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윌리엄의 말의 대표들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였다.
“미리 말해 두지만 청랑호법은 귀찮다. 은퇴야 너희 마음대로지만 일반 단원보다 일이 엄청 많아.”
눈에 안 보이는 게 잔뜩이라며 윌리엄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참고로 나라면 안 한다.”
이미 청랑호법인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
“그러니 진짜로 할 마음 있는 놈만 보는 거다.”
진짜 본론은 이거겠지.
제대로 안 할 거라면 처음부터 할 생각하지 말아라.
그의 말을 듣고 한 명이 슥 손을 들었다.
“전 안 하겠습니다.”
그는 51기 대표 엔드롱이었다.
대표치고 꽤 조용한 그는 청랑호법 같은 것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오케이, 엔드롱은 빠지고, 나머지는?”
더 있냐는 듯 슥슥 둘러보자 한 명 더 손을 들었다.
“저도 빠질래요.”
그 사람은 클로나였다.
대표로서 활동을 잘해 오던 그녀였기 때문일까, 윌리엄은 꽤 의외라는 눈치였다.
“클로나, 너는 청랑호법 자리를 원할 거 같았는데.”
“아직은 시기상조라 서요.”
“50기인 녀석이 무슨. 네 뒤에 52기, 53기도 남아 있는데.”
라파즐리와 서리스는 동시에 어깨를 으쓱이었다.
“알았다. 그럼 클로나를 빼고 4명이로군.”
총 4명.
48기 레일로 레가놀
49기 델리티드
52기 라파즐리
53기 펜타니엄 서리스
청랑호법 후보에 출마하기로 한 이들이다.
명단이 정해지자 윌리엄은 펜을 귀에다가 꽂곤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었다.
“청랑호법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바로 시험인가.
“첫 번째 시험은 청랑호법 후보로서 다른 단원들의 신임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가다.”
그리고 골치 아픈 주제가 나왔다.
정확히는 기수가 가장 짧은 서리스에게 가장 불리한 주제였다.
“그렇게 하면 기수끼리 뭉치지 않을까요?”
델리티드가 질문을 던지자 윌리엄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각 단원은 자신과 같은 기수의 대표를 선택할 수 없다.”
그렇게 윌리엄은 그가 걱정한 사안이 일어나지 못하게 못 박아 두었다.
이로써 결국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했는가가 중요해졌다.
“모은 단원과 함께 가까운 시일 내에 모의전을 치르게 될 거다. 잘 기억해 둬라.”
대표들은 다들 신임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단원들이 그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많은 신임을 얻는다.
“그럼 1차 시험 내용 전달은 끝. 이만 해산해라.”
윌리엄은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안에는 기수의 대표들만 남아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시험 동안은 서로가 적.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듯하였다.
“엔드롱.”
그 순간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 중에서 가장 기수가 높은 대표.
48기 대표 레일로 레가놀이었다.
레일로 가문의 둘째인 그는 가주인 형의 보좌를 위해 청랑단주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끝없는 초롱과 가까운 레일로는 예부터 청랑단과 깊은 관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다크에게도 신임이 있는 그는 누가 뭐래도 청랑호법 후보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 밑으로 들어와.”
그리고 모두의 앞에서 레가놀이 고했다.
51기 대표 엔드롱의 실력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
더불어 그를 제 쪽으로 데려가는 순간, 51기 또한 그를 따라 레가놀 편으로 돌아설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걸.
‘모두가 보는 앞에서 했다는 건.’
자신이 청랑호법이 될 것이라는 선언과 같았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레가놀 선배.”
레가놀과 엔드롱은 원래도 사이가 좋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엔드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레가놀의 편에 붙었다.
“와, 레가놀 선배 너무하네요. 지금 짜고 치는 거예요?”
그런 순간 라파즐리가 더 이상 두고 볼 생각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진심으로 청랑호법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라파즐리, 네가 서리스를 이용해 나에게로 올 표를 가르려는 건 눈치챘다.”
그리고 레가놀에게서 이어진 말의 라파즐리는 미소 지었다.
마치 무슨 소리냐는 듯이.
‘역시 그런 생각이었나.’
서리스도 라파즐리가 적극적으로 자신도 끌어들일 때부터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서리스는 레가놀과 비슷한 점이 많다.
언제나 앞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무력.
미래에는 펜타니엄을 책임질 신분.
그리고 믿을 수 있는 확고한 성격.
청랑단에는 이미 레가놀이라는 좋은 표본이 있다.
당연히 레가놀에게 끌리는 사람들이 서리스 또한 좋게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라파즐리는 이점을 파곤 든 것이었다.
레가놀 쪽에 갈 인원수를 서리스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하여튼 라파즐리 성격 더러워요.”
옆에서 클로나가 거들자 라파즐리는 울상을 지었다.
“아니, 왜 이렇게 저를 몰아가요. 다들 너무하시네.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라파즐리는 뒤로 빼지 않았다.
“물론 조금 노리긴 했지만요. 솔직히 레가놀 선배 너무 사기잖아요.”
유쾌한 받아침이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서도 라파즐리는 분위기를 유도해 나갔다.
“저는 쟁취할 수 있을 때 쟁취할 겁니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한다. 그게 청랑단 아니겠어요.”
라파즐리가 레가놀 상대로 도전장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서리스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꽤나 훈훈하게 상황이 이어지고 있긴 한데.
한 가지 잊고 있지 않나.
‘어째서 내가 청랑호법에 진심으로 도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서리스를 적수로 보지 않고 있었다.
‘하긴, 기수 때문인가.’
서리스는 이중 가장 기수가 낮다.
라파즐리보다도 낮은 그이니 위험 선상에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살짝 열 받네.’
자신의 성격이 나쁘다는 건 서리스 본인이 번번이 말했던 사실.
그는 은근히 오기가 강하며, 한 번 꽂히는 순간 폭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서리스가 클로나를 스윽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클로나 선배, 제 쪽에 와 주세요.”
서리스가 폭풍의 눈이 되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아주 잠시 동안.
대표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레가놀과 라파즐리까지는 이해하는 눈치였지만, 서리스가 여기서 강수를 둘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클로나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인기가 많다.
아까 전 윌리엄이 아쉬워한 이유도 클로나가 청랑호법 자리에 어울리는 인재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더불어 그녀에게는 가장 큰 강점이 있다.
‘여자 단원은 전부 클로나를 따라올 확률이 높다.’
청랑단 대표 중 유일한 여자가 바로 클로나다.
여성끼리의 유대감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와, 어쩔까나.”
클로나는 일부러 장난 섞인 어조를 내뱉었다.
그러면서 살짝 서리스 쪽으로 의자를 움직였다.
싱글벙글 웃는 게 즐거운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이런 거에서 밀당 하면 성격 안 좋아 보이니까. 좋아. 그럴게. 서리스 쪽으로 들어갈래.”
레가놀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클로나가 저렇게 쉽게 서리스 쪽으로 붙을 거라곤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라파즐리 쪽도 허를 찔린 눈치였다.
“에취, 다들 클로나를 엄청 아끼네요. 단원들은 아직 많으니 걱정 마요.”
단순한 델리티드만이 상황을 이해 못 한 채 순진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회의는 끝난 거 같네요. 그럼 저는 단원들을 모아야 해서 이만.”
“나도 같이 가야징.”
서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클로나가 쪼르르 따라 나왔다.
회의장 밖으로 나온 서리스는 클로나 쪽을 힐끔 보았다.
“선배,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죠?”
“무슨 소리야. 서리스 후배님. 내가 그런 앙큼한 짓을 할 리 없잖아.”
클로나는 장난스레 서리스보다 한두 발짝 앞으로 나갔다.
“참고로 서리스 후배님, 나는 나중에 청랑단주가 될 거야.”
그러곤 몸을 반만 스윽 돌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잘해 줘야 해.”
“제가 가주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요.”
“여자의 감이야.”
엄지와 검지로 만든 브이 자로 자신의 턱을 누른 클로나를 보고 서리스는 실소했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럼 단원 모으러 가 볼까.”
그 말대로다.
대표들이 자신을 적수로 안 봤으니, 방심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줘야겠지.
“여자 단원 쪽은 내가 설득할게. 사실 아마 설득 안 해도 다들 넘어 올 거야.”
그녀는 서리스를 보며 은근하게 웃었다.
서리스는 모르지만, 여자 단원 사이에서 평가가 굉장히 좋다.
클로나가 견제를 해 와서 그렇지 서리스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여자 단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연결 고리 만들어 주는 게 아쉽긴 한데.’
그래도 지금은 그것보단 서리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 좋다.
클로나가 보기에 서리스는 어떤 식으로든 펜타니엄의 한자리를 꿰찰 것이다.
‘더 나아가면 좋고, 꼭 아니어도 서리스 후배님과의 관계는 좋게 유지하고 싶거든.’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들고 서리스의 미래도 밝을 것 같으니.
클로나는 앞으로도 계속 서리스의 편에 있고 싶었다.
“50기도 물론.”
그렇기에 이참에 확실하게 어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클로나의 속내를 어느 정도 눈치챘으면서도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스 입장에서도 클로나는 좋은 선배이자 청랑단 동료였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우선적으로 누구를 더 끌어 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내 기수가 안 된다는 게 생각보다 걸림돌인데.’
솔직하게 말해서 레가놀의 신임은 굳건하다.
특히 남자 단원 사이에서 그의 입지는 확고하며, 그들이 얼마나 서리스에게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여자 쪽과 50기, 이걸로는 확실히.’
모자라다.
51기는 이미 레가놀의 편.
라파즐리가 뭘 할지는 몰라도 남자 쪽은 레가놀이 우세다.
‘잠깐만.’
그러다가 곧 서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분명 윌리엄은 단원이라고 했다.
‘청랑단원은 포괄적으로 말하는 거니까.’
클로나를 뒤따라 가던 서리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고개가 어느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지.”
“서리스 후배님, 안 가?”
서리스가 따라오지 않자 클로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돌아보았다.
“클로나 선배님, 저한테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요.”
서리스는 클로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서리스의 생각을 전해 들은 클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박장대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서리스 후배님, 생각보다 재밌는 생각 많이 하는구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능할 거라고 보는데. 만약 된다고 하면 끝이네.”
통하는 순간 누가 뭐래도 모의전은 승리라는 듯 클로나가 히죽 웃었다.
“그래서 바로 가게?”
“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할지 모르니까요.”
“그런 생각하는 사람은 서리스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클로나가 서리스와 동시에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이날 둘의 작당이 어떻게 튈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한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