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똑똑.
하다크의 집무실에 도착한 서리스가 노크를 하였다.
“하다크님, 펜타니엄 서리스입니다.”
안에서는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서리스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다크는 아까까지 단원들과 함께 어울리던 모습과는 다르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의 편한 복장이 연회를 즐겼음을 알려 줄 뿐이었다.
“볼일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바로 찾아왔군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니까요.”
그리 말한 서리스는 느긋하게 의자 하나를 빼 앉았다.
그런 그를 보고 하다크는 종이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용무입니까?”
“만악의 질병 쪽에 저를 포함한 수색대 파견을 요청드립니다.”
그 말을 듣고 하다크는 턱수염을 매만졌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태껏 생존자는.”
“네, 분명 없겠죠.”
“그걸 알면서도 부탁한다는 건, 역시 개인적인 이유겠군요.”
서리스는 숨길 생각 없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펜타니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다크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리스, 본인이 펜타니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겠죠. 아무리 청랑호법이라고 한들 직계입니다.”
펜타니엄과 불터렉스는 교류 관계에 있지만, 그래도 다른 가문이다.
직계인 서리스가 불터렉스의 영지에 직접 방문하는 건 외교적인 물의를 빚을 염려가 있다.
“허락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문제만큼은 확실히 하고 가야 했다.
섣불리 영지로 넘어갔다가 가문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건 서리스도 바라지 않았다.
하다크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이 부분은 펜타니엄 렐리즈님의 허락도 있어야 할 겁니다.”
검왕 펜타니엄 렐리즈.
그가 현재 펜타니엄에서 부가주 일을 도맡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다크는 아쉬운 듯 웃었다.
“청랑호법이 되고 난 뒤의 첫 임무는 타지군요.”
“청랑단에 피해 입히는 것 없이 잘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서리스는 청랑단 모두가 뽑은 청랑호법이니까요.”
그 말의 서리스는 하다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왔다.
하다크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을 했다.
직계가 타지로 넘어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래도 정식으로 해 두면 위험한 일은 없겠지.’
무엇보다 서리스는 검은별을 보는 것만으로 알아챌 수 있으니.
숨어다니거나 할 필요가 없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 독왕을 두 눈으로 보면 된다.’
부디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며 서리스는 다시금 복도를 걸어 자리를 떠났다.
며칠 뒤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서리스는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셀리앙에게 말해 만들어 두었던 영약 덕분에 서리스는 수련의 성과를 똑똑히 볼 수 있었고.
덕분에 매일 아침 수련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육체가 날이 가면 갈수록 무르익고 있어.’
끝없는 초롱에서 검은별을 다뤄본 이후.
서리스는 검은별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최근 금강잔월과 함께 검은별은 자신의 육체를 더더욱 키우고 있었다.
‘금강잔월은 육체 자체에 별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검은별에게도 해당되었다.
검은별은 언제나 유동적이었다.
청운귀명도의 그림자 속에 깃들 수 있는 것과 같이.
금강잔월을 따라 육체에 깃드는 것 또한 가능했다.
‘물론 남용할 생각은 없지만.’
서리스는 집중하던 것을 풀었다.
검은별의 존재 의의는 아직도 미지수다.
이걸 완전히 자신의 힘으로 만들기 전까지 검은별에만 기대선 안 되었다.
무엇보다 용천과 같이 검은별이 심어졌을 때.
검은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는 정신 장악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금강잔월은 정신계에도 강하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은 해도.’
그래도 사용은 하되 경계는 풀지 않아야 한다.
결국 단련은 필수 조건이 된 셈이다.
언젠가 검은별을 지우게 되더라도 아무런 문제 없이 강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서리스는 단련에 몰두하면서도 검은별을 주의하고 또 주의했다.
“서리스.”
그런 순간 서리스는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아침 훈련을 마치고 온 아카펠이 있었다.
그는 손에 종이 한 장을 서리스 앞에서 흔들거렸다.
“허락 떨어졌어.”
그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가 씨익 하니 웃었다.
불터렉스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 * *
오를레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시작된 여정.
서리스는 부가주에게 직접 내려온 서신에 적힌 불터렉스에서 조심해야 할 일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다 아는 거긴 하군.’
소드란의 가주인 서리스는 살면서 딱 세 번 불터렉스로 가 본 적이 있었다.
세 번 다 펜타니엄과 불터렉스 사이의 친선 교류였고.
그래서 서리스는 불터렉스 사람들의 얼굴을 아주 조금은 알고 있다.
대가문 불터렉스.
대가문 중 유일하게 오로지 혈족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가문이다.
다른 대가문들이 여러 소가문과 함께 최흉들과 맞서고 있다면.
불터렉스는 그런 소가문의 역할을 방계들이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불터렉스도 최근에는 타 가문 사람이나 상단을 받는 등, 지금과는 다른 방향을 보이고 있었다.
‘몸집을 불려, 오대 대가에 속하고 싶은 거겠지.’
같은 대가문에서도 급의 차이는 명백하게 존재한다.
펜타니엄이 오대 대가에 소속되어 있으니.
펜타니엄과 가장 가까운 위치인 불터렉스는 그 자리가 탐났을 것이다.
그 때문에 최근 불터렉스 쪽에서 여러 잡음이 나오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이맘때 만악의 질병 앞에는 새벽 마탑이 세워져 있었지.’
펜타니엄은 물론 세계 곳곳의 성벽 전체에 마법을 걸어 준 새벽 마탑.
그러한 새벽 마탑은 10년 정도의 주기로 마탑 통째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했다.
그런 새벽 마탑이 지금 있는 곳이 불터렉스 쪽이었다.
‘새벽 마탑은 불터렉스 쪽에서 생긴 문제를 알려나.’
중립적인 성향의 새벽 마탑이다.
성벽은 점검해 주어도 가문 일들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그들이니.
‘딱히 도움이 되지 않겠지.’
새벽 마탑을 머릿속에 지워 둔 서리스는 바깥을 힐끗 보았다.
레일로와 근접해 있기에 금방 갈 수 있는 오를레와 달리.
불터렉스는 남쪽 영지 제나디아를 거쳐 가야 하는 만큼 거리가 꽤나 멀다.
아무리 빨리 잡아도 최소 한 달은 걸리는 기간.
덕분에 서리스는 오랜만에 조금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앞으로 몇 시간 남았나.’
어느덧 제나디아 영지에 들어선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조만간 불터렉스로 넘어가는 성문이 보일 예정이었다.
문제는 불터렉스로 넘어가고 나서도 맞이해 주는 사람과 함께 또 며칠을 가야 한다는 거지만.
“마법사들은 공간 마법으로 이런 거리도 한 번에 날아갈 수 있다더라.”
아카펠의 말에 서발광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신기하다. 마법 제품은 많이 봤어도 마법사는 본 적 없는데. 새벽 마탑으로 가면 볼 수 있을까.”
새벽 마탑 이야기가 나오더니 어제부터 마법사와 관련된 얘기만 계속이다.
‘마법이라.’
서리스가 보기에는 가문별의 힘을 사용하는 무인들도 마법사랑 딱히 다르지는 않다고 보는데.
‘하긴, 마법은 태생이 다르긴 하지.’
서리스와 같은 무인들은 가문별의 힘을 빌려 쓰고 있다면.
마법은 별과 거래를 한다.
그들에게서 힘을 빌려 오고자 천문을 열고.
불러오는 힘에 대가를 건네고 세상에 없는 것을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가가 마법사로서의 자질.’
그렇기에 마법사는 무인과 다르면서도 별의 힘을 빌려 쓰는 점에서 같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서리스는 도로시를 힐끔 보았다.
의자 한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녀는 말없이 제나디아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나디아는 그녀의 고향이건만, 이곳으로 들어오고 나서 거의 말이 없는 도로시였다.
서발광과 아카펠도 그 사실을 아는지 도로시에게 구태여 말 걸지 않았다.
혼자 생각하고 싶은 게 많은 듯하였으니까.
‘마왕의 핏줄.’
도로시는 모두에게 아직 자신이 어떻게 마왕화를 쓸 수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서리스도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말해 주려고 할 때가 오겠지.’
서리스는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지금은 불터렉스에 가는 게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덜컹거리는 마차가 멈췄을 때쯤.
펜타니엄과 불터렉스를 나누는 성벽 앞에 드디어 서리스 일행이 도착하였다.
“고생 많으십니다.”
청림단 병사의 확인을 마친 뒤, 마차가 국경을 넘자 창문 너머로 불터렉스의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국경 바로 앞에 지어진 마을은 펜타니엄과 건축 양식이 많이 달랐다.
“여기가 불터렉스구나.”
아카펠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눈을 빛냈다.
“서리스도 불터렉스는 처음이었던가?”
“그렇지.”
이 몸으로는 처음이다.
“다들 촌스럽네!”
그래서 서리스가 적당히 맞춰 주자 도로시가 장난스럽게 외쳤다.
제나디아를 지나고 나니 평소와 같이 돌아온 그녀를 보다가.
서리스와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더니 실소를 내뱉었다.
도로시는 저래야 도로시다웠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불터렉스의 마을의 여관 앞에서 멈추었다.
이곳에서 불터렉스 쪽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흐으, 마차에서만 있었더니 찌뿌둥하네.”
서발광이 오랜만에 직접 걷는다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 한참 남았지.”
“마차 지루해에.”
아카펠과 도로시도 마차 생활이 조금은 지친 표정이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정도는 쉬고 갈 테니까. 다들 조금만 참아.”
“그래서 불터렉스 사람은 어디 있데?”
서리스가 모두에게 위로를 건네자 아카펠이 다가와 물음을 던졌다.
서리스의 시선은 한 여관을 향했고, 그의 시선을 알아챈 아카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침식자와 관련된 사람일까?”
“모르는 일이지.”
아카펠이 귓속말로 전하자 서리스는 어깨를 으쓱이었다.
불터렉스가 어디까지 세계 침식자와 관련되어 있을지 서리스도 주의를 기울일 속셈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세계 침식자와 관련된 사람이 나오는 것도 찝찝하다면 찝찝하니.
서리스도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들어가자.”
서리스가 앞장서서 여관의 문을 열었다.
5층으로 이루어진 고급스러운 여관에서는 향유와 술 냄새가 잔뜩 풍겨왔다.
생선 튀김을 열심히 먹는 한 낭인을 부러운 듯 보는 도로시를 두고 서리스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추었다.
불터렉스 혈족 특유의 잿빛을 머금은 긴 머리카락과 속눈썹.
곱디고운 흰 살결을 덮은 잿빛 무복 차림을 한 사람.
그자는 바로 불터렉스와 큰 연이 없는 서리스 조차 기억하는 아름다운 이였다.
불터렉스의 규수 발렌타인.
‘독왕의 첫째 손녀.’
바로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
서리스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같은 잿빛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청옥으로 조각한 듯한 인상인 그녀의 고개가 스르륵 옆으로 기울었다.
잿빛의 머리카락도 그에 따라 움직이고, 곧 커다란 눈망울이 무언가 눈치챈 듯 깜빡이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움직임에서는 어딘가 사람 냄새가 안 났다.
불터렉스는 폐쇄적인 가문으로 암기와 독을 주로 다룬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행동에는 자연스레 불터렉스식 기척을 죽이는 법이 묻어 나온 것이다.
“반갑습니다. 불터렉스 발렌타인이라고 합니다.”
딱딱한 말투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터렉스의 설독화(雪毒花).
과거로 돌아오기 전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던 호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