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몰려든 청랑단원들은 서리스 주위에서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짜식, 미쳤네!”
“와씨, 이걸 진짜로 뚫고 와?”
제복이 강물에 젖건 말건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서리스를 부축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아직 이번 세계 침식의 주인을 쓰러뜨리진 않았지만.
해귀사는 웬만한 주인과 비슷한 급의 마수다.
그런 마수를 일격에 박살 내놓고 왔으니 다들 난리가 난 것이다.
더불어 서로의 노력이 합쳐져 낸 결과기에 기뻐 마지않는 그들을 보고 서리스도 따라 웃었다.
‘그렇구나.’
소속감이라는 게 이런 거였나.
전생에서 평생을 외면받은 채 살아온 울드렌은 어른이 되어서도 알지 못했던걸.
이제야 깨우치는 기분을 느꼈다.
“자자, 다들 기쁜 건 알겠지만. 아직 세계 침식 안이야. 잠깐, 휴식한 다음 다시 움직이자.”
클로나가 박수를 짝짝 치며 열띤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녀는 능숙하게 경계를 설 사람을 뽑으며 쉴 곳을 확인했다.
확실히 기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능숙했다.
‘그러고 보니 검은별은.’
젖은 제복의 물을 짜내며 서리스는 검은별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또 이러다 갑자기 폭주하면 곤란하긴 한데.’
머리를 긁적이던 서리스는 우선 검은별에 대한 생각을 넣어 두었다.
당장은 세계 침식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 * *
서리스 쪽이 해귀사를 물리친 사이, 2팀 쪽도 마수와 맞서고 있었다.
푸른색 비늘로 뒤덮인 기다란 몸통.
한눈에 보기에도 섬뜩한 붉은색의 눈과 새까만 혀.
청괴사(靑怪蛇)라는 이름의 거대한 마수였다.
“샤아아아악!”
꼬리로 가면 갈수록 커져가는 푸른색의 칼날과 같은 비늘들이 흔들거렸다.
그 순간 청괴사가 거대한 몸에도 불구하고 뱀 특유의 움직임으로 고속 이동을 시작했다.
채엥!
청랑단원들의 공격이 한 차례 울려 퍼졌다.
청괴사의 비늘은 강철보다도 단단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청랑단원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날이 전혀 안 들어.’
지나가는 청괴사를 베고 착지한 도로시의 눈이 흔들렸다.
비늘이 단단해도 너무 단단했다.
이래서는 하루종일 휘둘러 봤자 쓰러트리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청괴사의 몸통을 타고 달리며 서발광이 맹렬히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감은 눈으로 무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으나, 그가 휘두르는 검은 청괴사의 비늘을 갈랐다.
대체 왜 이렇게 강한 사람들이 많은 걸까.
도로시는 자신 혼자만 청괴사 상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자, 좌절감에 빠졌다.
‘이래서는.’
더 나아가 청랑단에서 자신은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식칼과도 같은 두 개의 검을 꽉 쥔 도로시의 눈빛이 변했다.
‘나도.’
도로시의 눈동자가 어디론가 향했다.
거기에는 청괴사의 비늘의 일부분이 있었다.
아까 전 청랑단원들과 교전 중 일부가 떨어져 내린 것이다.
도로시는 그 비늘을 손으로 쥐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는 주머니 속에 비늘을 넣어 둘 뿐이었다.
‘참아. 여기에 기댈 생각 없었는걸!’
제힘으로 해낸다.
그리 결심한 다시금 도로시가 다시금 청괴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검이 맹렬하게 청괴사에게 휘둘러졌다.
그녀의 검은 처음과 같이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고 청괴사를 계속해서 몰아쳤다.
숨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윽!”
도로시가 아슬하게 몸을 젖힌 순간 그녀의 머리 앞에 비늘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로 델리피드가 스쳐 지나가며 청괴사의 몸에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53기! 좀 더 주의를 기울이세요! 무리 안 해도 되니까요!”
무리라고?
아니다.
좀 더 할 수 있다!
청괴사의 비늘을 밟고 뛰어오른 도로시가 더더욱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오기는 그녀의 성장을 가속했다.
도로시의 움직임이 점차 청괴사를 따라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갈증이 그녀의 심신을 태웠다.
무언가에 닿을 듯한 기분이 그녀를 고조시켰다.
그런 순간이었다.
“다른 마수가 나타났다! 피해!”
그녀의 눈앞에 짧은 섬광이 번쩍였다.
둔탁한 충격이 그녀를 강렬하게 때렸다.
무언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도로시는 이미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안 돼!’
고조된 감정이 한순간에 박살 났다.
기껏 눈앞에 다가온 성장의 기회를 놓친 것에 그녀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무방비할 때 당한 공격 때문에 그녀의 육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도로시!”
누군가가 짧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도로시의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 * *
뚝뚝.
도로시는 무언가 자신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코끝에 지하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희미하게 떠진 눈에 어두컴컴한 주위가 보였다.
종유석과 함께 거대한 광장이 살며시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
왜 자신이 동굴에 있는 걸까.
그런 걸 떠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콰직!
거대한 양날 도끼가 자신의 눈앞에서 휘둘러졌다.
“히악?!”
이에 도로시가 놀라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도끼 끝에는 새까만 뱀이 반 토막 난 채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하아, 후, 로시로시, 정신 차렸구나!”
힘겹게 숨소리를 고르는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신을 차린 도로시가 돌아보자, 거기에는 양손 도끼를 쥔 애니쉬아가 있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난 채, 땀에 범벅이 된 그녀는 딱 보기에도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 보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도로시가 추락한 장소는 때마침 공간 왜곡이 일어난 장소였다.
그 공간 왜곡이 이어진 장소는 다름 아닌 여기 있는 동굴 광장.
정확히는 뱀굴 광장이었다.
눈으로는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수많은 뱀 마수가 득실거리는 이곳으로.
도로시는 정신을 잃고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 그런 그녀를 따라 공간 왜곡으로 뛰든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애니쉬아였다.
도로시가 정신을 잃고 나서 몇십 분.
애니쉬아는 홀로 도로시를 안전한 곳에 두고 혼자서 뱀 마수와 싸우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그저 도로시를 지키기 위해서.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도로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나를 구하러.”
정말로 순수한 의문이었다.
애니쉬아가 자신을 구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으니까.
오히려 자신을 구하려고 공간 왜곡 속에 따라 들어오는 건 자살 행위였다.
“동료가 위험에 빠지는 걸 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 물음에 애니쉬아는 도끼를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고 외쳤다.
도로시는 그녀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없다.
정확히는 도로시는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도로시는 스스로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부족한 사람이란 걸 잘 안다.
‘그런데 왜.’
하지만 애니쉬아는 그런 자신을 구하러 왔다.
“우리 로시로시와 나는 같은 청랑단이잖아. 위험하면 구하러 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같은 청랑단이라는 말을 듣고 도로시의 눈이 흔들렸다.
도로시는 자신이 청랑단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걸 잘 안다.
자신은 청랑단 내에서 외부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을 고칠 방법을 몰랐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애니쉬아는 자신을 이미 청랑단의 일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스스스슥.
그 순간 갑자기 뱀들이 광장 중앙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전까지 팔뚝만 한 굵기였던 뱀들이었지만, 그 크기가 점차 거대해져 갔다.
오싹한 기분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저건 위험하다.
도로시와 애니쉬아는 한눈에 직감했다.
“로시로시, 한 번 뚫어 볼 테니까. 그 틈에 도망쳐! 동굴을 쭉 달리다 보면 공간 왜곡이 있는 장소가 있을 거야!”
애니쉬아의 외침을 듣고 도로시는 멍해졌다.
도로시는 집단에 적응하는 법을 모른다.
그녀는 어린 시절 때 가족에게조차 적응하지 못했었으니까.
그래서 혼자서 살았다.
한량과 같이 규율의 얽매이지 않고 같이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처음으로 청랑단에 소속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도망 안 칠래.”
도로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시로시?”
애니쉬아가 놀라서 되물었을 때.
도로시는 청괴사의 비늘을 입에 물고 있었다.
“갈 거면 같이 가.”
그 말을 듣고 애니쉬아의 눈이 놀란 듯 떴다가 곧 천천히 기쁜 듯 휘어졌다.
“오늘 본 건 비밀로 해.”
도로시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 비기는 불완전한 비기지만,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가 있는 거지?”
도로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놓쳤던 두 검을 다시 쥐었다.
그러곤 자신의 별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나디아 도로시.
제나디아 가문의 막내딸인 그녀는 제나디아 직계들과는 다른 핏줄이 섞여 있었다.
제나디아 가문의 가주인 그녀의 어머니는 오래전 남편을 세계 침식에서 잃었다.
아이는 셋, 남편 없는 홀몸으로 살아가던 도중 그녀는 어느 날 한 남자와 아주 짧은 교제를 가졌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세계에 두 개 있는 마탑의 주인이자.
천하오장성 중 한 명.
마왕(魔王) 아라만
그의 핏줄을 이어받은 도로시에게 새겨진 별은 특별할 거 없는 제나디아의 별이 아닌.
마왕의 별이었다.
이 별 때문에 도로시는 가문에서도 다른 취급이었다.
피가 섞였지만 외부인.
자신들과 다른 것을 보듯 바라보는 남매들의 눈 속에서 도로시는 자라왔다.
그 때문에 도로시는 줄곧 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게 외면당한 그녀가 누군가와 어울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도로시도 은연중에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다.
혼자는 결국 외로운 법이니까.
그래서 도로시는 마왕의 별이 싫었다.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게 싫었다.
그렇기에 마왕의 별로 인해 사용할 수 있던 비기도 전부 봉인한 채.
그녀는 오로지 저 자신의 힘을 단련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지금 도로시는 이 순간 결심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마왕별의 힘을 쓰겠다고.
곧 후광과도 같은 별빛이 동굴 광장 전역을 메웠다.
빛 사이로 도로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로시로시.”
그걸 보고 놀란 듯한 애니쉬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괴사의 비늘이 여기저기 돋아나고 동공이 뱀과 같이 변했다.
더군다나 그녀가 쥐었던 식칼과도 같은 검 또한 푸른색의 톱날이 자라나 변해 있었다.
마왕화(魔王化)
마수의 특성을 자신의 무기와 몸에 가져오는 마왕별 특수 비기였다.
“갈게.”
비늘을 물고 있는 도로시의 입가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짧게 울린 음성과 함께 도로시가 바닥을 박차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