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럼 오라버니, 손님분들 안내를 위해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운리가 그렇게 서발광을 눈독 들이고, 동시에 서리스가 하나 더 계획을 세웠을 때.
둘의 암투를 전혀 못 느낀 발렌타인이 앞으로 걸어 나섰다.
“아, 내가 너무 세워 두고 있었네. 얼른 가 보시죠.”
하운리도 순순히 자리에서 비켜 주었다.
그런 그를 지나친 서리스는 발렌타인의 안내를 받아 객실 한 곳에 도착하였다.
“머무르실 곳은 손님 객실 중 가장 좋은 곳으로 해 두었습니다.”
그 말대로 발렌타인이 안내한 객실은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목조 창틀 바깥을 가득 채우는 숲.
수십 명이 쓰기에도 넓어 보이는 방 안.
고급 원목으로 만들어진 가구와 금빛의 값비싼 치장품으로 도배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치를 부리지 않는 불터렉스의 가풍과는 반대이나.
불터렉스를 찾아온 객에게 위상을 보여 주기 위함으로만 제작된 방인 듯하였다.
“어떠신가요.”
“괜찮네요.”
하지만 서리스는 감탄사를 내뱉지 않았다.
자신은 청랑호법이기 이전에 대가문 펜타니엄의 직계다.
대가문 직계의 위엄을 지켜야 했다.
“대박, 우리 저택보다 크네.”
문제는 눈치 없게 도로시가 말해 버렸다는 거지만 말이다.
“수색은 언제부터 나가실 예정이십니까?”
“오늘 중으로는 나갈 예정입니다.”
서리스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일단은 수색하러 온 것이니 구색은 갖출 속셈이었다.
“……서리스 님, 외람되지만 친우로서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런 순간 서리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발렌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 연습은 이미 더 어울려주기로 했는데, 또 부탁할 게 있을까.
“무슨 부탁인가요?”
서리스가 되묻자 잠시 머뭇거린 발렌타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만악의 질병에 저도 같이 갈 수는 없겠습니까.”
“발렌타인 님도 말입니까?”
어차피 불터렉스 직계인 이상 그녀는 만악의 질병에 계속 들어갈 수 있을 텐데.
구태여 같이 들어가려는 이유가 있을까.
‘아니, 외부인인 나한테 부탁하는 거라면.’
서리스는 발렌타인의 행동에서 어딘가 미심쩍은 느낌을 받았다.
발렌타인 같은 사람은 일을 맡기면 철저하게 할 타입이다.
당연히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도 전부 지켰을 것이고.
‘오는 동안 발렌타인과 계속 표정 연습을 해서 알아.’
발렌타인의 표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된 서리스는.
그녀가 지금 하는 부탁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용무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동시에 발렌타인이 만악의 질병에는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서?’
아니, 그건 아니다.
만악의 질병은 말 그대로 모든 질병이 내포된 최흉의 세계 침식이다.
불터렉스는 이러한 만악의 질병을 역이용해 독과 관련된 여러 연구를 해 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가문의 직계인 그녀라면 오히려 이미 진작 만악의 질병을 경험해 봤어야 옳다.
“발렌타인 님, 혹시 평소에 지병이라든가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몸도 건강하고.
서리스가 보기에 발렌타인은 4성급이나 되는데.
진작 만악의 질병을 체험해 보고도 남았어야 할 그녀를 보고 서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안 되겠습니까?”
서리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동안 망설였다.
혹시나 무슨 이유가 있고, 그녀가 잘못된다면 그건 곧바로 서리스 책임이 된다.
“……좀 더 이야기부터 해 보죠.”
하지만 당장 발렌타인의 의견을 반대하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감이 말하고 있다.
이건 낚아채야 할 거 같다고.
“둘이서 이야기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이 주변에는 사람이 많다.
무엇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라면 그녀도 사람 없는 곳이 더 편하겠지.
“그럼 별채로 안내하겠습니다.”
꽤나 진지한 이야기인 듯하였다.
외부인인 서리스에게 부탁할 정도라면 사정이 깊겠지.
“가시죠.”
“예.”
서리스는 발렌타인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는 순간 앞서 걸어가던 발렌타인이 갑자기 사죄했다.
“서리스 님은 일로 바쁘신데 제가 괜히 폐 끼치는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듯 그녀는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발렌타인 님, 저희는 친우잖습니까.”
“그건.”
“친우는 돕고 돕는 겁니다. 너무 빚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서리스는 발렌타인이 자신을 어려워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서리스가 선뜻 말을 하자 발렌타인이 미안한 듯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서리스 님에게 도움 될 날이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충분히 도움 되고 있습니다.”
애초에 발렌타인 덕분에 성 내부를 이렇게 쉽게 둘러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서리스 님은 사람이 너무 좋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서리스는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대화 덕분에 분위기가 환기됐는지 발렌타인도 조금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다 왔습니다.”
잠시 후 발렌타인이 머무르는 별채에 도착했다.
발렌타인이 밖을 살핀 뒤, 조심히 문을 닫는 동안.
서리스는 그녀의 방을 눈으로 살폈다.
불터렉스 직계답게 실속으로만 이루어진 듯 사치는 전혀 없는 그녀의 흔적이 엿보였다.
‘세계 침식자의 흔적은 역시 발렌타인의 방에는 없어.’
역시 그녀는 세계 침식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누구일까.’
성에서 진득하게 느껴지는 검은별의 기운은 진짜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검은별은 서리스라도 쫓기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안다고 한들.
불터렉스 성을 제집처럼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우선.’
서리스는 발렌타인의 이야기에 먼저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이야기 들어 보죠.”
“네.”
발렌타인은 아주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짧게 호흡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서리스 님에게 이러한 부탁을 드리게 된 이유는 할아버님 때문입니다.”
“할아버님이라면.”
“독왕 그리건 님입니다.”
새삼 그녀가 그리건의 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 세계에서도 독왕을 할아버님이라 부를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지금은 가주 자리를 아버님께 맡기시고 물러나셨지만, 그래도 할아버님의 말씀은 중요합니다.”
“혹시 그리건 님께서 발렌타인 님이 만악의 질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건가요?”
발렌타인에게서 침울한 기색이 느껴졌다.
정답이었다.
“이유는 아십니까?”
발렌타인은 정확한 사정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리스의 눈에는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독왕이 직계인 발렌타인을 왜 만악의 질병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거지?’
서리스는 독왕의 인상을 떠올렸다.
발렌타인의 표정이 이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유전에 있다.
다름 아닌 그녀의 친할아버지 그리건이 그녀와 똑 닮은 무표정이기 때문이다.
냉혈한이라고 소문난 그리건은 철저하게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그의 성격상 당연히 불터렉스 직계는 진작부터 만악의 질병에서 키웠을 게 분명한데.
만악의 질병에 대한 정보가 짧은 서리스는 고민을 멈췄다.
“서리스 님도 알다시피 저는 직계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언젠가는 불터렉스를 위해 살아야 하는 저입니다.”
발렌타인은 진지하게 미래를 떠올렸다.
“그런 제가 만악의 질병에 들어가 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저를 따를까 싶습니다.”
서리스는 그녀가 어째서 열심히 표정 연습을 했는지 깨달았다.
수하들과 어울리고 그 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발렌타인은 저 스스로 노력을 해 왔던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불터렉스가 그녀를 가주로 추대한 것도 있지만.
남자만이 가주가 되던 불터렉스에서 이례적으로 가주 후보 자리에 오른 그녀다.
‘이러한 노력이 담겨 있었기에 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 그녀는 그리건이 만악의 질병에 출입하는 것을 막는 걸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불터렉스의 직계라면 무릇 만악의 질병을 막으며, 세계를 지키는 자들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반대하시는 분은 그리건 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가주인 그녀의 아버지는 허락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쉬운 부탁은 아니군요.”
“죄송합니다.”
그리건이 직접 막은 일이다.
불터렉스 쪽에서도 많이 쉬쉬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냥 거절하기에는 서리스 입장에서도 찝찝한 구석이 많았다.
‘불터렉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면.’
발렌타인이라는 열쇠를 무척이나 잘 다뤄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정말입니까?”
“네, 저도 같은 직계 입장으로서 발렌타인 님이 어떤 마음을 품으신 지는 잘 아니까요.”
발렌타인을 만악의 질병에 데려가면 그리건 쪽에서 반응이 나올 것이다.
‘도박 수긴 하지만.’
서리스는 펜타니엄에서 직접 온 조사단이다.
거기다가 펜타니엄의 직계.
이곳에서 서리스가 잘못되는 순간, 불터렉스는 그 즉시 펜타니엄과 전쟁이다.
펜타니엄은 그런 일에는 철저한 가문이니까.
‘불터렉스는 펜타니엄과 전면전은 줄곧 피하고 있었어.’
이 일을 발단으로 자신에게 바로 해코지를 해 오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발렌타인이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전제로 깔아야 할 테지만 말이다.
‘어차피 만악의 질병에 깊숙이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여차하면 검은별도 있고.
그녀의 안전 정도는 서리스가 보장해 줄 수 있었다.
“대신 발렌타인 님 말대로라면 그리건 님 말고는 반대하시는 분이 없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거기에 더해 서리스는 보험을 하나 더 들어 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발렌타인 님이 믿을 수 있는 강자를 한 분을 데려와 주세요. 그게 제 최소 조건입니다.”
혹시나 일이 생긴다 해도 발렌타인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한 명 데려오라고 서리스는 일러두었다.
발렌타인은 고민하는 기색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이 정도는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잘못되면 그쪽에 책임 전가한다.’
독왕과 관련된 만큼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대비해 두는 서리스였다.
조금 좀생이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저편에 넣어 두더라도 말이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네, 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렌타인 님의 부탁인걸요. 저야말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에는 큰 정보가 되었다.
“이런 일 있으면 또 말씀해 주세요. 같은 대가문 직계로서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철저하게 발렌타인과의 관계를 구축한 서리스가 친절하게 미소를 띄웠다.
그런 서리스를 보고 발렌타인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이렇게나 해 주시다니. 서리스 님은 내 귀인이시구나.’
그의 의도대로 발렌타인은 서리스에게 무척이나 큰 고마움을 느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다가 문뜩 서리스는 한 가지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발렌타인 님은 워너힐 아카데미를 진학하실 건가요?”
“네, 20살이 되는 대로 바로 시험을 칠 생각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었다.
서리스는 발렌타인이 불터렉스 가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워너힐 아카데미 졸업은 반드시 필수 조건이니 당연한 말이었다.
그녀가 불터렉스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흠도 있어선 안될 테니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일이 끝난 뒤에도 볼 일이 있겠네요.”
“아.”
발렌타인의 두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서리스 또한 워너힐 아카데미를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녀와 서리스는 같은 또래.
당연히 워너힐 아카데미를 진학한다면 시험장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그때는 라이벌이겠네요.”
발렌타인의 실력은 누가 뭐래도 확실하다.
주의해 두는 게 좋겠지.
워너힐 아카데미는 철저하게 경쟁 구조이니 말이다.
‘서리스 님과 같이 워너힐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구나.’
반면에 발렌타인은 그 사실이 꽤나 기뻤다.
‘워너힐 아카데미.’
두 사람 다 다른 의미로 워너힐 아카데미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은.
둘 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