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청랑호법 아만다.
올해 43세인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느긋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은퇴까지 앞으로 한 달.
이제는 완전히 결정난 은퇴를 떠올리며 그는 살짝 주름진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참 오래 했군.’
지금이 몇 년 차더라.
그것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인 그는 텅 빈 오른쪽 팔이 있던 자리를 매만졌다.
그는 1년 전 세계 침식에서 팔을 잃었다.
팔만 아니었다면 조금 더 할까 했지만, 이제는 세계 침식을 가기도 힘든 그이니.
은퇴하는 게 맞았다.
‘그래도 청랑호법이었으니.’
은퇴해도 연금은 잘 나올 예정이다.
남은 생은 즐겁게 살아 봐야겠지.
똑똑.
그런 순간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아만다 님,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펜타니엄 서리스.
최근 아만다의 귀에도 자주 들려왔던 이름이었다.
‘직계면서 직계 같지 않은 아이라고 했었지.’
무엇보다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이 그의 최고 장점.
“들어와.”
아만다가 입을 열자 서리스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만다 님, 저도 있어요.”
그리고 그의 옆에는 클로나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서리스는 정중한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아만다와 서리스는 면식이 없는 사이다.
서리스가 들어올 무렵 아만다는 이미 팔을 잃어 세계 침식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아만다는 서리스와 클로나가 지금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아만다의 호기심을 느껴서일까.
서리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우선, 은퇴하시는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다.
아만다는 고생도 딱히 아니었다는 듯 손짓했다.
“맞아. 아만다 님, 그거 알아요? 벌써 청랑호법 후보를 뽑고 있어요.”
“와, 내가 은퇴한다고 칼같이 뽑는구나.”
그러자 클로나가 불쑥 튀어나와 아만다에게 말을 걸어왔다.
두 사람은 원래도 친한 편이었기에 마음이 잘 맞았다.
“그래서 여기 있는 서리스 후배님이 후보 중 한 명으로 올랐어요.”
아만다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서리스를 보았다.
서리스는 분명 작년에 청랑단으로 들어온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벌써부터 청랑호법 후보로 나설 줄이야.
직계라서인지 아님 본인 성격인지 참 대담한 아이다.
“클로나, 너는?”
“저는 안 나가요. 서리스 후배님이랑 같은 팀 할 거거든요.”
클로나의 안 좋은 버릇이 나왔나.
조금 쓴웃음을 짓던 아만다는 곧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알리고자 자신을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진짜 본론은 따로 있구나.”
아만다가 둘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청랑호법 시험과 관련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내가 클로나와 친한 건 맞지만, 부정행위를 도와줄 마음은 없는데.”
“부정행위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습니다.”
서리스는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양 말했다.
“대신 아만다 님이 들으시기에도 어쩌면 재밌을 것 같은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제안이라.
곧 은퇴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아만다의 눈동자 위로 살짝 흥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좋아. 들어 줄 테니 이야기해 봐.”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인 그다.
들어 주는 거야 어려울 것 없다는 듯 아만다는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곤 손목에 턱을 괴었다.
“청랑호법 후보 모의전에 함께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팔꿈치를 삐끗해야 했다.
이 아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서리스, 난 청랑호법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확인차 물어봤지만, 서리스의 태도는 강경했다.
혹시 시험의 내용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잖나. 청랑호법 후보 시험에 청랑호법이 나온다니, 가당키나 하겠어.”
“아뇨. 가능합니다. 시험 내용상 참가 기준은 어디까지나 청랑단원이니까요.”
아만다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분명 청랑호법도 포괄적으로 보면 청랑단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걸 받아들이겠어?”
애들 싸움에 어른이 껴서 쓰나.
장난이 지나치다는 듯 아만다는 남은 한 손을 내저었다.
“아만다 님, 요즘 몸 찌뿌둥하시죠.”
그러는 순간 클로나가 불쑥 끼어들어 왔다.
팔을 잃기 전 시절.
매일같이 세계 침식을 왔다 갔다 해서일까.
그는 클로나 말대로 실제로 최근 1년간 몸이 점점 더 늘어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오히려 세계 침식 속에서 더 편하게 있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솔직히 좀 심심하시잖아요. 저는 아만다 님께서 활기찬 모습 본 지 엄청 오래됐거든요.”
그렇게 축 처져 보였었나.
아만다는 조금 쓰게 웃었다.
클로나의 말마따나 팔을 잃고 나서 아만다는 확실히 생기를 잃었다.
그도 평생 검만 다뤄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더 이상 검을 쥐지 못한다는 건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다.
아만다의 쓴웃음을 짓는 사이 서리스가 한 발자국 불쑥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한바탕하시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으로 청랑단원들과 함께 몸 좀 풀고 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만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1년이나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본 적 없는 그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쭉 없을 것이 분명하다.
“재밌을 거예요. 요즘 애들 엄청나게 쌔거든요. 안 봐주셔도 될걸요?”
클로나도 바로 거들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여기 있는 서리스 후배님만 해도 5성이에요. 5성! 17살에 5성이라니까요.”
클로나가 마치 자기가 이룬 것처럼 자랑스럽게 외치자, 아만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겉에서 흘러나오는 별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설마 5성이었을 줄이야.
“어때요. 요즘 수준 높죠? 서리스 후배님 말고도 이런저런 재밌는 애들 많아요.”
“전력을 다하셔도 될 거라고 봅니다.”
이 아이들 자신이 흥미 있을 것 같은 것만 툭툭 던진다.
근래에 조용해진 것뿐이지 아만다는 원래도 활력 넘치는 성격이다.
전투를 즐기고, 강자와의 싸움은 좋아한다.
주목받는 것도 당연히 좋아한다.
실제로 이 나이 먹고도 아직도 제 마음대로 산다고 부모님께 한 소리 듣는 아만다다.
지금이야 은퇴 시기가 코앞이고, 팔도 잃었으니 자중하고 있지만.
그는 계속 속이 간질거려, 이것이 내심 신경 쓰이는 마당이었다.
팔을 잃으며 너무 갑자기 인생 절정기가 끝나 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타이밍에 이 둘이 지금 치고 들어왔다.
마지막 한탕.
앞으로는 없을 청랑단이라는 눈부신 새싹들과의 전투.
‘거기다가.’
아만다는 원래 오른손잡이였다.
오른팔이 없는 지금 그가 과연 얼마나 제 실력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참가하는 것을 매우 불합리하다 여길 만한 게 없는 것이다.
세계 침식도 못 가는 외팔이 늙은이.
아만다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 정도면 모의전에 나가도 별문제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 저도 모르게 자기변명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래도.”
아만다의 입이 열리자 서리스는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대표 간의 전투는 어차피 제가 나설 겁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해주셔도 아만다 님이 있으신 것만으로 든든할 테니까요.”
이 아이, 이상하게 립서비스가 좋다.
“무엇보다 아만다 님이 은퇴한 다음 정해질 청랑호법이잖습니까. 누가 될지 직접 보고 싶지 않습니까?”
왠지 모르게 나이에 비해 노련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윗사람들 눈치 보면서 소드란을 운영해 온 서리스의 짬은 어디 안 가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아니야. 나도 그렇게 눈치 없지는 않다.”
아만다는 자신을 진정시키곤 서리스와 클로나의 폭주를 멈추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살짝 눈을 굴리는 게 망설이는 기색은 확실히 느껴졌다.
그런 아만다를 보고 클로나와 서리스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둘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 졌다.
“알았어요. 그럼 생각이 끝나시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금은 한 번 빠져야 할 때다.
그리 생각한 둘은 발 빠르게 뺐다.
이런 부분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리스가 마지막 여지를 남겨 놓고 아만다의 집무실을 나갔다.
어느새 덩그러니 남은 집무실 안.
아만다의 눈은 계속해서 소리 없이 흔들렸다.
* * *
서리스가 아만다의 집무실을 나온 시점.
아카펠과 서발광은 누군가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청랑단 건물 내부에서 조용한 공터 쪽에 선 두 사람은 자신들을 부른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밤의 어둠이 내리앉은 그곳.
달빛에만 시야를 의존해서인지, 그의 얼굴은 나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제안, 어떻게 좀 생각해 봤어?”
그의 물음을 듣고 아카펠과 서발광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을 모은 이에게 있어서, 둘에게는 확실히 한 번쯤 시도하고픈 제안이었다.
서리스가 청랑호법이 된다면 분명 두 사람과는 더 이상 같이 지내지 못할 것이다.
청랑호법은 기숙사 대신 개인 방이 따로 주어지니까.
업무 이전에 공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남성이 한 제안은 단 하나.
서리스가 청랑호법이 되어 그들의 곁을 떠나기 전에.
한 번 제대로 붙어 보고 싶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너희 두 사람에게 나쁘지는 않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어떨까.”
거절해도 상관없다.
남성은 그저 두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싶을 뿐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척하였다.
그런 그를 보고 아카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그런 아카펠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남성은 서발광 쪽을 돌아보았다.
“서발광, 너는.”
아카펠은 하겠다고 하였다.
서발광 입장에서는 주군으로 모셔야 할 서리스지만.
그도 욕망이 있었다.
서리스에게 진심으로 부딪쳐 보고 싶다고.
그가 언젠가 자신을 필요로 할 그날을 위해서라도 서발광은 성장하고 싶었다.
“할게요.”
남성의 입가의 옅은 미소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