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몇 달 뒤, 세계 침식 속.
“도로시!”
“이야악!”
서리스의 부름에 도로시가 폭발적으로 도약했다.
그럼과 함께 그녀는 잔뜩 성난 사자 마수 위에 올라타 식칼과도 같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나갔다.
하지만 마수 쪽도 만만치 않았다.
도로시의 맹공에 몸을 틀어 그녀를 튕겨 내곤 역으로 달려들려 했다.
하나, 그 자리에는 이미 서발광이 있었다.
비섬류(怌閃類)
금강잔월(金强虥狘)
반류섬(反流閃)
그 순간 서발광의 검에 닿은 사자 마수가 오히려 공중으로 튕겨 졌다.
마치 거대한 고무에 부딪힌 듯 허공으로 붕 떠오른 마수가 경악했을 때.
그의 몸통에 청록색 빛을 머금은 화살 한 발이 장렬히 꽂혔다.
“쯧, 얕나.”
가죽에 박힌 듯한 화살을 보며 아카펠이 혀를 찼을 때 그 사이로 서리스가 도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자 검이 별빛으로 맹렬히 물들었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오식(五式)
청운귀참(淸雲晷斬)
내리그은 검격에 사자 마수의 가죽이 찢겨 나갔고.
이내 사자 마수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방금 마수가 세계 침식의 주인이었다.
사라져 가는 세계 침식을 올려다보며 서리스는 땀을 훔쳤다.
이제는 53기만으로도 세계 침식 하나를 막을 정도에 이른 것이다.
그 순간 주인에게서 흘러나온 검은 빛이 또다시 서리스에게 스며들었다.
그에 따라 검은별에서 작은 환희의 박동이 느껴졌다.
이건 몇 번을 겪어도 적응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세계 침식자는 세계 침식을 만들어 내는 존재인데.’
왜인지 서리스는 오히려 세계 침식을 흡수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함께 서리스는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가 표정을 고쳤다.
그러곤 모두를 둘러보자 꽤나 믿음직스러운 녀석들이 있었다.
곧 있으면 1년 차가 되어 가기 때문일까.
53기도 이제는 세계 침식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1년 차부터는 끝없는 초롱도 파견된다고 하던데.
그때부터는 보다 본격적으로 움직일 듯싶다.
“서리스!”
그런 순간 서발광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최근 키가 부쩍 커져 서리스와 머리 하나 밖에 차이가 안 나게 된 서발광은 매일 매일을 즐거워했다.
금강잔월 덕분에 육체가 끊임없이 성장을 해 주니 재밌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서발광은 금강잔월과 함께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금강잔월도 본디 육체와 흐름의 구성이니 청운귀명도만큼이나 자유롭다.
그 덕에 서발광도 자유로이 검술을 재구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나도 배울 점이지.’
서리스는 별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것이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청운귀명도나 금강잔월을 언제나 섞지 않고 따로따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서발광을 보고 서리스도 새로운 시도를 해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조만간 재밌는 걸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다들 수고했어. 근처 여관에서 하루 쉬고 복귀하자.”
그 말에 모두가 찬성했다.
세계 침식 밖으로 나온 서리스는 청랑단 쪽에 연락을 넣어 두곤 근처 마을 여관을 찾았다.
“침대 완전 좋아!”
방문을 열자마자 도로시가 점프하듯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서리스는 짐을 내려 둔 채 말했다.
“도로시,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
“귀찮아아. 직계님이 씻고 옷 갈아 입혀 줘.”
“난 네 엄마가 아니다.”
“아니었어?”
서리스가 살아온 생을 따지면 조카뻘이긴 하다.
“헛소리하지 말고.”
“예에.”
도로시는 귀찮아하면서도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세계 침식 속을 그렇게 굴러다녔으니 본인도 찝찝하긴 했겠지.
그사이 옆에서 주섬주섬 짐 정리를 하던 서발광을 본 서리스는 아카펠을 돌아보았다.
창문 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였다.
‘최근 자주 저러는 거 같은데.’
요즘 자주 생각에 잠긴 시간이 많은 아카펠을 보고 서리스는 턱을 매만졌다.
어렴풋이 아카펠의 고민이 무엇인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아카펠은 흔히 말해 정체기였다.
서발광이야 원래도 이미 검술은 완성되어 있었고.
소드란의 별 덕분에 육체의 잠재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서 계속해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시 쪽은 원래도 재능이 있었고, 거기다가 마왕화라는 숨겨진 비기도 하나 있다.
서리스는 말할 것도 없다.
4성에 완전히 안착했음은 물론, 곧 있으면 5성까지 바라보고 있을 정도니까.
같은 53기 동료들이 이렇게 성장을 하고 있는 마당.
아카펠은 활 숙련도는 올랐을지언정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물론 아카펠도 안달 날 필요는 없을 정도로 괜찮게 성장 중이지만.
주위 환경이 이러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슬슬 본인도 답답한 시점이 왔겠지.’
아카펠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자신의 활을 매만지며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에 상처가 날까 봐 가만히 있었지만.’
아카펠은 뒤를 맡겨야 하는 동료 중 한 명이다.
더군다나 언젠가 그도 칸빌레에서 한자리를 맡을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아카펠과는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서발광.”
“응?”
짐 정리를 마친 서발광이 자신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서리스는 그의 옆에 앉았다.
“아카펠이 요즘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고 느끼는 거 같아.”
“아.”
서발광도 눈치챈 게 있었던 듯 아카펠 쪽을 힐끗 보았다.
이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을 그간 보아 온 53기 모두가 진작부터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일 아침쯤 출발하기 전에 아카펠에게 이야기 좀 해 볼까 하는데.”
“응, 알았어. 도로시는 내가 맡고 있으면 되는 거지?”
역시 서발광은 눈치가 빨라서 좋다.
“뭐야. 뭔데. 나 빼고 뭔 이야기 해?”
어느새 목욕을 끝낸 도로시는 비누 향을 풀풀 풍기며 다가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로시, 머리부터 말리고 와.”
“머리가 길어서 그러기 귀찮은걸.”
그러면서 그녀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마구 털기 시작했다.
그에 서리스와 서발광이 질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는 오히려 그게 즐거운 듯 깔깔거렸다.
그렇게 왁자지껄 한 하루가 지나가고.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올랐다.
새벽 7시경.
아직은 이른 아침.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여관에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서리스 일행도 이른 아침부터 떠나기 위해 준비를 마쳤다.
“아카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막 짐을 챙긴 아카펠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왜?”
“나랑 대련 한 번 하자.”
뜬금없는 말에 아카펠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대련? 아침부터 갑자기 왜.”
“한번 해 보면 알 거야.”
여전히 의아해하는 아카펠이었지만,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의 생활 덕분에 그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러지는 않겠지.
짐을 내려 둔 아카펠과 서리스는 곧장 여관의 공터로 갔다.
여관 주인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해 잡아 두었기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대련이라니 무슨 바람이래.”
아카펠이 익숙하게 활을 들어 올리며 물어왔다.
그의 물음을 듣고 서리스는 청운귀명으로 그림자 검을 일으켰다.
“최근 나사 하나 빠진 거 같은 동기 힘 좀 불어 넣어 줄까 해서.”
“내가?”
“아카펠, 너 요즘 성장이 멈춘 게 신경 쓰이지.”
활을 들던 아카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쓴웃음과 함께 한숨 소리를 내었다.
“티 났나.”
“너무 났지. 도로시도 알 거다.”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는 스스로 받아들이는 시점이 온 것이다.
“나는 꽤 재능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아카펠은 아쉬움이 담긴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를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참 많더라. 서리스, 너도 그렇고.”
“재능이라. 부정은 안 할게.”
그러면서 서리스는 자신의 검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건 아카펠. 너도 마찬가지야.”
“……나도?”
“그래, 너도.”
그리 말한 서리스가 갑자기 바닥을 박차 뛰어올랐다.
그가 갑작스레 달려들자 아카펠이 급히 활을 봉으로 바꾸며 방어했다.
서리스는 검을 계속해서 몰아쳐 갔다.
아카펠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모든 공격을 받아내자 서리스는 씨익 하니 웃었다.
“그거 알아? 방금 한 내 공격을 이렇게 연달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청랑단 내에서도 별로 없어.”
“그건 네, 가 조절하고 있, 으니까. 그, 렇잖아!”
서리스를 봉으로 텅 하고 쳐 낸 아카펠이 짧게 숨을 골랐다.
“아니, 원거리 전을 주로 삼는 사람 중에는 확실히 없어.”
아카펠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야 나는 봉술을 배웠으니까. 그렇지.”
“그 이전에 아카펠 넌 눈이 좋아. 활을 다루기 때문인지 동체 시력이 남들과는 궤를 달리해.”
아카펠이 서리스의 공격을 모조리 맞받아칠 수 있는 이유.
그건 그의 눈에 있었다.
육체가 못 따라올지언정 아카펠은 서리스의 공격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너는 굳이 원거리를 집착할 이유가 없어.”
“서리스, 우리 가문은 칸빌레야.”
칸빌레 가문은 활을 다루는 소가문이다.
“그런 면에서 사고방식이 묶여 있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같은 가문 사람이라도 잘하는 건 전부 다른 법이다.
펜타니엄이 자랑하는 청운귀명도만 보아도 그렇다.
청운무투나 청운귀명마부터 시작해 얼마나 많은 분파가 있는가.
“활을 포기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아카펠, 너는 별의 힘을 빌려 화살을 만들고 있지.”
“그게 칸빌레 비기 선록화우의 기본이니까.”
“그럼 차라리 별로 활자체를 만드는 건 어때. 그것도 근거리도 바로 대응 가능한 형태로.”
“서리스, 그게 말처럼 쉽지는…….”
말을 이어가던 아카펠의 표정이 살짝 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화살의 크기와 길이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내던 아카펠이다.
이제 와서 활이라고 못 만들까.
“하지만 나는 별의 힘이 그 정도로 많지 않아.”
“쓰면 늘어.”
그 순간 서리스의 청운귀명도에서 별의 힘이 치솟기 시작했다.
“당장 써 보면 알겠지.”
“잠깐.”
아카펠이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서리스가 다시금 도약했다.
그의 공격에 당황한 아카펠이었지만, 그도 전투에는 익숙했다.
그렇기에 바로 봉을 들고 반격하려 했으나, 그는 그 순간 생각을 바꿨다.
아카펠이 봉을 놓았다.
뒤이어 그의 손아귀에서 청록색의 빛과 함께 봉이 쥐어졌다.
채엥, 챙!
아카펠과 서리스가 다시금 부딪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안하던 그의 봉도 어느샌가 점점 더 형태가 확실해져 가기 시작했다.
나무를 깎아낸 듯한 청록빛을 진하게 머금은 봉.
그것에는 은은하게 흐르는 별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 순간 아카펠의 별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의 봉은 그 상태로 활이 되었고, 서리스의 눈앞에서 화살이 만들어졌다.
몸이 기억하기에 끊이지 않고 이어진 동작.
거리에 구애받지 않은 아카펠의 화살이 그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서리스가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
“거봐, 하면 되잖아.”
“말했잖아. 지금의 유지에도 별이 다 사용되고 있다고.”
처음이라 별의 출력 조절이 힘든 듯 아카펠이 지친 듯 말하자 서리스는 물었다.
“그래도 쓸 거지.”
아카펠이 미묘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기분인 거겠지.
“그럼 오늘 다 써 보자고.”
“자, 잠깐, 서리스.”
서리스가 그림자 검을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에 당황한 아카펠을 향해 서리스가 이미 늦었다는 듯 씨익 하니 웃었을 때.
아카펠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