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만악의 질병 앞 성벽.
준비를 마친 뒤, 성을 나와 성벽 앞에 모인 서리스 일행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해.”
눈앞에 만악의 질병을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는 게 마뜩잖은지 도로시가 혼잣말 내뱉었다.
그녀가 끈기가 있는 편이 아니긴 하나, 다른 이가 보기에도 꽤 오랜 시간 기다렸기 때문이다.
“서리스, 발렌타인 님은 언제쯤 오신데?”
“나도 정확하게는 말 못 하겠어.”
아카펠의 질문에 서리스는 뒷머리를 긁적이었다.
강자를 한 명 데려오라는 조건이 생각보다 힘들었던 걸까.
좀처럼 오지를 않는 발렌타인을 떠올리며 서리스는 고민했다.
혹시 성을 나오는 도중 그녀의 계획이 들켜 붙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그걸 감안하면 더 이상의 기다림은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서리스가 모두를 독려하며 말했다.
“서리스 님!”
그 순간 때마침 발렌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잿빛 대신 청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얼굴 느낌도 전과 다르게 바뀐 발렌타인이 있었다.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발렌타인인 줄 모를 외형으로 분장한 것이다.
하긴, 독왕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 본래 모습으로 만악의 질병을 들어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분장이랑 설득이 조금 걸려서 그만.”
“괜찮습니다.”
불터렉스 성부터 달려온 듯 숨이 차 보이는 발렌타인을 보고 서리스는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옆에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이지만 서리스만큼이나 큰 키와 길쭉한 팔다리.
그리고 잿빛의 머리카락과 함께 그녀의 손에는 새빨간 우산이 쥐어져 있었다.
“아, 저희 유모입니다. 제가 보장하는 강자입니다.”
“발렌타인 님을 모시는 루니릴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불터렉스 가문 사람이나, 파문당하여 이름이 이러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파문.
그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는 루니릴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독산천귀(毒傘賤鬼) 루니릴.’
과거 직계였으나, 불터렉스의 의무를 저버리고 떠나 버린 탓에 파문당한 자.
그런 그녀가 불터렉스 밖에서 쌓아 올린 일화는 펜타니엄 쪽에도 간혹 들릴 정도였으며.
그 점을 높이 사 불터렉스는 그녀가 돌아왔을 때 받아 줬다고 들었다.
‘이 무렵에는 발렌타인의 유모 일을 하고 있었나.’
발렌타인 입장에선 이모인 그녀다.
유모 일까지 해 준 만큼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이었겠지.
‘그것보다 독산천귀면 천랑후랑 동급이잖아.’
서리스 부탁대로 확실한 강자를 데려와 준 발렌타인이었다.
이걸로 발렌타인의 안전은 확실하게 보장된 셈이다.
“그럼 가 보실까요.”
“드디어!”
도로시가 기뻐하는 목소리와 함께 서리스는 성벽 앞 입구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불터렉스 문양이 새겨진 무복을 입은 문지기 두 명이 있었다.
사전에 서리스 일행이 온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인지.
인상착의를 아는 문지기 두 명은 그들은 순순히 보내 주었지만.
“독산천귀 님, 그분은 누구시죠?”
따로 소식을 들은 적 없는 외부 인물을 보고 의문을 보였다.
“새로 들어온 단원일세. 발렌타인 아가씨께서 나와 함께 서리스 님을 보필하라고 지시를 내려 주셨네.”
“아, 그렇군요! 들어가시죠.”
발렌타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문지기는 흠칫하며 길을 비켰다.
직계 쪽이 직접 내린 일이다.
루니릴은 발렌타인의 유모인 것은 공공연한 사실.
그녀가 이렇게 말한 이상, 일개 문지기로서는 감히 그 말을 의심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고.’
문제는 본인도 온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긴장한 듯한 발렌타인의 모습을 눈여겨보며 서리스가 입을 열었다.
“모두 별을 둘러.”
그가 지시를 내리자마자 전원이 별을 불러일으켰다.
만악의 질병.
최흉 중 하나이자 그 이름 그대로 모든 질병이 깃든 세계 침식이다.
별이 없는 일반인이 들어갈 시 모든 질병에 육체를 갉아 먹히며.
대략 한 시간 안에 목숨을 잃는 죽음의 땅인 이곳은.
그 명성에 걸맞게 지평선 너머까지 새까만 모래알이 펼쳐진 사막만이 보였다.
‘마수는.’
당장은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초롱과 달리 만악의 질병은 마수보단 질병이 더 무서운 곳이기 때문이다.
별의 수준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별이 있는 자도 질병에 잠식될 것이다.
그 전에 수색을 마쳐야겠지.
“이동하시죠.”
만악의 질병에 처음 들어온 발렌타인이 긴장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계로서의 최흉에 첫 발을 디뎠기 때문일까.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홀가분한 느낌이 보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안 나와!”
그렇게 한참을 이동했을까.
도로시 쪽에서 지루하다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성벽 앞에서 몇 시간.
만악의 질병에 들어오고 나서 몇 시간.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 확실히 지루함이 느껴질 만했다.
‘그 와중에도 별은 계속 소모되고 있고.’
별을 뚫고 어떻게든 침입하려는 질병의 흔적은 계속해서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
성벽이 지평선을 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시야를 가득 메운 기분 나쁜 검은 모래.
텁텁한 공기와 갈증.
왠지 모르게 사람을 옥죄어 오는 그런 감각이 느껴졌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할 정도로.
“저기 뭐가 보여.”
그러는 사이 서발광의 목소리와 함께 지평선 끝자락에 마을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세월의 풍파에 의해 진작 사라졌어야 할 마을이지만.
어째서인지 그 마을은 아직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생물은 존재치 않았다.
“질병 쉼터라고, 저희가 적당히 부르고 있는 곳입니다. 종종 저런 식으로 마을이 남아 있죠.”
기억에 있는 곳이었는지 루니릴이 설명을 덧붙여 왔다.
마을 내부로 들어오자 오래된 목조 폐가들이 여럿 보였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폐가는 꺼림칙했지만, 햇빛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소득이 전혀 없네.”
“이 정도 수색으로 뭔가 찾았다면, 진작 마주쳤을 거야.”
땀을 닦아 내는 아카펠에게 대답한 서리스는 다 낡아 빠진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출발 전 수색을 위해 받아 놓은 만악의 질병 지도였다.
일전에 하다크를 통해 용천이 만악의 질병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를 들은 서리스는.
그가 만악의 질병에서 숨어 있던 거처나.
몇몇 특이점들을 전해 들었기에 그쪽 위주로 수색할 속셈이었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인 이상 대부분 진실이었으리라.
‘평균적으로 4성 수준의 사람이 수색할 수 있는 지점은 여기.’
지도에는 돌아갈 때까지 필요할 별의 양을 체크하여 구분 선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세계 침식과 달리 만악의 질병은 별이 필수 조건이기에 이렇게 지도가 그려져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부터지.’
서리스의 눈이 붉은색으로 체크된 구분 선을 보았다.
6성급 이상 출입 가능이라고 선명하게 적힌 문구가 서리스의 눈에 잡혔다.
악해(惡㧡)라고 불리는 이곳.
이 지점부터는 만악의 질병이 어째서 최흉에 속하는지 체감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은 들어가는 즉시 모든 질병이 침투해 즉사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별이 있는 자들도 6성급 아래로는 침투하는 질병을 방어하지 못하고 육체가 붕괴된다.
‘거기에 더 큰 문제는.’
매년 악해가 조금씩 성벽을 향해 커지며 거리를 좁혀 오고 있다는 점이다.
몇백 년, 몇천 년, 그리고 몇만 년 후에는 모든 세상을 집어삼킬 것과 같이.
불터렉스는 이러한 만악의 질병을 막기 위해 여러 연구를 진행 중이다.
‘최흉답네.’
서리스는 자신도 들어가지 못할 악해를 보며 그리 평가하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느샌가 자신과 같이 지도를 뚫어지라 보고 있던 발렌타인이 보였다.
악해를 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는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저도 이곳에 들어가게 되겠죠.”
“직계니까요.”
혼잣말을 내뱉듯 말한 그녀의 말을 서리스가 대답했다.
어떤 의미론 대가문 직계의 숙명.
서리스가 끝없는 초롱과 맞서야 하듯이.
발렌타인도 만악의 질병에서 세상을 지켜야만 한다.
그것이 대가문 직계들의 숙명이었다.
‘최흉도 같은 세계 침식.’
분명 주인을 처치한다면 없앨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 주인이 너무 막강하거나 주인에게 도달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씁쓸하구만.’
서리스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분명 가문별로 인해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만, 최흉에는 아직도 닿지 못하고 있으니.
‘후대의 후대가 해 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나아간다.’
가문별에게 힘을 남기고 죽은 조상들도 모두 그러한 생각이었으리라.
“도망쳐도 됩니다.”
그러는 순간 루니릴이 서리스와 발렌타인 사이에서 말을 해 왔다.
“서리스 님과 아가씨께서는 아직 어립니다. 인생은 길면서도 짧은 법이니까요.”
자신이 그러했다고 루니릴은 말해왔다.
“유모, 그랬다가 가문에서 어떤 꼴을 당했는지 기억하잖습니까.”
“때로는 그렇다는 소립니다.”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들어 본 적 없는 구절을 내뱉었다.
“당신이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서 나온 말이죠?”
서리스가 의문을 보이자 그녀는 건물 밖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바뀌는 특이한 세계 침식에서 본 글귀입니다. 재밌는 말이라 기억해 두었죠.”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향해 조소를 내뱉었다.
“그리고 제 인생을 한 번쯤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세계 침식 때문에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루니릴을 보며 서리스는 여러 인생도 있음을 느꼈다.
‘그런 법인가.’
소드란 시절 소가문의 가주라는 직책으로 인해.
모두에게 멸시받으면서도 끝없는 초롱과 맞섰던 서리스는 쓰게 웃었다.
루니릴과 같이 그 자리를 버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서리스는 소드란의 자리를 계속 지켰다.
그것이 보답받지 못할 일이란 걸 알아도.
‘아니, 보답받았나.’
과거로 돌아옴을 통해 서리스는 다시 일어날 기회를 잡았다.
어찌 보면 이 기회는 자신이 소드란을 버리지 않았기에 얻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소드란의 별이 호응하듯 빛나는 게 느껴졌다.
포기하지 않았기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런 순간이었다.
멈칫.
전신을 타고 흐르는 감각과 함께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분명 방금까지 내리쬐던 태양은 어디 가고 스산한 밤공기가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아가씨, 잘 보아 두세요.”
모두가 긴장한 그때 루니릴의 말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촤륵 하고 우산을 펼친 그녀는 어두운 적막 아래 미소를 그렸다.
“만악의 질병에 잡아 먹힌 인간의 말로를.”
그리고 집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