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눈앞을 뒤덮은 새하얀 섬광.
그 섬광 속에서 용천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딘가 망가진 듯 근육이 욱신거렸다.
그러는 사이 멍멍한 귀 사이로 환호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마 내가 진 건가?’
분명 마지막에 용천은 청운흡성으로 갑주를 둘렀다.
그런데도 자신이 이렇게 쓰러져 있다는 것은 서리스의 공격이 청운흡성의 한계치조차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다트론이 다가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보자, 현실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는 청랑호법 후보에서 탈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용천을 바라보는 이는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서리스가 용천을 보고 있는 이유는 그가 쓰러졌는지를 확인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검은별.’
용천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검은별을 보고 서리스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흡수할 수 있어?’
세계 침식에서 주인들에게 힘을 흡수할 때와 같이.
서리스는 세계 침식자에게 잠식된 용천에게도 흡수가 가능할 것만 같았다.
‘흡수하면 어떻게 되지?’
세계 침식자에게 잠식된 부분이 흡수되는 건가.
잠시 동안 손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던 서리스였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당장 흡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혹시나 용천이 잘못될 수도 있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세계 침식자가 이상함을 느끼고 직접 이곳에 찾아올 수도 있는 노릇이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서리스는 손을 내렸다.
이건 나중에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용천을 그냥 두는 건 찜찜하지만,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부분은 내가 더 강해지고 나서야.’
언젠가 세계 침식자를 감당할 수 있게 되고 해도 늦지 않는다.
“펜타니엄 서리스, 승리.”
다트론이 확인을 마친 듯 서리스의 승리를 선언했다.
“다음 청랑호법은 서리스다.”
내일 아만다의 은퇴식 이후, 서리스는 정식으로 청랑호법이 될 것이다.
그동안 열심히 한 일에 대한 보상일까.
안면에 조금은 기쁜 미소를 그린 채 서리스가 돌아섰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서리스 후배님, 축하해!”
그건 다름 아닌 클로나였다.
자신을 끌어안은 그녀를 보고 잠깐 당황한 서리스였지만.
그는 곧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쓰게 웃었다.
“크흐, 서리스, 이 자식이.”
“진짜로 청랑호법이 돼 버렸잖아.”
“야야, 청랑호법 되는 건 내일이야. 내일.”
다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근질근질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청랑단에서 함께해 온 이들은 모두가 서리스가 청랑호법이 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서리스가 해 온 것을 옆에서 모두 보아 온 이들은 그의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청랑호법이라는 자리를 그가 노력하여 직접 쟁취했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서리스!”
결국 참다못한 아카펠이 달려와 등을 세차게 때렸다.
뒤이어 모두가 달려들어 서리스를 축하하자, 그는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새삼 자신이 이곳을 참 좋아하는구나 하고 느끼며.
서리스는 모두의 축하를 받았다.
* * *
다음 날, 청랑호법 아만다의 은퇴식이 시작되었다.
청랑단 모두가 참가한 은퇴식에는 서리스의 청랑호법 정식 임명도 함께 예정되어 있었기에.
서리스는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천랑후.”
“잘 지내셨습니까.”
그를 부르자 천랑후가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해 보였다.
“못 보신 동안 더 일취월장하셨군요.”
“덕분에 말이지.”
서리스의 기반을 만들어준 것은 천랑후다.
그에게는 지금도 깊이 감사하고 있다.
“나도 왔다.”
그런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언제 보아도 거구인 그는 다름 아닌 하체펠 드웨이진이었다.
“못 본 사이에 좀 야윈 거 아니더냐?”
“야위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튼튼한데 말이죠.”
이 양반 대체 어디까지 커지기를 바라는 걸까.
실소하듯 서리스가 웃었다.
이내 그는 고개 숙여 감사를 올렸다.
“청랑단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흠, 너에게 이로웠으니 된 게지.”
헛기침하면서도 내심 기뻐하는 드웨이진이었다.
“서, 서리스.”
그런 순간 서리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서발광이었다.
서리스가 의아함을 품었을 때 그의 관심이 드웨이진에게 꽂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발광, 외할아버지께 볼일이라도 있어?”
“그, 그게.”
우물쭈물하는 서발광을 보고 서리스는 그가 바라는 것을 눈치챘다.
서발광은 오랜 옛날부터 육체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서리스를 보고 서발광은 저 스스로 배우고 싶다고 청해 왔을 정도고.
그런 육체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체펠 드웨이진.
서리스가 보아도 그의 육체는 최강이라 칭송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서발광이 드웨이진에게 동경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외할아버지, 이쪽은 서발광이라고 합니다.”
“음, 그래?”
서발광을 보고 드웨이진은 고개를 기울이다 우뚝 멈췄다.
“괜찮은 근육이로군. 제대로 된 단련으로 성장했어.”
“아, 가, 감사합니다!”
짧은 순간 자신의 몸을 보고 평가한 그의 모습의 서발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좋아했다.
설마 동경하던 드웨이진에게 칭찬을 받을 줄 몰랐던 서발광은 헤벌쭉하게 웃었다.
좋아하니 보기 좋긴 한데.
저 표정은 어떻게 해야 될 거 같다.
“하체펠 드웨이진 님 안녕하십니까.”
“착쁜놈, 왜 저래?”
그러는 타이밍에 때마침 아카펠과 도로시도 왔다.
그들을 보고 천랑후는 어딘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서리스 님, 좋은 친구분들이 많이 생기셨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그는 서리스에게 친구가 생긴 것이 꽤나 기쁜 모양이었다.
“아만다 청랑호법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런 순간 은퇴식 사회자를 맡은 월리엄이 입을 열었다.
손님들이 꽤 있어서인지 웬일로 똑바로 제복을 입은 그는 마이크에서 물러섰다.
제복 차림인 아만다는 입장과 함께 단상 위에 올랐다.
“어차피 다들 오늘 오랜만에 고생 안 하고 편히 쉬는 날이니 짧게 말하고 가겠습니다.”
아만다는 미소와 함께 청랑단을 한 차례 둘러보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청랑단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의 짧은 감사 인사에 몇몇이 박수를 쳤다.
그동안 함께 고생해 온 청랑호법의 은퇴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리스, 단상으로.”
그러는 사이 그가 부르자 서리스는 단상 위로 올라왔다.
이내 서리스와 마주한 아만다는 직접 제복에 있던 청랑호법 브로치를 떼어 걸어 주었다.
“뒤를 잘 부탁하마.”
브로치 증정과 함께 아만다가 청랑호법을 서리스에게 넘겼다.
이로써 서리스는 청랑호법 자리에 무사히 올랐다.
“축하한다!”
“축하해!”
아래쪽에서 선배들이 박수를 쳐 주며 축하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서리스는 그에 답하듯 짧은 인사를 하고는.
“다들 오늘은 즐기세요.”
식의 마무리를 알리듯 짧게 말했고, 이에 참석한 모두가 호응과 함께 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오랜만에 시작된 회식은 저녁 시간대가 되도록 이어졌다.
당번이 아닌 자들은 술까지 마셨고, 그런 훈훈한 분위기 속.
서리스는 53기와 함께 청랑단 건물 정원에 모여 있었다.
파티는 파티일 뿐.
서리스에게는 더 중요한 본론이 있었다.
“서리스,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아카펠이 질문을 던지자 떠오르는 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서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아카펠, 도로시, 그리고 서발광이 있었다.
세 사람과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함께 하게 될 거다.
그리고 서리스가 청랑단에서 가장 믿음직스럽게 여기는 동료들이기도 하고.
‘이번 건은 혼자서는 힘들어.’
그렇기에 서리스는 세 사람에게 미리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다들 나는 조만간 불터렉스로 갈 예정이야.”
“불터렉스? 거기를 왜?”
도로시가 고개를 기울이자 서리스는 그 말의 대답을 해주었다.
“겉보기 용건은 용천이 돌아왔으니 혹시나 생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한 추가 수색이야.”
그 말을 듣고 아카펠이 무언가 눈치챈 표정을 지었다.
“서리스, 그날 우리가 봤던 사람들은.”
“그래, 불터렉스 인물들이야. 그것도 독왕 그리건의 독수.”
“독왕이라니.”
아카펠이 짧게 침음 했다.
독왕의 존재는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악질 꼰대 아저씨가 불터렉스의 스파이란 소리야?”
그런 순간 도로시가 질문을 던져 왔다.
스파이라는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지만.
“아니, 진짜는 더 너머에 있어.”
“진짜라면 뭐가?”
서발광의 의문에 답하듯 서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계 침식자.”
서리스가 그 이름을 꺼내는 순간 세 사람 모두 몸을 굳혔다.
세계 침식자는 일종의 공포의 상징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 속마저도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
그들의 힘과 악행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용천과 불터렉스는 지금 세계 침식자와 관련이 되어 있어.”
서리스가 확신하듯 말한 순간 서발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서리스, 그렇다면 설마 독왕이.”
“그건 몰라.”
서리스는 단칼에 대답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 불터렉스로 갈 생각이야.”
그리건이 세계 침식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최악의 상황.
그것만큼은 아니길 서리스는 바라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다른 사람은.”
“딱 한 명, 내 집사야. 그에게는 그동안 혹시 불터렉스가 펜타니엄 내부에 숨어든 흔적이 있는지 조사를 맡길 생각이야.”
아카펠은 두통이 있다는 듯 이마를 감쌌다.
그러면서도 그는 서리스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서리스, 솔직히 몇 가지 의문이 있어.”
당연한 일이다.
용천과 불터렉스가 어째서 세계 침식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부터.
그에게 있어서 여러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스케일의 일에 우리가 직접 가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어.”
서리스는 천하오장성이나 천상사성 쪽에 세계 침식자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그 이야기를 꺼내려면 서리스가 어떻게 불터렉스나 용천이 세계 침식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명하는 순간 오히려 같은 세계 침식자로 몰려 죽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해.’
그리건이나 불터렉스가 세계 침식자와 관련 없는 게 가장 좋은 일이지만.
만약 관련 있다면 그 증거를 잡아야만 했다.
천하오장성이나 천상사성이 움직일만한 증거를.
“하지만 따라갈 거야.”
“나도!”
아카펠이 말한 순간 서발광도 따라 외쳤다.
처음부터 따라갈 생각이었다는 그들을 보고 서리스는 고마움을 느꼈다.
“직계님이라면 우리가 없어도 혼자 갈 거면서. 그런 재미난 거 혼자 즐기게 못 둬.”
“그럼 도로시는 두고 갈까.”
“너무해!”
서리스가 장난치자 도로시가 오랜만에 덤벼들며 투닥거렸다.
이걸로 53기 전원 불터렉스로 출발이 정해졌다.
그러나 여기서 아직 해결하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는데.
‘하다크를 어떻게 설득한다.’
하다크에게 수색을 아직 허락받지 못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