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27화 (26/275)

27화

세계 침식 속.

뱀과 같이 똬리를 틀었던 부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본래의 갈색빛을 읽은 새까맣게 변한 꽃이삭을 쩌억 열었다.

그것은 침입자를 잡아먹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부들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촤악, 서걱!

부들이 뱀처럼 날아들자마자 검이 움직였다.

잘려 나간 부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소시지 한 번 잔뜩 걸려 있네. 어우으, 이러다 부들 노이로제 걸리겠어요.”

선두에 선 한 남자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갈색의 긴 머리의 안경을 쓴 그는 49기 대표 델리티드였다.

“뒤에 잘 쫓아오고 있지요?”

“엉, 걱정 마.”

델리티드가 돌아보며 묻자 같은 기수 단원이 대답하며 나타났다.

도로시와 서발광이 포함된 2팀이었다.

그의 말대로 다들 문제없이 잘 따라오고 있자 델리티드는 코를 팽 풀었다.

“아무래도 부들이 저주라도 거는 모양이에요. 코가 간지럽네요.”

“그건 델리티드, 네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야.”

여러모로 엉뚱한 사람이었다.

“신입들은 괜찮나요?”

“예, 예, 괜찮아요.”

“괜찮아.”

서발광과 같이 대답한 도로시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이 나보다 강해.’

한 명, 한 명을 봐도 자신보다 약한 이가 없다.

전부 대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

도로시는 이제껏 본인 실력에 자신 있었다.

하지만 웬걸.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우물 안 올챙이였다.

‘나 이렇게까지 약했던 걸까.’

솔직히 충격이었다.

델리티드가 손쉽게 잘라 낸 부들은 도로시가 몇 번은 내려쳐야 잘릴 정도로 질겼다.

그걸 단칼에 잘라 버리다니.

그와의 별 운용력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새삼 깨닫게 될 정도였다.

‘그에 비해 나는.’

도로시가 스윽 옆을 보았다.

체력이 밀리는 듯하긴 하나 서발광도 세계 침식을 척척 잘 나아가고 있다.

그에게 검집만으로 당했던 기억이 스리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착해서 나쁜 놈.’

당시 자신과 실력 차이 나는 자신이 다칠까 봐 그가 손속을 두었다는 걸 아는 도로시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이 분했다.

그런 순간 그녀의 허벅지를 향해 부들이 날아들었다.

딴 생각 하느라 한 박자 늦은 도로시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도로시가 상처를 각오했을 때.

“로시로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러다 다친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애니쉬아가 나타나 부들을 커다란 도끼로 쿠웅 내려찍었다.

그걸 보자마자 도로시는 그 즉시 바닥을 박찼다.

한 손은 역수로, 다른 손은 본래대로 든 채 식칼 같은 검으로 부들의 몸체를 전부 갈랐다.

“후우.”

짧은 숨을 내쉰 도로시가 목가를 닦았다.

“평소에 생각 하나도 없는 애가 웬일로 그렇게 깊이 생각한대? 뭔 일 있어?”

그러자 애니쉬아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왔다.

“……딱히 그런 거 없어.”

그런 애니쉬아를 보던 도로시는 평소 한참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곤 걸어가기 시작했다.

평상시와 다르게 기운차지 않은 도로시의 모습 때문일까, 애니쉬아는 겸연쩍게 볼을 긁적였다.

놀려도 늘 텐션 높던 도로시답지 않았다.

“애니쉬아, 저번부터 왜 그리 쟤를 챙겨?”

“맞아, 맞아. 쟤 좀 사차원이잖아.”

그런 순간 같은 방을 쓰던 여자 기수 쪽에서 소리가 나왔다.

도로시는 선배들 입장에서는 다루기 까다로운 후배라 그녀와 친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조금은 얌전해지긴 했다만, 그래도 아직 멀었다.

“귀엽잖아. 나 로시로시가 좋아.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고양이 같아서.”

“너도 참, 성격 좋다.”

애니쉬아는 당차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도로시를 눈으로 좇았다.

오늘만큼은 살짝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며.

* * *

그 무렵, 1팀인 서리스 쪽은 마수와 맞서고 있었다.

“온다!”

“잡히지 않게 조심해! 잡히면 끝이다!”

세계 침식으로 인해 바다만큼 깊어진 강물 속.

바닷속 거대한 물뱀이 수천 개는 되는 지느러미를 촤악 펼치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문제는 놈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마리나 되는 물뱀이 몸을 강물 위에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해귀사(海龜蛇).

이 마수의 이름이었다.

“바다에서나 태어나는 놈이 왜 이런 데서 튀어나오고 난리야!”

“공간 왜곡이다. 강이랑 바다가 이어진 거야!”

여기저기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이 승천하듯 튀어오른 해귀사는 한 차례 혀를 내밀곤.

그리고는 순식간에 부들밭으로 거대한 몸을 내려쳤다.

“전부 잘라!”

“그쪽! 거기도 온다!”

해귀사가 몸을 내리치며 휘저을 때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아카펠.”

그러는 사이 서리스는 아카펠의 옆에 다가갔다.

그러자 해귀사의 머리를 향해 활을 계속해서 쏘던 아카펠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칸빌레 가문에 성안(星眼)이 있지.”

“그건 왜?”

“해귀사의 본체 위치를 알려 줬으면 해서.”

칸빌레 가문은 벽이 있더라도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성안(星眼)이 있다.

그걸 묻는 서리스를 보고 아카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리스, 제정신이야? 해귀사 본체는 강물 밑바닥에 있어.”

해귀사는 바닷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거북이 등껍질이 본체다.

서리스가 그걸 찾는다는 건 본체를 직접 부수러 가겠다는 소리였다.

“방법이 있어.”

“……한때 너와 라이벌 의식을 가졌던 내가 신기하다. 나라면 너처럼 미친 짓은 못 할 텐데.”

그러면서도 아카펠은 은근 기쁜 눈치였다.

서리스와 함께 지내며 아카펠은 그의 여러 장점을 보았다.

그는 무슨 일이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의 강함에 대한 갈망은 진짜.

매일같이 한솥밥 먹으며 서리스의 진가를 엿봤다.

그는 앞으로도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겠지.

‘비록 내가 너의 라이벌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길의 어딘가에 자신도 함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동기 좋은 게 뭐겠어. 까짓거 미친 짓 한 번 어울려줘야지.”

흥미가 가득 담긴 웃음을 지은 아카펠의 눈동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청록색의 빛들이 몰려든 아카펠의 눈동자가 안광을 태운 순간 그의 시야가 화악 뒤바뀌었다.

모든 사물이 투명한 막처럼 변하기 시작하며, 하나씩 겹쳐졌다.

아카펠은 눈으로 들어오는 대량의 정보 때문에 통증을 느꼈지만, 버텨 내었다.

그 순간 강물 바닥 아래 거대한 거북이 껍질이 보였다.

해귀사들이 연결되어 있는 그 등껍질이 바로 본체였다.

“찾았어.”

아카펠은 곧바로 좌표를 불렀다.

그러곤 성안을 풀자 윽 소리와 함께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고맙다.”

“할 거면 바로 박살 내.”

아카펠에게 감사 인사를 한 서리스는 곧장 교전 중인 클로나에게로 뛰어 왔다.

“클로나 선배, 해귀사의 본체로 가겠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리스 후배님, 그건 위험한 생각이라고 보는데!”

해귀사의 머리 하나를 그림자 손으로 붙잡은 클로나가 소리쳤다.

위험하다고 했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해귀사의 본체를 없애는 거다.

그걸 부수지 않는 한 싸움이 너무 길어진다.

게다가 세계 침식 속 진짜 주인은 따로 있을 테니까.

“저한테 그때 사용했던 그림자 갑옷을 덧씌워 주세요.”

그 말을 듣고 클로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착 하고 공중제비를 돌아 서리스 앞에 착지했다.

“진심?”

“예, 진심입니다. 아카펠에게 해귀사의 위치도 알아 왔습니다.”

“아하하! 대담하네!”

깔깔거리며 웃은 클로나는 옆머리를 손으로 사락 넘겼다.

그러곤 그녀의 눈빛이 바뀌었다.

“귀령갑주는 사실상 돌진만 가능해. 게다가 해귀사가 있는 위치까지라면 도착하는 순간 사라질 거야.”

“한 방에 끝내겠습니다.”

클로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진짜로 그래 줘야 해? 혹시나 밑에서 무슨 일 생기면 나 단주님 얼굴 못 봐.”

“예.”

확신 섞인 어조로 답한 순간 클로나는 강가 위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서리스도 뒤따라 무릎까지 온 강 위에 섰고, 클로나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어깨 진짜 넓다.”

“이럴 때까지 농담하십니까.”

“팀워크 하려면 필요하거든.”

눈웃음 지으면서도 그녀는 별을 모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서리스도 자세를 잡았다.

그가 쥔 그림자 검 위로 별들이 몰리기 시작하자, 클로나는 감탄했다.

모의전 때 보았지만, 서리스의 별은 압도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태풍을 눈앞에서 마주한 것과 같은 기분.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서리스는 보는 것만으로 압도됐다.

하지만 문제는 압도당한 것은 클로나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스스스슥.

해귀사의 머리들이 서리스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리스의 강렬한 별의 힘에 끌린 것이다.

“사아아아악!”

해귀사의 머리들이 위압감을 느끼고 입을 벌려 소리를 내지르자 클로나가 외쳤다.

“1팀 전원! 우리 후배님 가는 길 좀 열어 줘라!”

그 외침과 함께 청랑단원들이 강물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모든 해귀사의 머리가 서리스를 향해 급습했지만 청랑단원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막았다.

“서리스, 기왕 하는 거 무조건 끝장 내라!”

머리 하나를 발로 차 날려 버린 엑포드가 악을 쓰며 외쳤다.

53기, 막내 기수.

실제로라면 그가 최고 전력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하겠지만.

서리스의 저력은 모의전 때 이미 보았다.

아니, 그 전부터 서리스는 이미 믿음을 쌓아왔다.

막내, 신입답지 않게 일을 항상 척척 해내던 서리스의 모습은.

모든 선배 기수들이 옆에서 직접 보아왔다.

처음에는 비록 펜타니엄 직계라는 이유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가 착실하게 쌓아 온 모든 것들이 그를 믿게 만들어 주었다.

혜성과 같은 별.

그 별은 해귀사던 무엇이든 박살 내줄 것이다.

‘서리스.’

화살을 미친 듯이 쏟아내던 아카펠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네가 말한 그거구나.’

청소를 도맡아 하고, 선배들에게 깍듯이 대하면서 그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그 모습들은.

‘지금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어.’

등을 맡길 수 있는 진짜 동료.

서리스는 지금 어느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청랑단의 한 사람이었다.

청랑단원 모두가 그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부응해 주어야겠지.

“서리스 후배님.”

서리스의 몸 위로 검은색의 갑주가 덧씌워졌다.

푸른색의 안광을 갑옷 사이로 흘린 서리스의 양 다리 근육이 강물 아래에서 부풀어 올랐다.

“박살 내고 와.”

클로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 순간 서리스가 달렸다.

콰앙!

소리가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서리스 뒤편에 있던 강물이 부들 지대로 날아오르고.

서리스는 물살을 헤치며 강물 밑바닥으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가 나아가는 길의 물들이 모조리 갈라졌다.

곧 서리스의 눈앞에 거대한 거북 등껍질이 보였다.

그림자 검이 어느 때보다 거칠게 울부짖었다.

소드란의 별이 물속에서도 강렬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나아가는 길을 어느 것도 막을 수 없을지니.

금강잔월(金强虥狘)

사자분신(獅子奮汛)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그는 한 마리의 사자가 되어 전력을 담아 내달리듯 가속했다.

그리고 그의 검이 해귀사의 본체를 꿰뚫은 그 순간.

“끼아아아아악!”

강물 위 모든 해귀사의 머리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들의 머리가 강물을 향해 추락하고, 청랑단원들이 전투를 멈췄다.

여기저기 추락한 해귀사의 머리에 달린 눈들이 빛을 잃어 갔다.

저벅저벅.

그리고 강물 사이로 누군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귀영갑주가 사라진 서리스가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돌아온 것이었다.

“하, 하하.”

아카펠이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서리스!”

그리고 그가 소리치며 다가가자 다른 청랑단원 전부가 달려들었다.

1