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 이후 서리스는 그녀와 매일같이 표정 훈련을 하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발렌타인은 진척을 보였고 덕분에 서리스도 나름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조금씩 성과가 나오시네요.”
“전부 서리스 님 덕분입니다.”
최근 자신감이 붙은 듯 발렌타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러모로 재밌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얼마 안 남았군요.”
“아.”
서리스가 바깥을 바라보며 묻자 발렌타인은 어딘가 탄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불터렉스 성에 도착하면 서리스는 일에 들어가고 발렌타인도 그와 마주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 아쉬워 하고 있는 건가.’
서리스와의 표정 훈련은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또래 중 이렇게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누구든 자신을 떠받들거나 피하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서리스는 달랐다.
발렌타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마차의 창을 통해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볕을 쬐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서리스가 보였다.
‘서리스 님과 있는 건 즐겁다.’
근래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표정 연습이 아니어도 그와 하는 이야기도 재밌었다.
불터렉스에서만 줄곧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펜타니엄 쪽 이야기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할 말이라도 있으실까요?”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을 느낀 서리스가 물었다.
그의 질문을 듣고 그녀는 결심하듯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서리스 님, 제 청을 한 가지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심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서리스는 진지하게 자세를 바꿨다.
“네,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물론이죠.”
“그럼 제 친우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서리스가 눈을 깜빡이었다.
진지한 태도에 비해 전혀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매사에 진지한 사람답네.’
무슨 친구 되자는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할까.
“전혀 어려울 것 없는 일이네요. 하죠. 친우. 저도 발렌타인 님과는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애초에 이 제안은 서리스 입장에서는 두 팔 벌리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불터렉스 직계 첫째인 발렌타인과의 교우 관계라니.
그녀의 표정 연습을 어울려 준 훌륭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정말입니까?”
발렌타인의 눈이 한 차례 떨렸다.
“네, 정말입니다.”
“그럼 혹시 불터렉스에 도착해서도 이야기를 좀 더 나누러 가도 괜찮습니까?”
“좋죠. 오히려 제 쪽에서 부탁하고 싶은걸요. 저는 길을 잘 모르니 발렌타인 님이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책임지고 서리스 님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불터렉스에 도착하고 나서도 서리스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뻤던 발렌타인이 웃음을 지었다.
“아, 방금 웃음 좋았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면 수하분들도 편히 다가올 거에요.”
발렌타인의 어깨가 또 한 번 움찔거렸다.
“……좋았습니까?”
“네, 좋습니다.”
“성과가 있군요. 전부 서리스 님 덕분입니다.”
발렌타인은 등을 곱게 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그런 발렌타인을 보며 서리스는 만족했다.
‘이걸로 불터렉스를 마음대로 다녀도 발렌타인이 안내해 주는 걸로 넘어갈 수 있게 됐군.’
불터렉스를 적극적으로 조사할 기회가 생겼다.
발렌타인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해야겠다.
그녀 덕분에 좋은 명분이 생겼으니 말이다.
‘시작부터 운이 좋아.’
불터렉스에서도 앞으로 이런 식으로만 풀리면 좋을 텐데 말이다.
둘 다 그런 상반된 생각을 품은 채로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여 어느샌가 불터렉스 성에 도착했다.
“오랜 여행 노고가 많았습니다. 들어가시죠.”
서리스 일행은 발렌타인의 안내를 받아 성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불터렉스 성은 10층으로 이루어진 목조 건물이었다.
나무 기둥 사이로 보이는 숲과 개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서자.
서리스의 몸이 멈칫하였다.
코끝이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검은별이.’
불터렉스 성 어딘가에서 지독할 정도로 진하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불터렉스 쪽 누군가가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서리스 님?”
“아, 죄송합니다. 경치를 보느라 그만.”
서리스는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몸을 돌아섰다.
자신이 검은별을 알아차렸다는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확실해. 그렇다면 이유는.’
그들이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불터렉스가 최근 오대 대가에 속하고자 몸집을 불리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의심스러운 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서리스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면사포를 쓴 시중들이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서리스는 그들에게 짐을 맡기면서도 주위를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계 침식자의 흔적은 딱히 보이지는 않는데.’
하긴 대놓고 드러낼 리도 없나.
서리스가 경계반 근심 반으로 내부를 거닐었을까.
반대쪽에서 발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발렌타인.”
거기에는 한 남성이 흔들거리는 손과 함께 샤프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옆으로 전부 넘긴 발렌타인과 같은 잿빛 머리카락.
입 옆에 남아 있는 오래된 흉터.
그를 보자마자 서리스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왜냐하면 그는.
1년 뒤, 불터렉스에서 사형당하는 남자.
불터렉스 정보수집 전문 비선각의 당주.
불터렉스 하운리.
발렌타인의 사촌 오빠였다.
서리스를 본 하운리가 눈웃음을 그렸다.
‘타이밍이 잘 맞았군. 펜타니엄 서리스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는데.’
비선각 당주로서 이곳저곳을 다녔던 그는 서리스의 존재도 익히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펜타니엄 쪽에서도 여러 말이 나오고 있는 삼남.’
약 2년 전을 기점으로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최근 청랑단에서 청랑호법까지 올랐다고 한다.
‘어느 정도일까 했는데.’
이거 생각 이상으로 괴물이다.
마치 바위 위로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별이 그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보는 것만으로 잡아 먹힐 것 같은 기분이다.
‘들어 온 보고를 수정해야겠어.’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성장력을 고려해 올라간 보고였는데.
이번에 아예 다 수정해야 할 듯싶었다.
“가문에 찾아온 객이신 거 같은데,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지?”
하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넉살을 떨었다.
“펜타니엄 쪽에서 오신 손님분들입니다.”
발렌타인이 소개를 하자 그는 서리스와 눈을 마주치곤 눈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서리스가 이미 그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거지만 말이다.
‘하운리가 사형당한 이유.’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불터렉스 내부에서도 하운리의 사형은 쉬쉬하는 일이라고 전해 들었으니까.
‘나도 소가주 회의에서 청로단 쪽이 말해 줘서 알 수 있었고.’
사실상 일반인들은 모르는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했다.
‘혹시.’
서리스의 눈동자가 하운리를 빠르게 훑었다.
내부에서 세계 침식자와 관련된 인물이 하운리이고.
그러한 사실이 불터렉스 내부에서 발각되어 사형당한 게 아닐까.
‘하지만 세계 침식자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런 쪽으로 기울은 생각에 비해 하운리는 너무 깨끗했다.
마치 세계 침식자를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서리스는 다른 쪽으로 생각을 기울여 보았다.
‘불터렉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가 우연히 알게 되었고.’
비선각 당주인 그는 여러 정보와 얽힐 확률이 높았다.
그러다가 알면 안 되는 정보를 그가 알았다.
‘그래서 입막음을 위해 죽임당한 거라면?’
방계라곤 하나 불터렉스 사람인 그를 사형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아직 확신하긴 일러.’
정보가 더 필요하다 판단한 서리스는 그와도 연을 쌓아 두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이자는 나중에 불터렉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열쇠가 되어 줄 지도 모른다.’
우선 확실한 인상부터 남겨 놓아야 했다.
“반갑습니다. 청랑호법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청랑단이 온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는데 직계 분이셨군요.”
하운리는 천연덕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리스의 악수를 받았다.
“하운리라고 합니다.”
이쪽 정보는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정체를 숨기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면서 하운리는 뒤를 힐끔 살폈다.
서리스를 따라온 인물들을 확인해두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뒤에 선 세 사람을 본 순간 하운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거.’
서리스만 문제겠거니 했더니 뒤에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하운리는 비선각 당주로서 강자를 구분하는 법쯤이야 진작 터득해 놨다.
‘왼쪽은 분명 칸빌레 아카펠, 중간은 맹인 검사 서발광, 그리고 오른쪽은 제나디아 도로시.’
세 사람을 단번에 알아본 하운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네 명 다 올해 17살이라고 들었다.
‘우리 독룡대(毒龍隊)에는.’
이 나이 때에 이 정도 수준인 단원이 있었던가?
아쉽게도 하운리는 속으로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결단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펜타니엄이 이 정도 인재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들이 아직 17살이라는 소리는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연히 모두 다 펜타니엄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터.
‘우리 쪽이 그동안 너무 물렀군.’
인재 양성을 너무 게을리했다.
설마 펜타니엄 쪽에서 이 정도로 무섭게 인재가 늘어나고 있었을 줄이야.
‘하다못해 한 명이라도 빼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운리가 입맛을 다셨다.
그런 와중 그의 시선이 서발광에게 닿았다.
아카펠과 도로시와는 달리 서발광은 펜타니엄에 이렇다 할 연이 없다.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을 유의 깊게 보던 서리스가 속으로 옅게 미소 지었다.
‘오호라.’
서발광을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 이거지.
‘이거 써먹을 수도 있겠는데.’
서발광은 누가 뭐래도 서리스의 편이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서발광이 넘어갈 일은 없다.
하지만 거기에 서리스가 개입하게 된다면 어떨까.
‘하운리가 계속 접점을 가지도록 서발광 쪽에 말해 두면.’
서발광을 이용해 하운리와의 접점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서발광을 돌아본 서리스의 눈동자가 반달 형태로 휘었다.
그걸 본 서발광이 아주 잠깐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음을 눈치챘다.
‘서리스 님도 참 한결같으시지.’
아무래도 하운리를 이용할 계책이 떠오른 거겠지.
‘불쌍한 사람.’
서발광은 하운리에게 동정을 보냈다.
하지만 하운리는 그런 서발광의 연민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친절한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서리스에게 걸리면 끝장이건만, 아무래도 또 한 명 그에게 잡아 먹힐 희생자가 나온 모양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서리스만큼이나 눈치가 늘고 있는 서발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