웁!”
숨을 들이켬과 함께 서리스의 검이 독운낭인과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채엥챙챙!
상대는 단지 붕대만 감긴 주먹으로 맞서고 있음에도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독운낭인의 주먹은 강철보다도 단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운낭인의 허리가 뒤로 후욱 하고 빠졌다.
그럼과 함께 그의 검은색 붕대가 휘날리며 새까만 손이 드러났다.
귀독조라 불리는 사마독주를 스스로의 손에 잠식시켜 상시로 독기를 내뿜는 끔찍한 기술이었다.
손에서 흘러나오는 독기는 한 번 들이마시는 순간 폐가 녹아내릴 정도로 강렬한 극독이다.
저 독기 때문에 서리스도 좀처럼 틈을 잡기 힘들었다.
‘사용하는 힘은 검은별에 가까운가.’
살아생전 그가 사용했을 사마독주가 세계 침식에 의해 완전히 역이용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차별적으로 내뿜는 독기와 강철 같은 주먹.
불터렉스의 인물과 직접 맞서는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이쪽도 유효타를 먹일 수 없다.
그런 순간이었다.
서리스의 등줄기에 스산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한순간 놀란 서리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에는 발렌타인이 서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주위에 정체 모를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것들은 마치 유리 조각과도 같았다.
곧 그녀의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마치 선녀가 춤을 추듯 발렌타인의 손이 허공을 휘저은 순간.
그녀의 주위를 감싸 흩날리던 유리 조각이 독운낭인을 덮쳤다.
“그윽!”
그 순간 폭풍처럼 날아든 유리 조각들이 독운낭인의 곪은 살점을 찢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한 듯 독운낭인이 당황한 음색과 함께 급히 공격을 피했으나.
유리 조각은 집요하게 독운낭인을 쫓아갔다.
‘저게 바로.’
발렌타인을 설독화로 불리게 한 귀왕령이었다.
귀왕령(鬼王靈)
불터렉스에서 내려오는 보물 중 하나.
별을 깎아 만든 십만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암기는, 적의 내부에 침투해 그 속을 갈가리 찢는 무서운 명기였다.
그러나 단점은 귀왕령 하나하나의 의지를 불어 넣어야 하는 만큼 엄청난 별 운용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불터렉스에서도 귀왕령을 쓸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다름 아닌 발렌타인이 그 귀왕령의 사용자였다.
설마 이때도 이미 발렌타인이 귀왕령을 사용하고 있었을 줄이야.
어째서 루니릴이 그녀를 믿어도 된다고 말해 주었는지 알겠다.
귀왕령은 불터렉스에서 독보다도 뛰어난 강력한 암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지 독운낭인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자신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입힐 수 있는 발렌타인을 우선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딜.”
하지만 서리스는 독운낭인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별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린 서리스가 속도를 높이며 다시금 독운낭인과 맞부딪쳤다.
그에 따라 발렌타인의 귀왕령 조각들이 독운낭인의 피부를 찢고 스쳐 지나갔다.
“그르르륵!”
위기임을 직감한 것일까.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독운낭인에게서 침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독운낭인의 검은 붕대가 전부 풀리며 강렬한 독기가 쏟아져 나왔다.
독기를 정면에서 받아 낼 수 없었던 서리스가 숨을 삼키며 물러서자.
독운낭인은 그 틈을 타 서리스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발렌타인에게 닿기 위해서는 서리스를 쓰러트려야 함을 눈치를 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입을 꽉 다문 서리스의 검술식이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리스의 검이 허공에 마치 먹물 같은 그림자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리스의 검을 따라 발자취처럼 검은 잔적이 남았고.
그것은 얼마 뒤 또 다른 그림자를 낳았다.
이윽고 서리스의 주위를 그림자들이 에워싼 순간.
독운낭인의 주먹에서 강렬한 보랏빛 독기가 쏟아져 나왔다.
“서리스 님, 위험합니다!”
대기마저 녹여 버릴 강렬한 독기가 서리스를 뒤덮은 순간, 뒤늦게 알아챈 발렌타인이 외쳤다.
그러나 서리스는 이미 독기에게 잡아 먹히고 말았다.
그걸 본 발렌타인의 표정이 절망감에 뒤틀렸다.
“독운낭인!”
이내 그녀가 분노하듯 귀왕령을 휘두르려는 순간.
파삭.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육식(六式)
청운잠영(淸雲潛影)
보랏빛 독기가 빨려 가듯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서리스의 달뜬 웃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