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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57화 (56/275)

57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

서리스와 아카펠은 그런 시간이 될 때까지 창문 너머 용천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성이 글러 먹었다는 건 잘 알겠네.”

서리스와 함께 용천을 감시했던 아카펠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용천은 청랑단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시비를 걸고 다녔다.

선배 행세하려는 노골적인 행동은 아카펠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청랑단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조사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서리스에게는 용천의 행동이 다르게 보였다.

겉으로는 돌아온 선배가 악습을 각인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본심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청랑단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나도 용천에 대해 몰랐다면 의심하지 않았을 거야.’

과거로 돌아오기 전 기억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서리스는 턱을 매만졌다.

슬슬 보고하러 갈 때가 되었을 거 같은데.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카펠도 슬슬 지루한 눈치다.

저래 보여도 용천은 실력은 확실하다.

그의 선록화가 없다면 미행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덜커덩.

그런 순간 용천이 방문을 열고 나섰다.

아카펠과 시선을 교환한 서리스 곧바로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용천의 발걸음은 청랑단 바깥으로 이어졌다.

청랑단 내부에서와는 다르게 밖에서는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

그는 길가는 노파의 짐을 들어 주는 등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저러니 그가 선배들이나 윗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이 심어져 청랑호법 후보가 된 것이리라.

‘이중성이 토악질 나오네.’

후배 입장에서는 가증스럽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는 계속해서 어딘가로 걸어 나갔다.

그가 들린 곳은 어느 술집이었다.

들어가지 않으면 내부를 알 수 없는 술집이었지만, 아카펠에게는 성안이 있었다.

“아카펠, 부탁할게.”

“그래. 이번이 끝이었으면 좋겠는걸.”

그 말과 함께 아카펠의 눈이 성안으로 바뀌었다.

벽을 투과하여 가게 내부를 보게 된 아카펠은 잠시 후,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가게 진열장 뒤편에 다른 길이 있어. 용천도 거기로 갔고.”

“쫓자.”

그리 말하자마자 서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아카펠이 본 대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문제가 생겼다.

저쪽도 선록화와 비슷한 수를 쓴 것이다.

“젠장, 미안, 서리스.”

아무리 아카펠이라도 투명해진 상대를 쫓을 방법은 없다.

애초에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괜찮아.”

아카펠에게 신경 쓸 거 없다고 말해 준 서리스는 건물 끝자락으로 걸어갔다.

서리스가 조용하게 숨을 내쉬었다.

‘힘 좀 빌리자.’

검은별.

지금은 밤.

달도 때마침 구름 뒤로 숨은 시간이니.

‘잘 보이지 않는다.’

서리스의 목덜미에서 아카펠에게 드러나지 않을 수준의 어둠이 흘러나왔다.

그림자 속으로 스며든 검은별에 의해 서리스의 감각이 고조 되기 시작했다.

‘검은별의 감각이 느껴지는 곳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눈을 감은 서리스는 오직 검은별의 감각만을 뒤쫓았다.

밤 아래 그림자들이 용천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런 순간.

번뜩.

서리스의 눈동자가 떠졌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 아래 입이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용천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별의 기척을 잡아낸 것이다.

“아카펠, 선록화 부탁해.”

“그래.”

서리스가 찾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옆에 온 아카펠이 서리스와 함께 사라졌다.

서리스는 곧장 용천을 뒤쫓았고, 잠시 후 건물 외벽 사이 공간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용천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잘도 꼼꼼히 숨어 왔다.

‘상대는.’

용천이 대화를 하는 상대는 다행히 세계 침식자는 아니었다.

그가 만약 오늘 세계 침식자와 직접 접촉을 하게 된다면 상부에 알리고 물러날 예정이었다.

그런 괴물들은 천하오장성이나 천상사성들에게 맡길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저놈들은.’

서리스가 유심히 그들을 살피던 도중.

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잠깐만.’

저 녀석들이 왜.

“그럼 잘 전하도록 하십쇼.”

용천이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아무래도 대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서리스?”

아카펠이 용천을 마저 쫓지 않아도 되냐고 돌아보는 동안에도 서리스의 눈동자는 그들에게 꽂혀 있었다.

‘저놈은.’

얼굴을 가린 천 사이로 한 놈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독왕 그리건의 직속 자객 중 한 명.’

독수(毒獸).

놈들이 용천과 접촉을 한 것이다.

칼릭스가 독왕의 독을 사용한 것이 밝혀진 탓에 펜타니엄을 방문했던 인물이라.

서리스는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들은 오로지 그리건의 명령만을 듣는 놈들이다.

그런 그들이 어째서 용천과 만나고 있는가.

‘설마 그리건이.’

세계 침식자에게 넘어갔다면.

서리스의 머릿속에서 최악의 상황이 그려졌다.

천하오장성 독왕.

그리고 대가문 불터렉스.

이 두 가지가 전부 세계 침식자에게 넘어갔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말이다.

그것이 가정된 순간 서리스의 얼굴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확신은 아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서리스는 손톱을 깨물었다.

불터렉스는 펜타니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대가문이다.

동시에 끝없는 초롱과 같이 최흉 중 하나 만악의 질병과 맞서고 있는 가문이다.

만약 그들이 세계 침식자에게 돌아선다면, 최흉을 억제할 수단 하나가 사라져 버린다.

‘망할, 세계라도 멸망시킬 속셈이냐.’

지금까지 어떻게 막아 놓은 최흉들이었는데.

이제 와서 불터렉스가 배신했을 수도 있다니.

‘확인해야 한다.’

불터렉스가 전부 세계 침식으로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일부만 넘어간 것인지 서리스는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건은 현재 가주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들었어.’

지금은 나이가 꽤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그리건이지만.

그는 불터렉스를 대표하는 천하오장성이다.

그런 그가 넘어갔다면 불터렉스가 어디까지 세계 침식자에게 잠식됐을지 모른다.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나.’

불터렉스가 어디까지 펜타니엄 내부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자칫했다간 불터렉스 쪽에 정보가 흘러갈지도 모를 노릇.

그렇다면 이 부분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쪽이 용천을 보내왔으니.’

이쪽도 똑같이 이용해 주마.

그리고 그러기 전에 서리스는 청랑호법이 될 필요성이 있었다.

“아카펠, 돌아가자.”

용천과 결판을 낼 시간이다.

* * *

다음 날, 서리스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청랑단주 하다크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밤 청랑호법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그 해답을 내놓은 것이겠지.

서리스가 집무실 앞에 선 순간 왼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무거운 발소리를 지닌 그는 서리스와 눈을 마주치곤 눈살을 찌푸렸다.

“쯧.”

어제 일 이후로 사이가 틀어진 덕분인지.

용천은 서리스를 보자마자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도 하다크가 어째서 자신을 불렀는지 알기 때문인지 더 이상 시비는 없었다.

“단주님, 저희 왔습니다.”

서리스가 노크를 하고 하다크를 부르자 안쪽에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렸다.

서리스가 먼저 문을 열자 용천이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얌체같이 굴기는.

“둘 다 잘 왔습니다. 어제 이야기는 나눴습니까?”

“네, 서리스 후배가 선배를 참 잘 대하더라고요. 역시 청랑단입니다.”

용천은 하다크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서리스와 친한 척했다.

서리스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을 부른 건 둘 다 이유를 알 거라 생각합니다.”

서리스와 용천이 하다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이 어찌 되었든 둘 다 청랑호법의 후보이니. 둘 중 한 명을 청랑호법으로 올릴 생각입니다만.”

“단주님.”

그런 순간 용천이 입을 열었다.

하다크가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용천은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서리스 후배가 실력 면에서 모자라지 않은 것은 인정합니다만.”

용천은 서리스를 자연스럽게 띄워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기수가 너무 낮지 않습니까? 서리스 후배는 청랑단에 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경험으로 밀어붙일 속셈인가.

“제가 보기에는 경험 면에서나 여러 가지로 서리스 후배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다음에 호법으로 올리는 것이 서리스 후배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겠습니까?”

용천의 말을 듣고 하다크는 눈을 깜빡이었다.

“용천, 자네는 서리스와 대화를 제대로 해 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용천이 멈칫하였다.

“그게 무슨.”

“여기 올해 서리스가 다녀온 세계 침식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럼과 함께 하다크는 서랍을 열어 용천의 앞에 서리스가 그간 해 온 일이 적힌 서류를 건넸다.

그리고 그 서류를 본 용천은 몸을 굳혔다.

사람이 1년 사이에 누비고 다닐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유달리 세계 침식 발생이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청랑단도 바빴죠. 서리스는 단 한 번도 세계 침식 지원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수는 다른 기수들도.”

“수가 문제가 아니죠. 저는 확실하게 보고 받았습니다. 세계 침식에서 서리스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그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하다크는 서리스가 청랑단에서 해 온 일들을 전부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를 청랑호법 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청랑단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청랑호법 후보 자리를 반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직접 증명해 냈으니까요.”

용천은 일을 그르쳤음을 깨달았다.

업적 면에서 서리스를 까 내릴 방법이 없던 것이다.

하다크에게 살짝 고마움을 느낀 서리스였다.

청랑단에서 지낸 기간으로는 서리스도 할 말이 없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어제 서리스는 청랑호법 후보로서의 첫 임무도 무사히 해결하고 왔죠.”

최흉인 끝없는 초롱에서도 성과를 낸 서리스였기에 용천은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생각이 짧았습니다.”

속으로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겠지만, 하다크 앞이니 용천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오죠. 실력이나 업적 면에서 모자람이 없는 두 사람이니 대련 한 번으로 결정 낼까 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간단한 해결 법이 나왔다.

“그런 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용천도 하다크가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릴 줄은 몰랐던 듯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서리스는 오히려 당찬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 없으십니까?”

서리스의 도발을 듣고 용천의 몸이 굳었다.

그러곤 그는 하다크 앞에서도 표정 관리를 못 하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후배, 그런 말 한 걸 후회 하게 해 주지.”

세계 침식자에게 잠식이나 된 놈 혼쭐 내 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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