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숲 사이로 한 팀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클로나 선배 쪽 위치는?”
“그렇게 안 멀었어.”
제로에게 대답을 들은 서리스는 더더욱 속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델리티드와의 싸움의 여파가 남아 있긴 하지만 상황이 급했다.
‘당장 레가놀과의 일대일 상황은 피하고 싶은데.’
체력이 많이 빠진 만큼 레가놀과 라파즐리의 싸움은 최대한 길어지는 방향이었으면 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라파즐리 쪽을 원호할 속셈이었다.
라파즐리라면 서리스가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을 눈치챌 테지만.
당장을 살아남으려면 서리스를 도울 테니까.
“다 왔어!”
제로의 외침과 함께 서리스는 발을 멈췄다.
숲속 언덕 아래 저편.
라파즐리 팀과 레가놀 팀이 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라파즐리 팀이 밀리고 있다.
더군다나 제일 중요한 라파즐리와 레가놀이 보이지 않았다.
“서리스 후배님.”
그런 순간 클로나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서리스는 전투 쪽에서 시선을 떼곤 클로나에게 곧장 물었다.
“상황은 어떤가요.”
“라파즐리는 도주했고 레가놀이 그걸 쫓고 있어.”
서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장 지금 아래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문제였다.
라파즐리가 당하지 않아도 그의 팀이 전멸해 버리면 의미가 없다.
“그럼 팀을 두 개로 나누겠습니다. 라파즐리 선배 팀을 도울 팀과 라파즐리 선배 쪽에 합류할 팀으로.”
“알았어. 그럼 서리스 후배랑 내가 라파즐리 쪽으로 가고.”
서리스는 제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로, 라파즐리 팀을 원호하는 건 너한테 맡긴다.”
“어? 나, 나한테?”
나한테 맡겨도 괜찮냐고 제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샬롯이나 서리스 일 이후로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던 제로는 살짝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서리스의 눈을 보고 제로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만 믿어! 내가 지킬게!”
“그래, 그래도 위험할 거 같으면 빠져도 돼. 전면적으로 돕는 게 아니라 뒤에서 하는 걸로 충분하니.”
당장은 몰라도 어차피 결국 라파즐리 팀도 적이니 말이다.
“알았어! 나만 믿어!”
제로의 의욕 넘치는 힘찬 대답에 서리스는 살짝 걱정했다.
적당하게 하라는 말을 이해한 걸까.
‘내 팀에 들어왔으니 믿어 줘야겠지.’
그리 말하면서도 서리스는 아만다 쪽을 슬쩍 보았다.
이번 건 대표끼리의 싸움인 만큼 아만다는 낄 생각 없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제로 쪽은 자신이 잘 맡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만다가 이 녀석이 폭주하지 않도록 잘 통제해 주겠지.
“가죠. 클로나 선배.”
레가놀을 쫓는 건 클로나의 팀과 함께하기로 했다.
“서리스 후배님, 몸은 괜찮아?”
“전 튼튼한 걸로 소문났잖아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괜히 이렇게 팀원을 모은 게 아니니까.”
든든한 말이다.
그래도 달려오는 동안 금강잔월로 회복력을 올렸다.
체력은 빠졌을지언정 잔 상처는 많이 회복된 서리스였다.
‘내 경지가 좀 더 높았으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새삼 강함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서리스였다.
언젠가 완전무결의 육체를 완성하는 날이 오겠지.
그런 생각을 품으며 서리스가 숲속을 뛰어가던 순간이었다.
다수의 기척이 그의 감각에 포착되었다.
레가놀과 라파즐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엔드롱 후배,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 있었어?”
클로나의 부름에 그가 턱까지 올려 입은 폴라티의 목 부분을 스윽 내리며 입을 열었다.
“레가놀 선배를 방해하지 마시죠.”
“방해하는 건 너희 쪽이라 생각하는데.”
둘의 대화가 한 차례 이어졌다.
“서리스, 먼저 가.”
그러는 사이 클로나의 동기 마란이 서리스에게 슬쩍 말했다.
자신들이 시선을 끌 테니 먼저 가라는 소리였다.
서리스가 클로나 쪽을 잠시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스가 살짝 발을 옆으로 빼는 그 순간, 클로나의 그림자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커다랗게 치솟았다.
콰앙!
청운귀수로 변한 그림자가 엔드롱과 그의 팀을 내려칠 찰나, 서리스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 속 튀어나온 엔드롱이 짧은 단도를 클로나에게 내질렀다.
클로나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피하며 그의 멱살을 잡아 메쳤다.
하지만 엔드롱도 떨어지기 직전 그림자로 자신을 받아 안정감 있게 착지했다.
여유로운 그를 보고 클로나는 눈을 찡그렸다.
“서리스 후배님을 저렇게 쉽게 보내 줘도 돼?”
“어차피 상대는 따로 있거든요.”
준비해 둔 수가 있다 이건가.
클로나는 서리스를 쫓을까 했지만 엔드롱이 쉽게 놔주지 않을 것임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서리스를 믿고 이쪽에 전력을 다 하는 게 맞겠지.
엔드롱을 쓰러트리고 서리스 쪽에 합류한다.
그 생각을 하며 클로나 팀과 엔드롱 팀의 전투가 시작됐다.
* * *
클로나에게 엔드롱을 맡기고 서리스는 곧장 레가놀과 라파즐리를 뒤쫓았다.
‘사달이 나기 전에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속도를 높여 빠르게 달린 순간.
서리스의 시야에 아주 잠시 수풀의 묘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 움직임을 발견하자마자 서리스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몸을 곧추세우자.
그의 목 앞에 핏하고 검이 스쳐 지나갔다.
서리스의 목을 노린 상대는 멈추지 않고 바닥에 납작 엎드린 듯한 자세로 치솟았다.
마치 뱀처럼 서리스의 몸을 휘어 감듯 오른 상대의 역수와 정수로 쥔 식칼 같은 검이 번쩍였다.
하지만 상대는 서리스다.
상대의 옆구리를 손으로 낚아챈 서리스는 그대로 투포환 하듯 던져 버렸다.
후웅 하고 날아간 상대는 나무에 부딪히기 직전, 나무에 달라붙듯 착지했다.
“도로시.”
서리스를 덮친 상대는 다름 아닌 도로시였다.
계속 안 보인다 생각했더니 레가놀 편으로 들어갔었나.
‘보아하니 이유야 서발광과 아카펠이랑 같을 테고.’
서리스는 가볍게 어깨를 풀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그냥 무시하고 가 버리기에는 끈질기게 쫓아 올 거다.
차라리 빨리 정리하고 레가놀 쪽으로 가는 게 나았다.
“그 둘이랑 잘 만났어?”
도로시의 질문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직계님 시간 없는 거 알아. 그러니 최대한 빨리 끝내 줄게.”
그 말과 함께 도로시는 주머니에서 깃털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도로시가 깃털을 입에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별의 움직임이 뒤바뀌었다.
도로시의 얼굴을 가리는 새까만 가면 위로 두 개의 여우 같은 귀가 살랑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등 부분을 찢고 작은 날개가 치솟았다.
‘마왕화.’
예전 세계 침식에서 너머로 본 적 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도로시가 얼마나 진심으로 상대하고 싶어 하는지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꺼내고 싶지 않아 하는 거 같더니.’
청랑호법이 되면 서리스는 기수를 나가게 된다.
동기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리스라면 무조건 청랑호법이 될 것이라고.
‘믿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동기 생각도 좀 더 해 달라고 해야 할지.
쓴웃음과 함께 서리스가 그림자 검을 뽑았다.
“와.”
서리스가 짧게 중얼거린 순간 도로시의 인영이 사라졌다.
날갯짓으로 몸을 공중에 띄운 그녀가 가속했기 때문이다.
‘빨라.’
지금 도로시가 물고 있는 깃털의 주인은 호색조(狐色鳥).
저번 4성 세계 침식의 주인이었다.
특징은 자유롭게 늘릴 수 있는 날개와 함께 엄청난 가속도를 자랑한다는 날쌘 놈이란 점.
그리고.
채엥!
강철보다도 더 튼튼한 날개였다.
한순간 커진 도로시의 날개가 서리스의 검을 맞받아쳤다.
그럼과 함께 도로시는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틀며 검을 휘둘러 왔다.
빠른 속도와 공중인 만큼 움직이는 데 제약이 비교적 덜했고.
거기다가 검보다 날카로운 날개까지 있으니.
도로시는 정말 날개 달린 호랑이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고작 이걸로는.’
서리스에게는 안 된다.
그가 발을 쿠웅 구른 그 순간 치솟은 그림자가 비행하던 도로시의 앞을 막았다.
갑작스럽게 그림자가 튀어나오자 그녀는 공중에서 선회하려 했고, 그 찰나 서리스의 검이 도로시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앙!
서리스의 검을 중심으로 광풍이 불었다.
검은 피했지만, 광풍에 휘말린 도로시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서리스의 검의 형태가 바뀌었다.
검이 창과 같이 변하자, 서리스의 팔 근육이 거칠게 부풀었다.
그럼과 함께 그의 창이 대기를 찢으며 도로시에게 날아들었다.
콰직!
하늘에서 균형을 잃은 도로시가 창에 옆구리를 꿰뚫리고 바닥에 추락하기 직전.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가 힘겹게 숨을 내쉬자 서리스는 새로운 검을 만들어 쥐었다.
“그거밖에 없어?”
지금 도로시는 아카펠과 서발광이 보여 준 것보다 못하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도발을 던졌다.
도로시가 좀 더 진심이 될 수 있도록.
서리스의 도발에 도로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더 있어!”
커다랗게 외친 도로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도로시는 서리스를 상대로 마왕화 하나만으로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서발광도 아카펠도.
이게 마지막일 거라 생각하고 꺼낼 수 있는 최대를 보였을 거다.
‘그러니까.’
자신도 한계를 넘을 거다.
도로시가 쥔 것은 자그마한 뼈 한 조각이었다.
서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본 순간.
도로시가 깃털과 함께 뼈를 물었다.
파직!
그 순간 도로시는 뇌가 타 버릴 듯한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전신으로 흘러오는 힘이 너무 강력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지금이라도 문 걸 뱉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왜인지 서리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리스에게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기 때문일까.
도로시는 그의 시선에 더더욱 전의를 불태웠다.
‘할 수 있어.’
도로시가 스스로의 재능을 믿었다.
이를 아득 깨 물은 도로시가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도로시의 몸 전신으로 전율이 흘렀다.
촤라라라락!
날개 깃털이 흩날렸다.
깃털이 빠진 자리에는 뼈들이 서로가 서로를 엉켜가며 메웠고.
동시에 도로시의 가면과 그녀의 옷 위로도 뼈들이 솟아나며 갑옷처럼 감쌌다.
마왕화(魔王化)
이중(二中)
호색조 · 백련골(狐色鳥 · 白孌骨)
성공했다.
두 가지 마왕화를 동시에 사용한 도로시의 입에서 옅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이 폭발적으로 넘쳐흘렀다.
그러나 눈앞이 벌써부터 흐릿했다.
‘유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하지만 충분하다.
전력으로 부딪쳐 보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직계님, 이게 내 전부야.”
도로시가 웃었다.
정말로 기쁨을 담은 그녀의 웃음을 보고 서리스도 짧게 웃었다.
늘 산짐승 같던 그녀가 저런 웃음을 타인에게 지을 수 있는 시점에서.
그녀는 성장했다는 소리겠지.
“그래, 전부 써 봐.”
서리스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서로가 다시금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